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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Oct 17. 2024

29. 3년 후

네가 없는 3년.

지난 이야기 

28. 안녕.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

한국 생활을 정리한 윤영은 가장 마지막으로 지수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윤영이 한국을 떠난 지 3년이 지났다.     


처음 반년은 은호와 함께 은호 아빠와 크리스가 사는 미국에 있었다. 은호가 크리스에게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그전까지의 과정이 생각보다 더디고 복잡했다. 은호의 조직적합항원이 일치하는지 검사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은호는 그들과 법적으로 가족이 아니었기에 우선 은호가 영철과 친족관계임을 법적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은호가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데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시하고 협상하는 것은 윤영의 일이었다. 과거에 영철과 영철의 모친이 윤영과 은호를 버렸듯 그렇게 버려지는 경험을 다시 할 생각은 없었다. 윤영은 은호의 보호자로 은호가 어릴 적 자신처럼 오롯이 혼자 싸우지 않도록 아들의 옆을 지켰다. 영철이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아빠로서의 법적인 책임을 경제적으로 보상하고 앞으로의 책임을 약속받기 위해 윤영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영철과 그의 가족이 가진 부의 규모를 알게 되면서 영철의 어머니가 왜 그렇게 윤영을 벌레 보듯 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했다. 영철도 윤영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딸의 수술과 관련한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윤영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은호의 결정으로 이식을 위해 미국으로 왔지만, 아직 어린 은호의 마음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아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분노와 그리움이라는 양가감정은 은호를 문득문득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게 했다. 그 불안과 상처를 받아주는 것이 윤영의 가장 큰 몫이었다. 하지만 은호는 그 분노를 더는 윤영에게 돌리지는 않았다. 다행히 크리스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은호는 아프고 어린 크리스에게 너무 쉽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아빠에 대한 마음은 굳게 닫혀있었지만, 동생에게만큼은 좋은 오빠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은호가 크리스에게 마음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은호의 분노가 크리스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많이 누그러지고 정리되는 것 같았다.     


크리스의 수술이 끝나고 영국으로 떠날 것을 제안한 것은 윤영이었다. 윤영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다. 그로 인해 은호와 윤영은 다시 적응해야겠지만, 영철이 있는 곳에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 은호와 조혈모세포 기증을 얘기할 때부터 마음먹은 일이었다. 은호도 그런 윤영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빠에게 남기를 원하면 그렇게 해도 좋다고 했지만, 영철도 은호도 그것이 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은호와 윤영은 반년 만에 미국에서 영국으로 다시 떠났다. 그나마 은호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언어가 영어였고, 캐나다는 너무 미국과 너무 가깝고 호주나 뉴질랜드는 너무 넓었다. 영국 비자를 받기 위해 준비할 것이 많았고 그 준비를 하느라 미국에 있는 시간이 좀 더 지체되었다. 하지만 결국 윤영과 은호는 런던으로 갔다.  

   

처음 1년은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무엇보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윤영에게 영국에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은호가 영어를 잘해서 윤영의 어려움까지 커버해 주었다. 은호는 영국에 오고 이전보다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된 것 같았다. 아빠에 대한 복잡했던 마음도 어느 정도 사그라지고 엄마에 대한 칼날 같던 표현들도 이제 더는 날이 서지 않았다. 오히려 영어를 못하는 엄마를 챙겨줄 사람이 자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제법 보호자처럼 굴었다. 하지만 은호도 윤영도 지수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은호는 윤영이 결국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 안도와 죄책감을 함께 느꼈다. 오로지 은호 옆에만 있는 윤영을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윤영이 한국을 떠나고 줄곧 약을 먹으며 버틴다는 것을 은호도 모르지 않았다.     


비자 때문에 등록한 것이었지만, 학교를 다시 다니는 것은 윤영에게는 설레는 일이었다. 어학원을 1년 다닌 후, 집 주변의 작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미술을 배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은호를 가지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는데 은호로 인해 다시 학생이 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한인 타운에서 미용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여기에서 다시 치열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아직은 생활비가 모자라지 않았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은호를 챙기는 일만으로도 윤영은 쉴 틈 없이 바빴다.      


