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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은호야, 아빠 따라갈래?
자신이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은호를 영철에게 보내려 했지만, 은호는 그런 엄마를 눈물로 붙잡는다.
은호는 병실을 배정받아 입원했다. 골절도 문제였지만 심리적으로 너무 불안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집에 가는 것보다 병원에 있는 것이 윤영의 마음도 더 편했다.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고 기말고사도 보지 못했지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윤영이 은호 대신 경찰서에 갔고, 꼭 필요할 때 경찰관들이 병원에 와서 진술을 받아 갔다. 은호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윤영이 한 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불안해했다. 어쩌면 그 말을 좀 더 일찍 뱉었다면 좋았을지도 몰랐다. 은호는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그 두려움을 토해내지 못해 자신의 인생에 칼을 꽂고 있었다. ‘그깟 사랑’ 없어도 그만이라고, 자신은 버틸 수 있다고 날을 세운 허세가 얼마 못 간다는 것을 윤영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담배로도 술로도 차지 않는 그 공허함을 차라리 지난번처럼 말했다면 나았을까 윤영은 생각했다.
윤영은 다시 도망가고 싶었다.
영철의 엄마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자신의 지하방에 또각또각 힐을 신고 들어왔을 때, 그녀가 어딜 가려고 하는지 사실 알았다. 잠깐이지만 이대로 그녀를 핑계로 배 속의 아이를 지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따라갔다. 뿌리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의 차에 탔다. 은호의 심장 소리를 듣고 도망 나올 때도 택시를 돌려 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나 망설였었다. 은호를 보육원에 맡기고 밤낮으로 일을 할 때도 그대로 도망가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원룸이라도 얻을 돈을 벌면 데려가겠다고 아이에게 말했지만, 지하 방에서라도 함께 살 수 있었다. 은호가 엇나가고 욕을 하고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실 때도 포기하고 싶었다. 자신을 짓밟았을 때는 드디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에 한 편 좋았다. 내가 아니라 은호가 자신을 버린 거라고, 그가 나를 떠나고 싶은 거라고 도망갈 핑계를 만들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았지만, 사랑을 책임질 힘도 없는 자신이 비루했다. 그런 자신이 다시 또 은호를 버리려고 했다. 은호를 위해서라고 말하며 비겁하게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날 은호가 병실 바닥에 토한 그 두려움과 외로움이 그녀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었다. 자신도 평생을 돌덩이처럼 가슴에 얹어 놓은 감정이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외로워서 문 안쪽으로 한 발을 내딛지만, 두려워서 한 발은 밖으로 빼놓은 채 평생을 살았다. 은호를 자신처럼 그 경계에 둘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은호는 조금씩 나아졌다. 금이 갔던 뼈는 조각 조각난 마음보다 빨리 붙었다.
하지만 윤영은 아직도 지수의 이름이 뜨면 칼에 베인 듯 아팠다. 당연히 자신을 경멸할 것이라 여겼던 그에게 다시 연락이 오자 혼란스러웠다. 윤영은 버림만 받아왔지, 사랑을 버려본 적이 없어 어떻게 끊는지 몰랐다. 차단으로 해놓으면 되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실은 그를 끊고 싶지 않았고, 그가 보고 싶었다. 은호 때문에 혹시라도 곤란한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데면데면 지낸다는 가족들과 더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닌지 걱정되고 미안했다. 불과 얼마 전에 친엄마를 잃은 지수에게 자신은 혼란과 상처만 주는 것 같았다. 윤영은 화장실에서 혼자 그의 프로필을 살폈고, SNS에 들어갔다. 과거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의 SNS까지 타고 들어가 보았다. 어린 여자애들의 사진이 나오면 심장이 두근거리며 요동쳤다. 질투였다. 인스타를 지우고 카톡에서 그를 차단했지만 얼마 못 가 다시 그의 동태를 살폈다. 그에게서 점점 연락이 뜸해지자 마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에 답을 할 용기는 없었지만, 자신이 그의 마음속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무서웠다. 딱 한 번만, 잘 있는지 확인만 해보고 싶었다. 그러면 더는 미련을 가지지 않고 돌아설 수 있다고 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속였다.
