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학대한 엄마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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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나 같은 건 엄마가 되지 말았어야 해.
경찰서로 달려온 윤영은 피투성이가 된 은호와 그녀를 비난하는 영철,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지수를 마주하고 무너진다.
윤영이 나가고 두어 시간이 넘어 지수의 아버지가 경찰서로 들어왔다. 지수는 눈을 감은 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윤영의 완전히 비어 버린 눈망울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벤치에 앉아 있는 지수를 쳐다보고는 경찰관 쪽으로 갔다. 경찰관과 한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긴장했던 얼굴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는 서류에 서명한 후, 지수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 사고 치지 말고 집으로 들어가.
지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갑자기 일어나려니 아까 선재 무리에게 맞은 자리가 욱신욱신 쑤셔 짧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먼저 가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는 지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 태워줄게.
아버지가 주차장 쪽으로 갔다. 지수는 거절할지 말지 고민했지만 싫다고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그냥 쫓아갔다. 짧은 기간 동안 아버지를 두 번이나 경찰서에서 오게 만든 것이 미안해서 싫다고 하는 것도 멋쩍었다. 자신 때문에 지방에서 서울까지 이 밤에 운전해 오셨을 생각을 하면 죄송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2개월이면 성인인데 왜 자꾸 이런 일에 얽히는지 답답했다. 오랜만에 탄 아버지 차는 깔끔하고 먼지 한 톨 없었다. 아버지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간판이 켜져 있는 24시간 국밥집에 차를 세웠다. 둘은 말없이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국밥이 작은 돌솥에 담겨 나왔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들깻가루와 새우젓, 부추를 듬뿍 퍼서 넣었다. 계속 긴장한 채로 있었더니 추운 줄도 몰랐다. 뜨거운 국물을 숟가락 가득 떠먹으니 언 속이 다 녹는 것 같았다. 어릴 때 아주 가끔이지만, 가족외식을 하면 주로 호텔이나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은 것을 먹었었다. 지수는 아버지도 그런 음식을 좋아한다고 믿었다. 국밥이나 삼겹살, 곱창 같은 음식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배달을 하고 형들과 어울리면서 처음 먹었다. 아버지는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도 맛있게 국밥을 먹었다. 둘은 공깃밥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 이번엔 지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 죄송해요.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니?
지수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닫았다. 아버지가 계속 말했다.
- 어디서 지내니?
- 일하는 가게에 숙소가 있어요.
- 불편하진 않아?
- 괜찮아요.
- 네 엄마가 남긴 유산이 있다. 네가 성년이 되면 쓸 수 있도록 절차를 밟고 있어. 아버지는 그 돈으로 네가 계속 공부했으면 좋겠어. 네 엄마도 그걸 바랄 거야. 미국이든 캐나다든 너 가고 싶은 데서 공부 계속해.
- 제가 알아서 할게요.
-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어. 한 번 생각해 봐. 계속 나와서 살고 싶으면 오피스텔 알아봐.
아버지가 다시 입을 닫았다. 문득 아버지도 이제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장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봐서만은 아니었다. 지수가 어릴 적 두려워하던 완벽하고 날이 서 있던 남자는 이제 흔적만 남아있었다. 죽은 친생모의 확인할 수 없는 기대까지 끌어다 자기 생각에 힘을 실으려는 시도가 그랬다. 평생을 자신이 가장 옳다고 믿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인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수가 긋는 선을 넘지 않았다. 이 정도의 거리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이 터오는 새벽의 도로는 한산했다. 아버지는 지수를 아파트 앞에 내려 주고는 바로 대학으로 돌아갔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아파트 단지였다. 지난 설날 도둑처럼 도망 나온 바로 그 집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도 이 집이 편치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나올 수 없는 족쇄 같은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오토바이나 찾으러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아파트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막상 집으로 들어가려니 다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집으로 들어가는 매 순간이 거부당하는 느낌이었다. 이미 알고 있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해도 엄마가 치는 경계는 마법의 결계처럼 단단했고 실패 없이 지수를 밀어냈었다. 다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런 자신이 볼품없게 느껴졌다. 이제 괜찮을 때도 됐다고, 이제 있으라고 해도 내가 나갈 거라고 지수는 마음을 고쳐먹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현관문 비밀번호는 바뀌어있지 않았다. 지수가 들어가자 엄마가 기르는 작은 푸들 두 마리와 믹스견 한 마리가 요란스럽게 짖어댔다. 그들은 엄마처럼 한 번도 자신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새벽인데도 엄마가 거실에 나와 있었다. 엄마는 지수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흠칫 놀라는 듯했다. 그녀는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끄고 서둘러 개들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엄마를 보자 평생을 참아왔던 분노와 서러움이 순간 터지고 말았다.
- 저한테 왜 그랬어요?
- 뭘?
- 저한테 왜 그랬느냐고요. 이렇게 보는 것조차 끔찍하게 생각했잖아요.
- 너란 애는 몇 개월 만에 사고 치고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고작 원망이니?
- 몇 개월 만에 만나는 엄마는 다르고요?
- 됐다.
- 왜 그랬냐고요!
안방으로 그대로 들어가려는 엄마의 팔을 지수가 잡았다. 강아지들이 지수를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더욱 시끄럽게 짖어댔다. 가시 돋친 철조망을 움켜쥔 듯 손이 아렸다.
- 이거 못 놔!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했니?
- 차라리 받아주지 말지 그러셨어요.
- 나도 그러고 싶었어! 나도. 왜 나에게 다 그러는 거지?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해? 네 아빠와 이혼하고 네 아빠가 그 어린년과 사는 걸 지켜봐야 했어? 아니면 널 보육원에라도 몰래 버렸어야 해?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그때 나도 고작 스물아홉이었어.
- 차라리 버리지 그러셨어요?
- 그랬어야 했어. 할 뻔도 했지. 그런데 그러지 못했어. 널 보는 내내 괴로웠어.
- 비겁하네요.
- 그런 얘기는 잘난 너희 아빠한테나 해.
엄마는 이내 안방으로 강아지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의 시계는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던 그때, 아기였던 지수를 원치 않게 받아들인 그때 그대로 멈춰있었다. 윤영이 은호를 감당하고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은호가 부러웠다. 그래서 오랜만에 자신의 실체가 있는 엄마에게 더 서운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흥분하여 심장은 여전히 쿵쿵 뛰었지만, 꽉 닫혀있는 문 앞에서 지수는 코웃음이 났다. 과거에는 화가 났고 억울했고 그러면서도 엄마를 이해해 보려고 무던히 애썼었다. 지방에 있는 아버지는 잘해야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마주쳤지만, 엄마와는 매일 함께였다. 자신을 그렇게 미워해도 엄마가 좋았던 어린 자신이 너무 불쌍했다. 그녀를 이해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엄마를 이해하기에는 미운 마음이 너무 컸다.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포기할 마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더는 엄마가 무섭지도 자신이 상처받을까 두렵지도 않았다. 그녀는 나빴다.
지수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남은 짐을 모두 챙겼다. 어쩌면 이제까지는 혹시라도 다시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해 다 챙기지 않았다. 지수는 팬트리에 있는 커다란 캐리어와 베란다에 있는 빈 상자를 들고 방으로 왔다. 쓸 물건은 캐리어에 담고 쓰지 않을 물건은 상자에 담았다. 이제 더는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가족에 대한 마지막 조각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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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은호야, 아빠 따라갈래?
윤영은 이 모든 상황에 죄책감이 느껴진다.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영철에게 전화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