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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Oct 15. 2024

27. 결단

엄마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윤영

지난 이야기 

26. 바보 같은 난 자꾸 네가 보고 싶고 

홀리듯 지수에게 간 윤영은 자신에게 실망하지만, 그가 반갑다. 


윤영은 이제야 엉망이 된 집을 정리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고, 바로 병원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남았다. 세탁기에 밀린 빨래를 넣어 돌리고,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가져와 냉장고의 상한 음식을 모두 버렸다.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해서 각각 봉투와 상자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기를 돌렸다. 싸늘했지만 이제야 집안에 상쾌한 공기가 도는 것 같았다. 한동안 방치했던 은호의 방도 깨끗이 쓸고 닦았다. 은호가 다시 왔을 때 지금 윤영이 느낀 상쾌함을 느끼길 바랐다. 내친김에 이불보도 싹 새것으로 바꾸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세탁이 다 된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윤영은 커피 한 잔을 타서 부엌 식탁에 앉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달력을 꺼내 봤다. 경찰에서 온 연락을 확인하고 앞으로 남은 일정들을 꼼꼼히 핸드폰에 옮겨 알림을 맞췄다. 은호가 일련의 사건들에서 이득을 본 것이 없었고 오히려 돈을 빼앗기거나 괴롭힘과 협박을 당했던 증거들이 은호와 그들의 핸드폰에서 발견되었다. 자신의 온라인 계좌에서 선재와 그 무리에게 돈을 이체하거나 전자제품 등을 빼앗긴 증거도 있었다. 그들의 부당하고 요구에 무서워서 당하고 있었을 은호를 생각하니 불쌍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윤영이 은호를 돌보는 사이 영철이 선임한 변호사가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선재는 소년원으로 수감될 것 같다고 했지만, 아직 재판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미성년자에 실제 기소가 된 것은 처음이라 형이 그렇게 많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다른 무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몇 년간 수감 됐다 나온다 해도 모두 어린 나이였다.      


윤영이 이제까지 무시하고 있었던 영철이 보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은호가 다닐 만한 몇몇 학교에 대한 정보부터, 미국으로 오게 되면 있을 집의 사진도 있었다. 골수 기증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윤영이 걱정할 만한 질문들을 미리 정리해서 파일로 만들어 보낸 것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가 말한 아픈 딸의 사진이 있었다. 작고 투명한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아이였다. 힘든 치료 때문인지 아이의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없어서인지 더 작고 연약해 보였다. 휠체어에 앉아 비눗방울을 향해 링거 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팔을 한껏 뻗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언뜻 이십 대의 어린 영철을 닮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그가 윤영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 수 있었던 용기와 절박함이 아이의 사진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윤영의 변호사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친권과 양육권을 윤영이 계속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친생부에게 양육비를 청구하는 것과 앞으로 은호가 영철의 아들로서 받을 수 있는 재산 상속분을 법적으로 보장받는 방법을 물었다.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조혈모세포 이식에 대해서도 스스로 알아봤다. 은호처럼 16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친족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법적인 보호자의 동의하에 기증이 가능했다. 실제는 골수를 채취하는 것이 아닌 골수에서 조혈모세포를 채취하여 쓰는 것인데, 지금은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뼈에서 바로 뽑지 않고 헌혈하듯 피를 뽑아 혈액성분분리기로 조혈모세포만 채집한다고 했다. 다행히 드라마에서 보듯이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척추에 굵은 바늘을 꽂아 고통을 참는 방법은 이제 쓰지 않았다. 그래도 며칠간은 입원을 해야 하고 백혈구를 증폭시키기 위한 촉진제를 맞으면 며칠간은 뼈에 통증을 느낀다고 하니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기증 후 2~3주가 지나면 원래대로 회복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기증자와 이식을 받을 환자의 유전자형이 일치해야 가능했다. 영철이 지금은 모든 것을 해줄 것처럼 얘기하지만, 그는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매몰차게 등을 돌릴 사람이라는 것을 윤영은 잊지 않았다.   


윤영은 이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무엇인지 명료해지는 것 같았다. 차를 몰고 병원으로 갔다. 무료 주차가 되지 않아 차는 집에 두고 다녔지만, 오늘은 변호사 사무실도 가야 하고 구청과 학교에도 들러야 할 것 같았다. 집 정리와 빨래를 하다 보니 아침 시간이 좀 지나있었다. 서둘러 병원에 도착해서 병실로 갔다. 손도 대지 않은 밥과 반찬이 식판에 그대로 있었다. 울컥 짜증이 났지만 참았다. 오늘은 중요한 얘기를 해야 했다.     


- 은호야. 자니?     


뒤돌아 누워있는 아들을 불렀다. 핸드폰을 하고 있는지 음악을 듣고 있는지 미동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 잠깐 나갈래? 할 말 있어.     


가만히 있는 은호를 기다렸다. 과거에도 이 시간이 제일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말을 하고 답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윤영은 그 틈을 기다려주지 못했다. 드라마를 보다 나오는 30초의 광고 같은 그 시간이 언제나 천년만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다려야 했다. 끝내 은호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바위처럼 버텼다. 자신의 앞에 서서 꿈쩍 않는 엄마를 내내 무시하던 그가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런 은호를 놓치지 않고 사물함에서 패딩을 꺼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나가자.     


둘은 병원의 중앙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윤영이 정원으로 가는 입구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와 코코아 한 잔을 샀다. 날이 추워 야외정원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날이 좋을 때는 사람들이 가득했던 자리에 은호와 함께 앉았다.     


