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의 생존법 - 동선
동선은 구형 스마트폰에 새 무선 이어폰을 연결하고 KBS 라디오 어플을 켰다. 블루투스를 연결하는 방법은 포털에서 미리 검색해 놓아 어려움은 없었다. 최신형이라 그런지 음질이 이전 유선형 이어폰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선명했다. 무엇보다 끈이 없어 마스크를 끼고 머플러를 둘러매고도 선이 걸리적거리지 않아서 좋았다. 동선이 클래식 전문 라디오 채널을 들어온지도 30년이 넘었다. 20~30년 전에는 일본 브랜드의 워크맨을 사서 라디오도 듣고 들으면서 좋은 음악이 나오면 녹음도 했다.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놓은 음악을 워크맨으로 재생해 듣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편리한 시대인지 모른다. 무거운 워크맨이나 테이프를 주렁주렁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언제든 듣고 싶은 음악을 기다릴 필요 없이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동선의 이어폰에서 정다운 가곡이 흐른다. 오늘은 늦은 퇴근으로 동선이 좋아하는 클래식 실황 음악은 끝나있었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가곡이었지만, 퇴근길의 분주함을 잊게 해주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다.
동선이 늦은 퇴근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유대리 때문이었다. 결혼을 한지 얼마 안 된 유대리는 결혼 준비 때부터 결혼식, 신혼여행까지 상반기에만 20일이 넘는 휴가를 받았다. 그로 인해 같이 일하는 동선은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꼭 늦은 퇴근을 해야 했다. 이제 좀 일상적인 삶을 사나 했지만, 유대리가 허니문베이비를 갖는 바람에 한 달에 한두 번은 병원에 간다고 휴가를 내고 몸이 안 좋다고 병가를 내어 그 일을 또다시 동선이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 나라가 어째서 저 출산 국가인지 동선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카드사에서 일하는 동선 주변에는 여직원이 많았다. 싱글인 동선과 달리 대부분의 직원들은 결혼을 했고 결혼을 한 대부분의 여직원들은 적게는 한 명에서 많게는 세 명까지 아이를 낳았다. 그들은 결혼식을 시작으로 출산과 육아의 기간에 이제까지 동선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숱하게 많은 혜택을 받았다. 20년이 넘게 근속한 동선의 연차 보다 올해 3년 차인 유대리가 더 많은 연차를 받았다. 그리고 아이를 낳으면 국가에서 돈을 받으며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쓸 것이다. 그것뿐인가, 동선이 그간 어쩔 수 없이 지불한 경조사비만 해도 아무리 못해도 두어 달 월급은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동선은 사내 누구로부터도 돈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동선은 부모님이 회사 입사 전에 돌아가셔서 조의금을 받을 수도 없었다.
다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동선은 6시에 퇴근을 하여 동선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드라마를 보며 어제 주문한 사누끼 우동에 따뜻한 정종을 먹을 생각이었다. 오늘은 금요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유대리가 하필 오늘 배가 아프다며 반차를 쓰는 바람에 유대리의 일을 급하게 떠 앉게 된 것이다. 유대리가 마지막 남은 동선의 행복마저 짓밟았다는 생각에 너무나 분했다. 유대리가 배가 아픈 것은 점심때 남들의 두 배로 먹은 탓이 분명했다. 그녀는 입덧도 안 하는지, 회사 급식을 산더미처럼 떠서 돼지같이 우걱우걱 먹었다.
동선은 유대리의 옆자리에 앉았고 그들의 자리는 CCTV의 사각지대였다. 퇴근시간이 지나 사무실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동선은 유대리가 급히 떠나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블루투스 이어폰을 유대리의 책상 위에서 케이스 채 슬쩍 집어 자신의 주머니 안에 넣었다. 유대리가 남편이 생일선물로 사준 것이라며 동선에게 침이 튀게 자랑을 했던 것이 어제였다. 축의금을 낸 자신에게는 신혼여행에 다녀와서 1000원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책갈피를 선물한 그녀였다.
저녁은 꽤 늦어졌지만, 동선의 마음은 평온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 오래되어 낡은 자신의 유선 이어폰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