영국 생활에 조금씩 적응되면서 오히려 마음은 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윤영은 바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잠을 잘 수 없었기에 낮에는 끊임없이 뭔가를 했다. 미술을 배웠지만, 남는 시간에 중장비운전을 배웠다. 계속 놀 수는 없었고 언제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어떤 일을 하는 게 제일 좋을지 이번에는 이것저것 경험해 보고 천천히 고르고 싶었다. 우선 중장비 중에는 가장 쉬워 보이는 지게차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집안일을 하면서는 눈과 귀로는 지게차 운전 방법 영상을 봤다. 한국에 있을 때 고용센터에 비치된 전단지를 보고 잠깐 가졌던 관심이 계기가 되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는 다행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동을 끄고 차갑고 묵직한 기계에 앉아 기름 냄새를 맡으면 지수가 떠올랐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장을 봤다. 혼자서도 매일 밥을 하고 그래도 남는 시간에는 넓지 않은 뒷마당에 손바닥만 한 밭을 일궜다. 종교는 없었지만, 주말이면 성당에 혼자 앉아 있기도 했다. 집 주변의 공원을 끝도 없이 돌기도 하고, 전철이나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학교에 가기도 했다. 몸이 괴롭지 않으면 생각은 그 모든 틈으로 삐져나와 윤영을 슬프게 했다.      


다시 상담을 받은 지는 반년 정도가 되었다. 영국에서도 화상으로 이전에 상담받던 한국의 상담사를 만날 수 있었다.     


- 안녕하세요. 이 주 만이네요! 그간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 나쁘지 않았어요. 특별한 일도 없었고요.

- 은호가 미국으로 간 것에 대한 기분의 변화는 어땠나요?

- 한동안은 좀 허전하고 쓸쓸했죠. 너무 멀리 가버린 게 서운하기도 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성인 될 때까지는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간 거라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됐지만 기특하고 후련하기도 해요. 은호가 정말 들어가고 싶어 한 학교이기도 했고요. 은호는 미국에서 대학을 들어가고 싶어 하니까요. 트랜스퍼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은호가 정말 노력했어요. 은호 아빠도 믿을 만한 보딩스쿨이라 하고요. 은호 아빠가 거기 있으니 제가 아니어도 혹시 정말 필요한 일이 생기면 완전히 무시하진 않을 거예요. 이제 정말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드디어 육아 해방이네요.

- 네 드디어 졸업했어요.

- 정말 수고했어요.

- 네. 너무 힘들었어요.

- 은호 아버님과는 어떠신가요?

- 은호 때문에 간혹 연락한 거 빼면 거의 연락하지 않아요. 그나마도 은호랑 주고받는 거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요. 처음엔 은호에게 안 좋은 얘기를 할까 봐 전전긍긍할 때도 있었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니까요. 은호도 처음에는 좀 기대했다가 자신의 친부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걸 오래전에 눈치챈 것 같아요. 그나마 경제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 같아요. 은호 아빠가 마땅히 약속한 일이기도 하고요.

- 네. 은호가 아빠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게 느끼시는 것 같네요.

- 네 맞아요.

-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어떤가요?

- 전보다는 괜찮아요. 잊고 지낼 때도 많고요. 지금 하는 일이 바쁘기도 하고요. 약은 계속 먹고 있지만요.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나인 채로 살고 있거든요. 이제 더는 숨 막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런데 가슴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아요. 지금도 혼자 침대에 누워있으면 그 아이의 몸이 닿았던 모든 곳이 시리고 아파요. 그건 정말 통증이에요. 제가 미친 걸까요? 이 우주에 저만 홀로 남아요.

- 전보다 괜찮지만, 여전히 외롭고 그리운 마음이네요.

- 네. 불행하지 않은데 행복하지도 않아요. 어제는 학교로 가는 길에 재규어 쇼룸이 오픈한 걸 봤어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어요. 지수가 거기 있을 것 같아서요. 외국에 나가서 정비 일하고 싶다고 했거든요. 쇼룸은 정비소도 아닌데 아직도 그런 곳을 보면 미치겠어요. 차도 안 살건 데 들어가서 기웃거렸어요. 그런데 없어요. 지수는 아무 데도 없어요. 이제 제 곁에 지수가 없어요. 선생님.     