- 은호야 엄마 집에 가서 좀 씻고 올게. 청소도 좀 하고 학교랑 보험회사에 낼 서류도 정리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간호사 쌤이 저녁 가져다주시기로 했어. 먹고 있어 알았지?
은호가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한 고개를 끄덕였다. 윤영은 한 번 더 밥 꼭 다 먹으라고 얘기하고는 빨래 거리를 챙겨 나왔다. 병원에 있는 동안 윤영은 체중이 부쩍 줄었다. 딱 맞았던 바지들이 헐렁해졌고 얼굴이 핼쑥해졌다. 야구모자로 대충 가렸지만, 머리는 떡이 지고 부스스해져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니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해가 짧아져 초저녁인데도 하얀 종이 달이 하늘에 떠 있었다. 병원 앞에서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내려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집안은 엉망이었지만 윤영은 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가져왔던 가방을 던져두고 다른 쇼핑백에 자신과 은호의 속옷 몇 장을 대충 챙겨 넣었다. 마음이 급했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재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지수를 처음 만났던 때가 10월이었는데 어느새 12월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니 옷을 입었는데도 벌거벗은 것처럼 찬바람이 그대로 피부에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 옷을 바꿔 입을 여유가 없었다. 꽤 오랫동안 타지 않은 차에 살짝 먼지가 쌓여 있었다. 차 안도 잔털이 곤두설 정도로 추웠다. 차 안이 따뜻해질 틈도 없이 그가 일하는 가게로 내비게이션을 맞추고 출발했다.
윤영이 사거리 한쪽에 주차하고 시동을 껐다. 지수가 일하는 오토바이 가게가 대각선으로 보였다. 지수가 말한 사장님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지수는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어있었다. 은호에게 늦을 거라고만 해서 병원으로 돌아가야 할지 계속 기다릴지 망설여졌지만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조금 더 기다려 보다 늦게라도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그가 잘 있는지 얼굴만 확인하고 갈 생각이었다. 10시쯤 되어서 사장이 가게를 정리하는 듯 보였다. 이대로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허탈했다.
그때 가게 쪽으로 익숙해 보이는 오토바이가 들어왔다. 지수의 오토바이였다. 그런데 지수의 허리를 꼭 안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헬멧을 쓰고 있었지만 작고 야리야리한 몸과 옷이 여자애가 분명했다. 윤영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좀 전까지 오들오들 떨리던 몸에 열이 났다. 지수가 여자와 함께 가게로 들어가고 간판 불이 꺼졌다. 곧이어 사장이 나와 다른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다. 윤영은 가게 안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지수가 어린 여자애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윤영의 마음은 질투로 휩싸였다. 자신을 안고, 입 맞추고, 해맑게 웃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인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다는 생각에 분노와 설움이 밀려왔다.
윤영은 뒷좌석에 있던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차 문을 열고 걸어갔다. 머릿속에는 이미 지수와 여자가 얽혀 뒹굴고 있었다. 그가 어리고 여린 여자의 입술에 키스하고 그의 따뜻한 손이 여자의 몸을 만지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지수에게 자신은 아무 권리도 없는 여자라는 것을 스스로 각인시켜 왔었다. 입으로는 수도 없이 네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해왔는데 막상 그가 그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도려내지는 것처럼 아팠다. 차라리 자신의 눈으로 보고 진짜 그를 떠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유리로 된 가게 문이 열렸다. 문 위에 부착된 센서에서 벨 소리가 났다. 귀 끝이 빨개진 윤영이 가게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계산대 옆의 테이블 위에 먹다 남은 사발면과 삼각김밥, 과자 봉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윤영의 눈이 재빠르게 지수와 여자를 찾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때, 왼쪽 화장실 팻말이 달린 문이 열리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 오늘 영업 끝났어요!
혜림이었다.
- 윤영쌤?
둘의 눈이 마주치고 윤영은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밖으로 나가 차를 타고 달아나고 싶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스텝방에 있던 지수가 나왔다. 지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혜림의 호들갑에 둘은 당황해서 어떤 얘기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윤영을 보자 환해진 지수의 얼굴을 혜림은 놓치지 않았다.
