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아빠와 애정 없는 엄마의 유리감옥을 나온 지수
지난 이야기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14년 만에 나타난 친아빠를 만나 은호는 혼란과 분노에 휩싸이고, 의지하는 형 지수에게 연락한다.
02화 2. 나도 미치겠다고! (brunch.co.kr)
지수는 대학 교라기에는 초라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마땅히 교문 같지 않은 입구 기둥에 검은색 볼드체로 ‘수시 접수’와 빨간 화살표가 적힌 A4용지가 보였다. 지수는 그 방향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하지만 이내 경비원으로 보이는 나이 든 남자가 지수를 저지했다. 고등학교도 아니고, 오토바이가 교내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경비원이 손짓하는 곳에는 오토바이 몇 대가 더 주차되어 있었다. 지수도 그 옆에 주차했다. 주차금지 입간판에는 매직으로 ‘수시접수 기간 내 오토바이 출입 금지’라고 쓰여 있는 종이가 덧붙여져 있었다. 가을인데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헬멧을 벗으니 지수의 까무잡잡하고 매끈한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래도 바람은 계절에 맞게 시원했다. 지수는 공중에 머리를 몇 번 탈탈 털고 땀에 살짝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짧은 앞머리가 이마 위로 올라가니 잘생긴 그의 얼굴이 오롯이 드러났다.
낡은 고등학교를 연상시키는 건물 두어 채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서울 변두리의 2년제 전문대학에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전에 다니던 사립 중학교보다도 못한 것 같아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부유한 생활을 걷어차고 나온 것은 자신이었다. 화살표를 따라가니 곧 접수처가 나왔다.
지수는 한강이 보이는 24층 아파트에 살았다. 지방대지만 교수인 아버지와 아름답고 우아한 어머니, 잘 정돈된 집은 잡지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가정이었다. 지수는 모자란 것 없는 부잣집 외아들이 맞았지만, 지수가 아는 집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고, 그 어떤 것도 자기 뜻대로는 할 수 없는 감옥이었다. 폭력과 가난은 없었지만, 그곳에서는 늘 숨이 막혔다. 그런 그가 집을 나온 것은 고등학교를 오면서부터였다. 지수는 아버지를 속이고 자동차 전문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의 분노와 반대는 폭풍처럼 집안을 흔들었다. 아버지는 이제 막 입학한 지수를 자퇴시키고 유학을 보내려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역시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아버지에게 맞섰다. 결국 집에서 쫓겨났고 경제적인 지원도 끊겼다.
하지만 그는 집을 나올 때 속으로 웃었다. 겉보기에는 지수가 쫓겨난 것 같았지만, 실상은 스스로 나온 것이었다. 쫓겨나고 싶었고 아버지가 완전히 그를 포기하기를 바랐다. 한 번도 자신에게 실제 울타리가 아니었던 부모의 집을 간절히 떠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돈이 대단한 무기인 것처럼 아들을 압박하고 휘두르려 했지만, 지수가 인문계고등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이미 집을 나올 결심은 서 있었다. 어쩌면 집을 나가겠다는 말이 그가 아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손톱만큼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기 뜻을 이루는 사람이었다.
지수는 어릴 때부터 영어유치원에 다녔고 사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연계된 사립 중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과정까지는 그도 아버지의 기대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과고나 영재고를 졸업해서 서울의 유명 대학에 들어가고,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신처럼 지방대 교수가 아닌 서울에서 교수가 되기를 기대했다. 지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마땅한 자식의 책임으로 여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가 끝나면 12시가 넘도록 학원을 전전했고 주말에도 과외와 체험활동을 하느라 게임이나 친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지수는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아버지의 뜻을 거슬렀다. 더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학교는 갔지만 어떤 수업도 듣지 않았고 학원에 끌려가도 이어폰을 끼고 모든 것을 거부했다. 아버지는 더욱 강하게 아들의 목을 조였다. 하지만 지수는 아버지가 쓰레기라고 말하는 아이들과 어울려 지냈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담배를 피웠고 술을 마셨다. 성적은 엉망이었고 매일같이 선생님들이 집으로 연락했다. 그래도 사람은 때리지 않았고 돈을 갈취하진 않았다. 지수는 자신을 완전히 망치지 않는 선에서 아버지의 통제에 반항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아들을 자신의 꼭두각시처럼 원하는 곳에 두고 원하는 행동을 하게 만들려 했다. 그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아들에게는 잔혹하리만큼 냉정했다. 하지만 마지막 티끌 같은 가능성이 날아가 버렸다고 믿은 순간 아버지는 지수를 내쳤다. 그것이 지수의 오랜 계획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아버지는 모든 것이 여전히 자신의 통제 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폭풍이 휘몰아치던 모든 순간 그의 엄마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모른 체했다.
