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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Jun 13. 2024

학비를 모아라!

Freedom COSTS

어드미션을 받는다고 해도 학비가 없으면 말짱 꽝이었다.  내가 원해서 가는 유학이니 내 힘으로 해야 했다. 단 한 번도 부모님이 수천만 원의 학비를 대신 내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성인이니까! 이것은 내가 오랫동안 믿어온 중요한 가치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원하는 때 하기 위해서는 '내 돈'이 필요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하면 흔히 집이 아주 잘 살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부는 가족의 도움 없이는 가기 힘들다. 미국 학부는 장학금이 별로 없다. 레지던스(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거주해 온 학생)가 아니라면 시골의 주립대학이라도 학비가 엄청 비싸다. 박사의 경우 대부분은 장학금으로 학비와 생계비를 받는다. 가족이 없고, 도시가 아닌 시골 생활을 하며, 낭비를 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면 문제가 없다. 데려가는 가족도 없었고, 낭비도 안 했으나 그럼에도 동부에 있는 학교나 아이비리그는 지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대나 과학 분야는 연구조교를 필요로 해서 RA  (연구조교. Research Assistant) 장학금이 많지만 상담 쪽은 그렇지 않다. 연구실에서 도구를 가지고 여럿이 연구할 것도 없고 펀딩도 적기 때문에 혼자 연구하는 교수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RA가 아니라 GA (행정조교. Graduate Assistant)나 TA (수업조교. Teaching Assistant)를 해야 한다. 하지만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영어도 잘해야 가능한 일이니 적어도 1년은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첫해 운용자금이 없으면 유학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참 궁금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첫해 장학금을 받지 못한다면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할까?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20대 중반, 나에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모아놓은 돈이 약 5천만 원 정도 있었다.

그 당시에 5000만 원이 있으면 판교에 있는 30평대 아파트를 전세 끼고 매입할 수 있었다. 일명 갭투자!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빠가 매월 용돈을 조금씩 주셨다. 나는 동네의 상업은행(현재는 없어짐)에 가서 처음으로 3년짜리 적금통장을 만들었다. 3년 뒤에 적금을 타면 예금통장에 넣었고 다시 3년짜리 적금을 부었다. 어린이날에 용돈 3000원을 받으면 나는 500원짜리 마루인형을 샀고, 작은 언니는 3000원짜리 인형을 샀고, 큰 언니가 나에게 2000원을 빌려서 5000원짜리 마루인형을 샀다. 나는 언니가 빌려간 돈의 액수를 수첩에 적어 놓고 이자도 받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작은언니가 3000원짜리 마루인형에 흥미를 잃고 나에게 주었다. 가만있으면 생기는 많은 혜택을 놓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아무리 야자를 하고 배가 고파도 길거리에서 떡볶이 한 번 사 먹는 일이 없었다. 오로지 소비하는 것은 책과 CD, 년 1~2회 콘서트 비용이었는데 그 돈까지 모았으면 진짜 삶의 질이 너무 떨어졌을 것 같다. 그 당시에도 나에게 돈이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 대학에 들어가서는 월 10만 원의 용돈과 학비를 제외하고는 부모님에게 어떤 지원도 받지 않았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가 IMF 시기라 그 정도도 감사했다. 엄마가 식당을 하셨는데, 식당에서 종일 일을 하면 하루에 1만 원을 주셨는데 30일을 모으면 다 모아진 돈을 엄마가 빌려가서 갚지 않았다. 엄마도 정말 돈이 부족했다. 역시 가족 간에 돈거래는 안 하는 것이라며 나는 외부 일자리를 찾아나갔다. 그러고도 명절이나 월드컵, 크리스마스 같은 날은 여지없이 엄마의 식당에서 쟁반을 날랐다. 그 당시 카페에서 알바를 하면 시급이 2000~2500원, 도서대여점은 1800원이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소비를 했고, 학원비+밥값+책값+교통비+사교활동비를 정확하게 정한 분량만큼 지출했다. 내가 소비를 줄일 수 있었던 데는 착하고 쇼핑을 좋아하는 둘째 언니 역할이 제일 컸다. 자신이 좋아하는 옷이라도 내가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주었고, 싫증 나거나 작아진 옷은 아낌없이 나에게 주었다. 언니랑 키도 비슷하고 신발사이즈도 같았기 때문에 난 속옷 빼고는 다 언니 옷을 입었다. 연애도 아르바이트하며 하고 친구는 수업과 알바 사이에 만났다. 나는 알바와 남자를 소개해 주는 친구를 가장 사랑했다.


