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데 왜 떠나!
지난 이야기
27. 결단
지수와 헤어지기로 마음 먹은 윤영은 은호와 미국에 가기로 결정한다.
윤영은 은호를 공항 근처의 호텔에 두고 홀로 나왔다.
차에 기름을 가득 넣고 비싸서 하지 않던 내부 세차까지 했다. 이 차는 윤영이 살면서 처음 몰아본 새 차였다. 은호가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줄곧 타던 소형 중고차가 완전히 고장 났었다. 은호가 크면서 사람들 시선을 부쩍 신경 썼고, 아빠 없는 아이가 가난까지 부끄러워할까 봐 무리해서 샀던 중형 SUV였다. 너무 아까워서 1년간은 비닐도 뜯지 않고 안에서 과자도 먹지 않았다. 사고 한 번 내지 않고 조심히 몰았던 차를 구석구석 닦은 후 집으로 가져왔다. 갑자기 집을 빼는 바람에 아직 임차인을 찾지 못해 부동산에도 들러야 했고 은호의 학교에도 한 번 더 들러야 했다. 크리스의 상태가 나빠져 생각보다 빨리 미국으로 가야 했다. 영철은 은호만 데리고 먼저 가겠다며 천천히 정리하라고 윤영을 설득했지만, 윤영은 응하지 않았다. 모든 순간 함께 하기로 한 은호와의 약속도 있었지만 자신 역시 빨리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의 욕망이 자신의 의지를 꺾어 버리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떠나고 싶었다. 자신이 정말 해야 할 마지막 정리는 집도 학교도 아니었다.
윤영이 지수에게 전화했다. 지수와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수와 함께했던 어떤 공간도 지수에게 외로움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의 공간에서 그와 헤어지고 싶었다. 이미 짐 정리가 끝난 윤영의 집은 텅 비고 을씨년스러웠다. 이제 더 누구의 시선을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아파트에는 버리려고 남겨둔 손때 묻은 식탁과 윤영이 쓰던 침대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아파트 입구로 검은 이민 가방 하나가 놓여있다.
- 엉망이지?
갑자기 불려 나온 지수는 비어 있는 집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어디 떠나요?
- 응. 미국으로 갈 거야?
- 언제요?
- 내일.
- 내일이요? 뭐가 이렇게 다 자기 맘대로예요! 어떻게 그걸 지금 얘기해요!
지수가 윤영을 보고 소리쳤다. 놀란 얼굴에 분노와 슬픔이 교차했다.
- 너도 알잖아. 은호가 정말 위험할 뻔했어. 다시는 은호한테 그런 일이 생기길 바라지 않아. 마침 은호 아빠가 미국으로 같이 들어가길 원했고.
윤영은 차갑고 담담하게 말했다.
- 그래서 그 자식이랑 떠난다고요?
- 은호한테는 내가 필요해. 거기가 내 자리고.
- 꼭 미국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지수가 애절한 표정으로 말한다.
- 은호가 다 알아.
- 그게 뭐요. 그럼 난 어떡하라고요. 왜 그렇게 이기적인 건데요!
- 미안해. 미안해 지수야.
- 그럼 가지 마요. 은호한테는 제가 얘기할게요. 제가 빌게요.
윤영이 울부짖는 지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 미안해. 이게 맞아.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속이고 싶지는 않아. 너와 있던 순간들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좋았어. 자다가 일어났을 때는 모든 게 꿈일까 봐 무서웠어. 모든 순간이 다 선물처럼 행복했어. 너는 너무 예쁘고 섹시해. 너 같은 애가 나만 바라봐주고 따뜻하고 다정하니까 너랑 있으면 텅 비었던 마음이 가득 차는 것 같았어.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괜찮은 사람 같았어. 지수야, 그래도 난 너를 떠날 거야. 은호를 너와 나처럼 외롭게 만들 수는 없어.
- 다 개소리에요. 사랑하는데 왜 떠나요.
지수를 생각하며 말하는 윤영의 얼굴에 행복했던 웃음이 보였다. 지수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 지수야. 내가 널 좋아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르지? 그런데도 미치게 좋더라. 넌 그런 남자야.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그러니까 더 예쁘고 더 똑똑하고 애 없는 사람 만나. 넌 행복해야 해.
지수가 윤영을 내려다봤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 당신은 행복하지 마요.
- 응.
- 그 자식이랑 자지 마요. 죽여 버릴 거예요.
- 응. 넌 사랑하는 사람 만나고 끝내주게 하고 꼭 안아달라고 해.
- 그럴게요.
- 널 다시 외롭게 둬서 미안해.
지수가 바닥에서 눈물을 꾹 삼키고 있는 윤영의 손을 잡고 그녀의 입에 입을 맞췄다. 지수가 윤영을 일으켜 그대로 안고 침대로 갔다. 난방이 꺼진 윤영의 집에서 둘은 뜨겁게 서로를 안았다.
동이 트기도 전에 윤영이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식탁 위에 메모와 자동차 소유권 이전 관련 서류들과 함께 윤영이 타던 자동차 열쇠를 올려뒀다.
‘오토바이 위험해. 절대 다치지 마. 이 차 타. 마지막 선물. 윤영’
이라고 메모에 써놓았다. 새벽의 어둠 속으로 윤영이 홀로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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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3년 후
3년 후, 윤영은 영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