- 뭐야 뭐야! 그 쌍년이 윤영 쌤? 대박. 민지수. 와! 진짜!
- 야! 왜 욕을 해? 너 이제 간다고 하지 않았어?
지수가 혜림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 와! 철벽남 민지수가 누구한테 빠져서 저렇게 죽상하고 있나 내가 어떤 년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그게 윤영쌤이라고? 쌤! 저는 쟤 게인줄 알았다고요. 와! 진짜.
- 안녕. 어서 가라.
- 잠깐만! 그때죠, 그때? 클럽에서!
-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잘 가.
지수가 윤영을 향해 버티고 있는 혜림을 문 쪽으로 밀었다. 혜림이 결국 자신의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지수가 혜림을 내보내고 유리문 위쪽의 잠금 나사를 돌렸다. 혜림이 바로 가지 않고 문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결국 떠났다. 윤영은 온몸에 긴장이 풀려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창피해서 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신이 얼음이라면 이대로 녹아 없어지고 싶었다. 그대로 돌아가려고 입구로 다가가 문을 당기는데 열리지 않았다.
- 이제 왔는데 왜 그냥 가요?
- 잘 있나 해서. 봤으니까 갈게.
빨리 나가고 싶은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 앞에서 망설이는 윤영의 뒤로 지수가 조용히 다가왔다. 막 씻었는지 옅은 비누 향과 솔향기 같은 스킨 냄새가 났다. 지수에게 이런 냄새가 났었나. 윤영은 의아했다. 지수가 손잡이를 잡은 윤영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지수는 그녀를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머그컵에 따뜻한 물을 담아 그녀 앞에 두고는 테이블 위에 있던 음식과 쓰레기를 치웠다. 그제야 윤영의 시야에 지수의 얼굴과 가게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수의 얼굴이 전보다 야위었고 거칠해져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예뻤다. 짧고 까만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 있었다. 그 새 더 컸는지 어른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지수가 준 머그컵을 손에 쥐고 있으니 그제야 꽁꽁 얼었던 손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물티슈로 테이블을 말끔하게 닦아 정리하고 나서야 그녀의 앞에 앉았다. 잠깐의 고요를 깨고 윤영이 입을 열었다.
- 혜림이랑은 자주 만나나 봐?
- 질투해요?
윤영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자신의 마음을 바닥까지 내보였다는 것을 알지만 지수의 입으로 그 말을 들으니 얼굴이 화끈해졌다. 한편으로는 이제 다 망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입은 벌써 포기한 듯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 그랬나 보지.
- 혜림이가 여기 사장님한테 꽂혔어요. 걔가 아무한테나 꽂히는 거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지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넌 괜찮아? 많이 다치진 않았지?
- 일찍 물어보네요. 보시다시피.
지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내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는데 은호가 입원하고 상태가 좀 안 좋았어. 미안해.
지수가 말이 없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윤영은 지수의 침묵이 불편했다. 이렇게 찾아온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아 낯이 뜨거워졌다.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 정말 고마웠어. 은호 도와준 거. 진심이야. 그 말하려고 왔어.
- 할 말이 정말 그게 다예요?
윤영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지수의 날카로운 눈빛에 멈춰 서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 왜 연락 다 씹어요?
- 너야말로 다 알게 됐는데 왜 계속 연락해? 나한테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 보고 싶으니까요.
윤영은 할 말을 잃었다. 보고 싶다는 말이 다시 또 윤영을 흔들었다. 너는 왜 한결같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 갈게.
- 왜 자꾸 도망가요. 이렇게 스스로 올 거면서! 왜 어른들은 다 겁쟁이예요? 진짜 비겁해.