안락한 감옥을 나온 후,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고등학교의 기숙사 생활은 전쟁이었다. 아버지의 돈 없이 생활비를 벌어 쓴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1년 정도는 특별히 일하지 않아도 쓸 수 있을 만큼의 돈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받아온 용돈과 중학교까지 받았던 모든 전자제품과 아버지의 체면과 허세로 쌓아온 옷, 가방, 시계 등을 중고거래 어플을 이용해 내다 팔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동차 전문 고등학교로 온 것은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목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너무 좋았고 고치고 만들고 튜닝하는 것을 배우고 싶었다. 독립도 해야 했고 대학도 가고 싶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해서 동네 자동차 정비소에 들어가거나 배달 알바를 하는 선배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자동차에 대해 더 배울 수 있는 2년제 전문대학을 가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학비를 지원해 줄 리도 없고 먼저 도움을 청하고 싶지도 않았다.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일이 배달이었고, 배달 알바를 하면서 알게 된 형들을 통해 대니 형을 알게 되었다. 대니는 오토바이 매매와 수리를 같이 하는 매장인 디 모토의 사장이었다. 대니는 바이크 동호회에서 불리는 아이디라고 했는데, 본명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지수는 그의 매장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손님을 끌어오는 일, 매매부터 튜닝까지 점점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2학년 여름 방학부터는 학교 기숙사를 나와 형의 가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늦게까지 일했다. 덕분에 대학 등록금을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지수는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빨리 알게 되었다.
지수는 몇만 원씩 하는 접수비가 아까워서 수시 1차 지원은 두 군데만 하기로 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꼭 가고 싶은 대학에만 넣었다. 수시 원서를 접수하고 나니, 이제 고등학교 생활도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학년 때는 수업은 거의 하지 않았고, 대부분 실습이었다. 자신은 이미 성인이라고 생각한 지는 꽤 되었다.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했고,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그런데 법적인 이유로 자신의 삶을 제한당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이제 몇 달이 지나면 드디어 미성년자 딱지를 뗄 수 있다는 것이 지수에게는 링 위에서 싸움을 기다리는 파이터처럼 기다려졌다.
막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려고 할 때 DM이 왔다. 혜림이었다.
“내일 강남 리버사이드 10시”
중학교 때부터 같이 놀던 혜림은 지수에게 돈 많은 고객들을 종종 소개해줬다. 지수가 즐기지 않는 술자리나 클럽, 모텔 같은 곳으로 불려 가야 했지만, 그녀가 소개해주는 호구들은 허세가 심하고 씀씀이가 헤펐다. 다소 위험한 친구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완벽히 안전하면서 돈을 버는 방법이 미성년자인 지수에게는 많지 않았다.
지수는 남은 시간 동안 돈을 벌기 위해 배달 어플을 켰다. 오토바이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배달 알바를 할 수 있었다. 오늘 수시 접수 때문에 가게 일을 하루 쉬기로 했기 때문에 지금부터 대여섯 시간은 충분히 콜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될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자는 생각이 컸고,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버는 데서 오는 당당함이 컸다.
저녁 시간이라 콜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지수는 10시가 넘었는데 저녁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한강 공원 쪽으로 치킨 배달을 가고 있을 때, 콜을 확인하려고 오토바이 거치대에 끼워둔 핸드폰에서 메시지가 왔다.