윤영이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 옆에 있으면 티슈라도 건네줬을 텐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너무 안타깝네요. 윤영 씨의 슬픔이 매우 아프게 느껴집니다.

- 아직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동양인을 보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아요. 멈춰서 한동안 바라봐요. 내 몸에 닿았던 지수의 손과 손가락, 살의 감촉 하나하나를 온몸이 기억해요. 상큼한 청포도 향이 아직도 코끝에 살랑거려요. 잊을까 봐 매일매일 기억을 꺼내려고 애써요. 잘 생각이 나지 않으면 너무 슬퍼요. 수면제를 먹어도 잠이 잘 안 와요.

- 여전히 괜찮지 못한 거네요. 그분을 찾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왜 그렇게까지 참는 걸까요?

- 제가 버렸으니까요. 그 소중한 사람을 제가 외롭게 두고 왔으니까요.

- 윤영 씨의 몸에 그의 이름을 새겨 넣고 기다렸지요. 떠났지만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으시고요.

-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선생님. 온전히 저를 위해서예요. 타투를 하면 한동안은 함께 있는 기분이 들거든요. 온전히 나로 산다는 게 불행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애가 없으면 전 행복하지 않아요. 하지만 다시 지수를 흔들고 혼란스럽게 할 수는 없어요.

- 사실 두려우신 건 아니고요?

- 네. 그 사람이 나를 잊었다는 걸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한다면 전 완전히 무너질 거예요.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너무 예쁘고 너무 좋아서 두려웠어요. 다른 남자들처럼 결국 절 떠날까 봐 사랑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썼는데 실패했어요.

- 그 두려움 때문에 난 지금 내 깊은 동굴에서 나오질 못하네요.

- 네. 동굴 밖은 위험해요. 아시잖아요.

- 그런가요? 옷장 속 괴물은 생각보다 작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내가 생각한 괴물은 없을지도 모르고요.

- 그럴까요?

- 아무도 모르죠. 그 문을 열기 전까지는요. 하지만 누구도 대신 그 문을 열 수도 열라고 강요할 수도 없죠. 본인만이 할 수 있어요.

- 네. 선생님도 지겨우시죠? 매달 같은 얘기를 반복하니까요.

- 살짝 피하시는데요.

- 들켰네요.

- 괜찮아요. 준비되지 않았을 때 싸울 필요 없어요. 저는 지겹지 않습니다. 이렇게 격주로 만난 지도 반년이 넘었네요. 상담에서 내담자가 다시 찾아온다는 게 대부분 기쁜 일은 아니라 기다릴 수는 없지만, 저를 믿고 다시 와주신 윤영 씨가 감사하고 반가웠어요. 알아요. 뭔가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윤영 씨가 꽁꽁 싸매놓은 외로움의 감정을 털어놓고 싶으셔서 오셨다는 것을요. 그러니 언제나 편하게 울고 그리워하세요.

-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 저도 감사합니다. 다음 달에 또 만나요.     


윤영이 노트북에서 화상채팅 어플을 끄고 SNS를 열었다. SNS에서 지수를 찾아보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들었다. 몇 차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계정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의 계정을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지수의 SNS 프로필은 비어 있는 집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사적인 내용은 비공개여서인지 아니면 SNS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창을 닫게 되면 그날은 다른 날보다 더 외로웠다. ‘옷장 속 괴물’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잠깐 엿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한국 포털 검색창에 SNS 이름과 전에 알아뒀던 그의 아이디를 입력했다. SNS 프로필에 윤영의 잃어버렸던 빨간 구두가 올라와있었다. 공개된 사진 속에 빛이 반짝반짝한 재규어가 유리창 너머로 찍혀있었고, 그의 위치가 London으로 찍혀있었다. 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수가 자신을 잊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지금 그가 런던에 있을 수도 있다. 왜 이제야 확인했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정비 일을 배워서 외국으로 가고 싶다던 그의 말이 기억났다. 더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여기 런던에 함께 있다는 것이 윤영을 흥분하게 했다. 지금 더 할 수 있는 용기가 윤영에게는 없었지만, 그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가 그녀를 다시 살아나게 했다.      


다음이야기

30. 그녀에게

지수는 군생활 중에 은호로부터 메일을 받는다. 윤영과 지수의 마지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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