지수가 나가려고 일어서는 윤영의 팔을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지수의 성난 눈빛과 완력에 흔들리던 윤영이 풀썩 쓰러져버렸다. 현기증 때문인지 너무 긴장해서인지 완전히 술에 취한 것처럼 잠깐 정신을 잃었다. 은호의 병간호를 하며 그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해서 체력이 약해져 있었다. 거기에 몇 시간 동안 시동도 켜지 않은 차 안에서 떨면서 기다리다 보니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윤영이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이전에 그와 밤을 보낸 소파 겸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냄새가 나는 담요를 젖히고 몸을 일으켜 기대앉았다. 윤영의 이마 위에 얹어져 있던 물에 젖은 수건이 툭 떨어졌다. 지수가 물컵과 약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 그냥 누워있어요. 열나잖아요. 어른인데 왜 자기 몸 챙길 줄도 몰라요?
지수의 기세에 윤영이 그가 주는 대로 약을 받아먹었다.
- 미안해. 진짜 갈게. 이제 괜찮아.
- 제발!
지수가 고개를 숙이고 낮게 외쳤다.
- 제발. 그냥 있어요. 아무것도 안 바랄 거니까 그냥 쉬었다 가요. 진짜. 내가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왜 이렇게 엉망인 건데요! 화도 못 내게 나한테 왜 그래요!
윤영이 지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등을 돌려 웅크리고 누었다.
- 미안해서. 그런데 네가 날 떠날까 봐 무섭더라. 분명히 헤어져야지 했는데 너한테 와있었어. 병신같이 난 왜 이렇게 네가 보고 싶어?
외로운데 두려워서 오지도 가지도 못했다고 은호가 윤영 앞에서 울며 토했던 그 말을 결국 윤영도 내뱉고 말았다. 공벌레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숨어있는 윤영을 지수가 다가와 조용히 안아주었다. 지수의 숨결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던 윤영의 심장을 잠재우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잠이 들면 안 된다고 한쪽에서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데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았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윤영은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았다. 머리가 빙빙 돌 것 같던 현기증과 두통, 오한도 어느 정도 진정되어 있었다.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기분은 꽤 개운했다. 지수는 옆에 없었다. 자신이 덮은 이불을 가지런히 개켜서 침대 밭에 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가져가 빨아다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지수는 오토바이를 손보고 있었다. 동이 텄지만, 밖은 아직 어두웠고 간혹 한두 명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인기척을 느낀 지수가 윤영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 좀 괜찮아요?
지수가 윤영 쪽으로 다가와 장갑을 벗고 기름때가 묻지 않은 손등을 윤영의 이마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잘 모르겠는지 다른 손은 자신의 이마에 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 어제보단 나은 것 같은데, 그래도 약 더 먹을래요?
- 괜찮아. 넌 안 잤어?
- 좀 잤어요.
- 나 때문에 미안해. 이제 진짜 갈게.
윤영이 자신의 재킷을 찾아 걸치고 입구 쪽으로 가며 말했다. 문은 어제와 달리 열려 있었다. 지수가 서둘러 옷걸이에 걸려 있는 패딩을 걸쳐 있으며 말했다.
- 잠깐만요. 데려다 줄게요.
- 아냐. 내가 갈게. 나 차 가져왔어.
- 저 면허 있어요. 생일 빨라서 일찍 땄어요. 데려다 줄게요. 그렇게 하게 해 줘요.
윤영은 지수를 말릴 힘이 없었다. 지수가 내부의 불을 끄고 나와 가게 문을 잠갔다. 앞서가는 윤영의 손에 걸려 있는 자동차 열쇠를 가지고 윤영의 차가 주차된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런 지수의 뒤를 윤영이 따라갔다. 집까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 지수를 생각하면 혼자 가고 싶었다. 그래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뒀다. 그는 운전은 서툴렀다. 그나마 거리에 차가 없어서 사고는 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집중하고 운전하는 모습을 윤영은 옆에서 바라보았다. 오토바이를 탈 때와 달리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윤영은 다시 못 볼 것처럼 한순간 한순간의 그를 눈 안에 담았다. 집 앞에 도착해 간신히 주차하고 둘이 내렸다. 윤영이 공동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지수가 저 멀리 서서 긴 팔을 흔들고 있었다. 윤영이 그런 지수를 보며 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런 둘을 아파트 밖에서 은호가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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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결단
집으로 돌아온 윤영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은호를 만나러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