“형 어디세요?”
은호였다. 선재를 통해서 알게 된 동생인데 방황하는 모습이 남 같지 않아 신경이 쓰이던 녀석이었다. 실제로는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은호가 먼저 연락을 해와 가끔 DM을 보내는 정도였다. 선재는 지수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1학년을 마치지 못하고 자퇴를 했고 학교에 다닐 때도 친한 선후배는 아니었다. 양아치 짓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렸지만, 선재와 그 친구들에게 오토바이 수리나 매매를 알선받는 일들이 왕왕 있어 굳이 나쁜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필 그런 선재랑 같이 다닌다는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지수가 개입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달 중인데. 넌 어디?”
“전에 한번 뵈었던 한강 공원 쪽에 있어요.”
“나 그 근처 막 배달 끝나. 내가 그리로 갈까?.”
“진짜요? 네!”
지수는 치킨을 사서 은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쪽으로 배달을 많이 나갔던 덕에 은호의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은호는 매점 앞 테이블에서 교복을 입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었다. 이 밤에 혼자 한강에 있을 차림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선재와 다른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고 있을 때, 혼자 못 어울리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 야!
지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은호를 보니 이미 술에 취해있었다. 테이블 위에 비어 있는 소주 한 병이 보였다.
- 뭐야 취한 거야?
- 아니요.
지수는 배가 고파서 가져온 치킨 상자를 뜯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술에 취해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훅 밀려왔다. 지수는 서비스로 받은 콜라를 꺼내 꿀꺽꿀꺽 들이켰다.
- 형. 제가요. 오늘 난생처음 친아빠를 만났거든요.
지수는 닭다리를 먹다 말고 은호를 봤다. 은호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독백을 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 그 새끼 만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진짜 완전 개새끼거든요. 이제까지 정말 한 번 본 적도 없었거든요. 저도 아빠 같은 거 필요 없는데.
- 그래, 있어도 별거 없어.
- 근데 그 새끼가 찾아왔어요. 저는 지금 제 인생도 노답인데, 아빠라는 새끼가 자식 골수 빼먹으려고 왔다는 게 정말. 그게 말이 돼요?
- 뭐야 거지야? 너한테 뭘 빼먹어?
- 몰라요. 갑자기 찾아와서는 제가 동생이 있는데 아프다고 뭘 이식해 주라는데. 정말 개새끼 아니에요?
- 이제까지 생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너한테 장기를 이식해 달라고 했다는 거야?
- 개새끼. 씨발. 죽빵을 날리고 왔어야 했는데.
지수는 이제까지 자신의 부모님이 제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은호의 얘기를 들으니 그들은 그냥 평범하게 나쁜 부모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까지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중딩이에게 짜증이 났었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왜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어 있는지 조금은 이해됐다. 지수도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사람에게 버림받는 기분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상처가 있어 더 마음이 갔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진짜 개새끼구나.
- 전 이제 어떡해요?
은호가 갑자기 훌쩍거렸다.
- 엄마한테 얘기해야 하는데. 뭐라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혼자 아빠 만났다고 어떻게 말해요.
- 그냥 하면 되잖아.
- 엄마도 존나 불쌍한데 짜증 나고. 씨발. 다 병신 같아요.
지수는 멋있게 말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도 얘는 자신과 다르게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처럼 완전히 집을 떠날 아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 그냥 빨리 집에 들어가. 데려다줘?
- 아니에요. 너무 죄송한데. 형. 너무 감사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은호가 지수를 향해 허리가 접히도록 인사를 했다. 이미 2시가 넘었다. 지수가 다 먹지 못한 치킨을 정리해 치우고 오토바이에서 비상시 쓰려고 추가로 가지고 있던 헬멧을 꺼내 은호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지수는 은호를 오토바이 뒷좌석에 태우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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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리버사이드 10시
아들, 은호에게 친부가 찾아갔다는 사실을 모른 채 새벽에 들어온 아들과 난투를 벌인 윤영은 홧김에 클럽에 간다.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을 남자를 만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