대학교 때 한 알바

카페 음료제조와 청소

식당 서빙

도서대여점 관리

설문지 돌리기

번역

애니메이션 컬러링

보습학원 데스크직원  

투표 개표 감시

독서논술 강사
 

대학원 때 한 알바

조교

외래강사

영어과외 (잠깐)

번역 (해외영화 들어오면 영문홈페이지를 한국어로 번역)

교수님 논문 타이핑이나 워크숍 코디네이터

사이버대 온라인 강의 녹화 참여


대학 때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강남으로 이동, 7시에 영어학원에서 수업 듣고 학교로 이동, 9시부터 수업 듣고 4시에 이동, 6시부터 12시까지 아르바이트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대학원 때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더는 학생이 아니니 아빠에게 받았던 10만 원의 용돈이 없어졌고, 유학을 떠나기 전날까지 엄마에게 매월 30만 원씩 생활비를 드렸다. 학비는 연구소 장학금으로 충당했고, 조교를 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알바를 했다. 출근이 늦어 전보다는 늦게 학원을 갔지만 학원-학교-일-집 이 일상이었다.  


월급을 받아서 적금을 부었고, 목돈이 되면 이율이 제일 좋은 제3금융권에 예치했다. 인터넷 뱅킹이 안 되는 저축은행은 강남 본점에 찾아가서 거래했었다. 그렇게 불린 돈을 중국 ELS에 넣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게 뭔지도 잘 몰랐는데 은행직원의 권유를 받고 투자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한 투자였지만 그 당시 무려 30% 라는 최고의 수익률을 받고 해지했다. 그때, 내 주머니에 5000만 원이 생겨있었다. 여기까지 했어야 했는데 미국에 가기 전에 그 5000만 원을 엄마에게 일임하여 바이오 주식에 투자했다. 엄마가 원금보장을 해줄 거라는 말만 믿고 투자했는데 하.... 나중이지만 상장폐지가 되고 말았다. (빌어먹을...) 우리 가족 모두가 투자해서 그 손실이 어마어마했다.  다행(?) 한 것은 나는 중간중간 주식을 매도해서 학비와 생활비로 썼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내가 가장 손해가 적었다! 그러나 남은 원금은 돌려받지 못했다! ㅠㅠ 이래서 가족 간에 돈거래는 하는 거 아니었는데! 배우고도 또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지금도 그때 엄마가 원금보장 해준다고 하고서는 안 줬다며 투덜거린다.  


내가 간 학교가 정말 풀만 있는 시골이어서 학비와 생활비가 매우 저렴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학비가 그 당시에 매 학기 1000만 원 정도 들었고, 생활비로 연 700~800만 원 정도를 지출했다. 2년간은 깡시골에 살면서 차를 사지 않아 마트도 잘 가지 않았다. 유학 3년 차에 800만 원 정도의 중고 크라이슬러 PT크루저를 샀다. 박사과정 3년 동안 내 돈으로 총 3500만 원 정도를 썼고, 학교를 그만둘 때 차를 다시 팔아서 600만 원 정도를 받았으니 대략 3000만 원 정도를 쓴 것 같다.  물론, 그때 공부가 아닌 취직을 선택하고 종잣돈으로는 투자를 했다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성장했으니 그 값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라고 쓰고 갭투자를 못한 것을 한탄함. 취직은 해도 새가슴 조막손이라 투자는 어려웠을 것으로 분석함 ㅋㅋㅋ)


박사 2년 차부터 GA를 했고, 그 뒤로는 학비와 생활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학비 이외에 1000~1200 달러 정도가 생활비로 들어왔고 나에게는 1년 차 때보다 넉넉한 생활비였다. 보통 다른 박사 과정 한국 학생들은 돈이 부족해서 한국에서 더 받기도 하고 미국학생들은 학교 일 이외의 알바를 했다. 하지만 나는 매월 생활비가 남아서 그 돈을 모아 방학마다 한국에 가는 비행기표를 사기도 하고 학기 중에 쉴 때 여행을 가기도 했다. 그 당시 한국으로 가는 왕복 항공권이 $1500 정도였다. 겨울은 방학이 3주밖에 안되고 월세도 그대로 내야 해서 학생들은 보통 미국에 그냥 남아있었지만 나는 한국에 들어갔다.   


2007년 8월에서 2010년 5월까지의 이야기다. 지금은 학비도 장학금도, 생활비도 모두 완전히 바뀌었으리라 생각된다. 예상컨대, 나는 비슷할 것 같다.


나중에 알게   중요한 사실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내가 원하는  멈추기 위해서는  과정에 타인의 돈이 들어가면  된다 것이었다. 아무리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자유에는 비용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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