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치며 버티던 일상에서 침몰하는 윤영
지난 이야기
윤영과의 첫섹스 이후, 지수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한 발 벗어난다. 하지만 온종일 그녀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윤영이 다시 상담실을 찾았다. 한 주가 1년처럼 느껴졌다.
- 한 주간은 어떠셨어요?
- 완전히 꼬여버렸어요.
- 인생의 어떤 부분들이 정확히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요?
- 아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막가는 느낌이에요.
-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줄래요?
- 선생님이 정말 원하는 변화가 뭐냐고 그랬죠? 원하는 대로 살면 인생이 지금 보다 나을까요?
- 어려운 문제네요.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원하는 것을 알아야 적어도 그것을 선택할지 말지 스스로 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 풋.
상담사가 원하는 것을 생각해보란 질문에 자신이 이미 생각을 넘어 실천하고 온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했다. 지수와 만난 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충동과 욕망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도 혼란스러웠다.
- 원하는 대로 해도 인생이 잘 풀릴 거라 생각되지 않나 보네요.
- 네. 벌써 잘못된 것 같아요.
- 궁금하네요. 윤영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윤영은 미친 척 얘기했다. 자신이 원나잇스탠드를 했으며 자신보다 연하라고 했다. 자꾸 연락이 오는데 만나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 내가 원하는 것은 뭔가요?
- 모르겠어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만날 것 같아요. 왠지 그럴 것 같아요.
- 그 남자를 만나는데 걱정되는 것들은 어떤 것들이죠?
- 너무 어리고, 철도 없고, 직업도 없고, 엮이면 골치 아파질 것 같아요.
- 그런데도 좋은가 보군요?
- 그런 걸까요? 모르겠어요. 아무 생각이 안나요. 걔만 보여요. 은호 생각도 안나고요. 엄마가 아니라 그냥 김윤영이 된 기분이에요.
- 오롯이 자신일 수 있다는 얘기네요.
- 네.
- 낯선 느낌이겠어요.
- 네. 사실 그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십 년 넘게 엄마로만 살았던 것 같아요. 너무 버거웠어요. 아들한테 엄마면서 아빠도 되어야 했잖아요. 정말.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윤영은 왈칵 터지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상담사가 가만히 티슈 통을 윤영 손 앞으로 당겨 놓아주었다. 윤영은 은호를 키우면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시설에 맡겼고, 아빠 없는 아이라고 손가락질받게 될 것이 두려워 무서운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윤영은 낮이고 밤이고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실제 삶 속에서는 아빠의 부재보다 빈곤이 더 두려웠다.
- 그래도 좋았어요. 은호가 초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어요. 진짜로요. 은호는 내성적이고 섬세한 아이였어요. 사람들이 다 부러워했어요. 잘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을 땐, 제가 뭐라도 된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중학교에 가면서 모든 것이 조금씩 산산히 부숴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걔가 절 발로 짓밟는데 지금까지의 인생이 모두 짓밟혀 버리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문득, 이제 얘한테 벗어날 수 있겠구나 싶은 거예요. 이제 얘만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 얘는 이제 내가 보호해 줘야 할 아기가 아니구나…….
- 좋은 계기는 아니었지만, 아들로부터 윤영씨 인생이 분리되는 것 같았나 봐요.
- 모르겠어요. 여전히 얘가 신경 쓰이고 제 책임이란 건 변함없어요. 그런데 고장 난 시계처럼 잘 가다 한 번씩 타타타탁 하고 헛도는 기분이에요.
- 엄마로서의 윤영 씨 가요? 아님. 여자로서 윤영 씨 가요?
- 둘 다죠…….
- 좀 더 얘기해줄 수 있어요? 이제 얘만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나서 어땠나요?
- 이제 내 인생을 살아야지 생각했는데……. 그게 뭔지……. 내가 누군지 뭘 원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걸 모르면 안 되는 거잖아요.
- 혼란스러웠겠네요. 이제 내 인생을 살아보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 네. 억울했어요. 너무 화가 났어요. 아니 너무 바보 같잖아요.
-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 미용실을 그만뒀어요. 남자도 만나고.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맨홀에 빠지는 것 같아요. 그냥 뚝 떨어져요. 잠만 자고.
- 이제 어떻게 하고 싶나요. 자신에게 그리고 아들에게요.
- 모르겠어요.
- 하지만 명확한 것은, 윤영 씨는 이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은 것 같아요. ‘엄마로 사는 삶’만이 아니라요. 그럼 다음 주에 만나서 그 얘길 더 해볼까요? 김윤영 자신과 엄마로서 김윤영이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요.
- 네.
상담실 문을 나서며 윤영은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곱씹어 보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시는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은호는 그 일이 있고 아주 늦게 귀가하는 것은 피하는 눈치였다. 윤영이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날, 집에 들어오지 못한 은호가 어디에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윤영은 아들과 얘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은호가 어떻게 엄마인 자신을 때릴 수 있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여러 질문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은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흥분해서 은호에게 달려들었다는 사실은 지금 윤영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윤영의 마음속에는 자신과 은호의 행동에 대해 옳게 이해하기 위해 애쓸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은 아들에게 불쑥불쑥 치미는 분노와 삶에 대한 좌절감이 윤영을 압도하고 있었다.
윤영이 집에 도착했을 때 은호가 집에 있었다.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은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윤영이 큰맘 먹고 장만한 리클라이너 소파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윤영은 자신을 알은 채도 하지 않고 핸드폰만 쳐다보는 은호를 보자 미칠 것처럼 화가 났다. 은호의 키가 엄마인 윤영보다 커지고 힘도 세졌다는 것은 대견함보다 두려움이었다. 윤영의 눈에 은호는 자못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 너 왜 집에 있어?
- 시험 기간이잖아!
- 근데 핸드폰만 보고 있니?
- 아이씨.
- 뭐라구? 너 또 뭐라 그랬어!
윤영이 은호 앞으로 다가가 핸드폰을 낚아챘다.
- 아. 씨발. 줘.
- 뭐라고?
- 내놓으라고 좀!
은호가 윤영의 손에 들린 자신의 핸드폰을 다시 낚아채려 하고 윤영은 뺏기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름이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윤영이 통화버튼을 누르자 낯선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은호가 재빨리 윤영의 손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빼앗아 밖으로 나갔다. 윤영은 순간 멍해져 은호가 가버린 현관문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지만 번뜩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둘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삽식간에 윤영을 삼켰다.
윤영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수면제를 삼키고 침대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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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벽, 지수의 방
자신을 걱정해주는 따뜻한 마음에 지수의 방으로 성큼 들어간 윤영은 지수에게 점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