- 은호야. 엄마랑 미국으로 갈래? 많이 생각해 봤는데, 지금 한국에 있는 것보다 미국으로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너랑 얽혔던 애들이 다 소년원에 가는 것도 아니고, 간다고 해도 몇 년이면 나올 거니까. 엄마는 좀 걱정이 돼. 사실 매우 무서워. 너한테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정말 너무 무서워.

- 가면?

- 가면, 거기에서 학교도 다니고, 앞으로 뭐 할지 천천히 생각도 해보고. 네가 허락한다면 크리스란 애한테 조혈모세포 이식할 수 있는지 검사도 해보고.

- 내가 왜?

-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엄마는 너의 친생부가 원하는 검사 해주고 이제까지 우리가 힘들었던 만큼 보상도 받고 싶어. 양육비도 청구하고, 네가 받을 수 있는 교육비나 재산도 받게 해주고 싶어.

- 결국 돈 때문이라는 거네.

- 응. 그것도 있어. 돈 때문에 난 무시당했고 널 잃을 뻔했고 너랑 떨어져 지냈잖아. 너까지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아. 그들의 돈을 받는 건 너의 권리야. 그걸 찾게 해주는 게 내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들이 그냥은 안 해줄 거야. 그들도 너를 이용하려 하겠지만, 너도 그들을 이용할 수 있어. 엄마 생각에 손해 볼 건 없어.

- 아프데?

- 이식하는 거?     


윤영이 이제까지 자신이 알아봤던 골수이식에 대한 정보를 찾아 보여줬다. 영철이 자신을 속일까 봐 보건복지부에 전화도 해보고 지금 있는 병원의 의사 선생님에게 진료 예약을 잡아 직접 확인도 해 봤었다. 은호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이트 링크도 핸드폰으로 보내줬다.     


- 유전자형이 일치해야 이식도 가능하대. 적합성 여부 검사하기 전에 이제까지 양육비랑 앞으로의 양육비, 네가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상속재산까지 요구할 거야. 물론 다 주진 않겠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해볼 거야. 이제까지 양육비는 엄마가 가질 거야. 그건 내 것이 맞아. 하지만 앞으로의 양육비와 네가 받을 재산은 네가 필요할 때 학비나 생활비로 쓰고 남은 것은 성인 될 때까지 누구도 못 건드리게 맡겨놓을 수 있대. 변호사가 그랬어. 그건 네 거야. 네가 잘 생각해 봐. 이번 주까지는 알려줘야 해. 애가 많이 아프대.     


윤영이 핸드폰으로 영철에게 받은 아이의 사진을 은호에게 보냈다. 은호가 전송받은 사진을 클릭하더니 핸드폰을 눈앞에 가져가 다시 쳐다봤다. 윤영은 알았다. 은호는 모진 아이가 아니었다. 이런 자신의 행동이 반칙이란 것을 알았지만 은호의 마음을 이용했다.     


- 엄마가 모든 순간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약속할게.     


은호가 한동안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는 것 같았다. 따뜻했던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윤영은 어느 쪽이든 괜찮았다. 만약 은호가 골수이식을 해주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아이와 서울의 집을 팔아 제주도나 강원도 시골 같은 곳에 가서 미용실을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았고, 돈 버는 것이 이제는 전처럼 무섭지도 않았다. 미국으로 간다고 하면 영철에게 이용당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만큼의 대가는 충분히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은호가 그 돈으로 더 편하고 더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았다. 그렇게 자신도 지수를 떠날 수 있으면 되었다. 은호가 자신의 삶을 더 잘 수 있게 옆에 있어 주고 싶었고 지수가 이제 그에게 맞는 삶을 살도록 빠져주고 싶었다.    

 

- 지수 형이지? 

- 어? 

- 그때 엄마 핸드폰에서 봤어. 아빠가 한 말.        


윤영도 은호가 알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했었다. 하지만 모를 거라 믿고 싶었다. 은호는 의외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어젯밤에 집에 갔었어. 새벽에 봤어. 형이랑 엄마. 

- 그건. 은호야. 그건…….     


윤영이 놀라 은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은호의 눈빛은 의외로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 갈게. 미국. 


은호가 먼저 일어나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윤영은 은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새 아이는 부쩍 큰 것 같았다. 하지만 멀어져 가는 은호의 모습에서 엄마를 보면 떨어지고 싶지 않지만 미움받을까 봐 울음을 꾹 참던 다섯 살 아기가 오버랩되었다. 그런 은호를 두고 보육원 문을 나서던 자신도 보였다. 이번에는 늦지 않게 윤영이 아이의 뒤를 따라갔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영철을 만나는 것은 변호사가 했고, 마음이 급한 영철은 윤영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양육비와 증여에 대해 시간을 두고 타협을 하기에는 크리스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자신의 딸에게는 각별한 영철이 괘씸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은 해가 되지 않았다. 합의한 금액이 통장에 입금되었고, 당장 현금으로 처분할 수 없는 부동산을 증여받는 과정도 변호사를 통해 철저히 진행했다. 은호는 학교를 자퇴했고, 윤영은 한국의 집을 내놨다. 여권을 신청하고 우선 여행 비자를 받아 나가기로 했다.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새에 진행되었다.


다음 이야기 

28. 반짝반짝 빛나는 내 사랑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윤영은 가장 마지막으로 지수에게 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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