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산같이 빌려온 책들이 침대 옆 서랍장 위에 잘못 쌓인 돌탑처럼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 어제 종일 책을 읽다 자다 또 일어나 읽었다.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렇게 좋다. 책 가장 위에 안경이 놓여있다. 분명 깼지만 한동안 침대에서 사라져 가는 꿈들을 보내고 있다. 남편의 손과 발이 내 몸에 닿아있다. 나의 베개처럼 이불처럼 그가 옆에 있다. 조용히 손으로 더듬어 안경을 집어 끼고 핸드폰을 연다. 미국 대선 이랬는데, 결정이 되었나? 지난주에 미국 ETF를 샀는데 올랐나 내렸나 궁금하지만 뉴스는 잠깐 보고 연예뉴스를 클릭했다. 볼 게 없다. 몇 가지를 클릭하다 날씨를 보고 전날 찍었던 사진 몇 장을 보고 핸드폰을 덮었다. 눈이 뻑뻑하다. 분명 상쾌한 가을 아침이었다.
7시 30분 알람을 그냥 보내고 8시 알람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나온 수면바지가 이불속에서 따뜻하게 데워져 있다. 어젯밤에 김치찌개를 끓이다가 옷에 김치국물이 튀었다. 손톱으로 고춧가루만 긁어 떼어냈다.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이불에 안 붙었나 보군. 다행!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샤워실에 들어가 머리를 빗는다. 이놈의 머리카락은 결국은 다 빠지려는 것일까? 까맣고 구불구불한 긴 머리카락들이 우수수 뽑혀 떨어진다. 흰머리카락이나 뽑히지 꼭 소중한 검은 머리카락만 속절없이 뽑힌다. 아무 엣지도 없는 집게핀과 똑딱 핀으로 앞머리를 고정하고 고무줄로 뒷머리를 묶는다. 세수도 안 하고 손만 씻는다. 에잇. 못생겼다. 어쩔.
아침부터 아들과 싸웠다. 그와 싸우는 시간은 8시 35분에서 40분. 세상에서 제일 긴 5분이다. 8시 40분에 학교에 가지 않으면 벌금 3,000원을 부과한 지 1년이 넘었는데 분기별로 한 번씩 왜 벌금을 내야 하냐며 화를 낸다. 4/4분기 분노 타임이다. 오늘은 좀 그냥 지나가자. 제발 그냥 학교 좀 가면 안 되겠니? '저 쌍놈의 새끼는 왜 매일 저 지랄이야! 야 미친 새끼야 그냥 좀 가라고. 제발!'이라는 욕을 다만 속으로 무한 반복한다. 바로 직전에 삶은 계란과 식빵을 먹으며 나는 이제부터 욕을 안 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분명 아침에 일어나서 좋은 엄마는 때려치우고 나쁜 엄마가 되지 않으려고 올해의 목표를 찍어 놓은 사진을 보지 않았던가! 칭찬을 많이 하자였던가? 그런데 너 왜 8시 39분인데 화만 내고 있니? 그냥 가면 벌금 안 내잖아? 현관문 앞 선반에 알람시계를 켜 놓았다. 아들만 생각하면 미간이 찌푸려지는데 정상인가 모르겠다.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데 엄마가 보고 왜 그렇게 애에게 악을 쓰냐고 화를 냈었다. 나도 모르겠다. 가끔 악을 쓰다가 이가 갈리곤 하는데, 성난 복어처럼 으득으득 소리가 난다. "40분 알람 울리면 3000원 벌금이야!" 그가 안 보이는 사각지대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들이 바로 왜 벌금을 내야 하냐며 소리를 지른다. '야 이 미친놈아 너희 선생님이 50분까지 교실에 오라고 했고 엘리베이터가 늦게 오거나 신호등에 걸리면 7분은 걸리니까 40분에 나가라는 거다. 작년부터 너 지각했다고 담임선생님이 하이톡으로 수차례 연락을 주어 내가 너에게 수백 번 주의를 줬지만, 네가 씹고 느지렁 거려서 벌금이 생겼다!'라고 수백 번 얘기한 그 이유를 나는 더 말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저 제발 그가 학교에 가길 바랄 뿐이다. 나는 안방에 들어와서도 밖의 동태를 살핀다. "오빠! 갔어?" 중간중간 남편에게 확인하며 언제 거실에 나가도 되나 벼른다.
어 갔어.
남편이 말하는데 그의 웃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다. 드디어 조용한 아침이다. 아침부터 이어지는 고성에 누렁이 짜구가 안방 캔넬 안에 짜부라져 있다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마루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이렇게 이쁘다고? 나는 세상 소녀 같은 얼굴로 거실에 나온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된다고? 진짜?
세상이 다 아름답다. 이미 소파에 누워있는 남편 위로 굳이 비집고 들어가 눕는다. 남편이 괴로운 듯 얼굴을 조금 찡그린다.
- 야 바보 된다고.
남편이 보고 있는 핸드폰을 뺏으며 장난을 건다. 그는 아주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지만 익숙한 듯 포기한다. 경직되었던 얼굴 근육이 풀어지고 그저 웃음이 난다. 남편의 핸드폰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핸드폰을 발로 밀어 버리고 남편에게 뽀뽀한다.
- 너무 신나지 않냐? 오늘 뭐 하지?
- 하긴 뭘 해. 일하러 가지.
짜구가 카펫에 앉아 우리를 바라본다. 질투다. 조금 있으면 비좁은 소파 위 우리 둘 사이로 뛰어오를 것이다. 괜찮다. 녀석은 화를 안 내니까.
너 미친 거 같아? 그렇게 좋아?
응.
아들이 학교만 가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신이 난다. 심지어 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이 안 난다. 중년의 내 입에서 나오는 혀 짧은 발음이 남편은 낯설지 않다. 기분이 좋으면 목소리 톤이 라쯤으로 올라간다. 산책을 가고 싶은 짜구가 간절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털이 보숭보숭한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붕붕 돌린다. 인간들아 엉덩이를 들고일어나란 말이다. 그래그래. 우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짜구의 꼬리가 더 빨리 돌아간다. 안달 났군.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한다. 광대뼈 쪽에 있던 주근깨가 기미가 되고 있기 때문에 꼭 선크림을 발라주어야 한다. 미지근한 물에 대충 비누로 세수를 했는데도 얼굴이 뽀얗다.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