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다리 끝 옥상에서

이 여자의 생존법 - 미경

by Lali Whale

- 뭐야. 저분은 술도 안 마실 거면서 와인 모임에는 왜 온 거임?

- 약드신다잖아요.

- 여기 약 한두 가지 안 먹는 사람 있나? 큭큭

- 설마 회비 안 내려고 하는 건 아니겠죠?

- 안주는 먹던데 왜요.

- 다음에 또 오는 건 아니겠죠?

- 야. 이제 우리 모임 비공개로 전환하자고 해. 그래도 되잖아.


화장실에서 손을 탈탈 털며 나오던 미경은 옥상으로 가는 계단 끝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2층 짜리 낮은 건물의 와인바 옥상에는 물방울 같은 조명과 함께 야외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었고, 동호회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미경은 핸드폰 친목모임 어플에 가입한 후 한동안 눈팅만 하다 오늘 처음으로 오프라인 모임에 나왔다. 근처 마트에 갈 때를 제외하고 집 밖으로 나온 지가 반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웹디자인을 하는 미경은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하는 편이었지만, 작년부터는 한 달에 한두 번 있는 회의도 온라인 화상어플로 만나면서 정말이지 집에만 틀어박혀있었다. 원래도 사람들과 있으면 편하지 않던 차에, 재택으로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 전에 10년을 넘게 키우던 고양이 고미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후부터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못 견디게 외롭고 두려웠다. 일을 할 때면 자신의 무릎 위로 번쩍 뛰어 올라와 그르렁 거리던 녀석의 골골송을 들을 수 없게 되면서 일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면 새초롬하게 쳐다보며 살포시 내려와 식탁에 앉는 고미가 자꾸 눈에 어른거려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직 철거하지 않은 캣타워와 화장실, 고미의 장난감과 박스들 안에서 언제라도 고미가 슬며시 고개를 들 것 같았다. 무엇보다 고미가 없는 침대에 누워있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못 자는 시간이 길어지자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일을 하면서 좀처럼 없던 실수가 늘었고, 마감을 못 맞추기까지 하며 불안과 자괴감이 엄습했다.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미경은 병원에 가서 수면보조제를 받아왔다. 핸드폰에 소셜어플을 깔고, 이제는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큰맘 먹고 나온 자리였다. 혼자 일이 끝나면 와인 한잔을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기에 와인에 대해서는 꽤 잘 알았고 그런 공통점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조금은 쉽게 친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면제를 먹으면서 와인을 먹을 수는 없었기에 오늘은 얼굴만 익히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약을 먹는다고 양해를 구하기까지 했는데 사람들의 무례한 얘기에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시시덕거리는 저들의 낯짝에 와인을 샴페인처럼 뿌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미경이 이런 뒷얘기를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도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관계가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경은 자신이 정말 그들 속에 속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만 무리에서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 많았고,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미경은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아이들을 마주했고, 돌아서서 묵인했다. 미경 역시 그런 아이들과 굳이 싸우고 애써 오해를 푸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입을 닫았고 마음을 닫았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취기가 오른 사람들 앞으로 미경은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의자에 걸어 두고 온 핸드백만 아니었으면 그대로 건물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래도 살겠다고 나온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한심하게 느껴져 눈물이 삐죽 나올 것 같았다.


- 니야옹~ 니야옹~


미경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미경의 다리로 와서 등을 비비며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꼬리를 치켜들며 애교를 부렸다. 동네에 있던 길고양이 같았다. 양쪽 귀가 모두 온전한 것을 보니 아직 중성화가 되지 않은 어린 고양이였다. 세 가지 색이 얼룩덜룩 섞여 있는 것을 보니 암컷이 분명했다. 미경이 쪼그리고 앉아 고양이의 등 끝쪽을 톡톡 쳐주었다. 고미도 좋아하던 궁디팡팡이었다. 고양이는 처음 본 미경의 품 속으로 쏙 들어왔다.


- 어! 간택되신 것 같은데요.


미경과는 다른 테이블에 있던 회원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이 와도 고양이는 미경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 그러게요. 얘가 안 가네요.

- 너무 귀여운데요. 으... 사진 찍어도 돼요? 우리 집 냥이님만 아니면 제가 모셔가고 싶지만. 안 되겠죠?

- 고양이 기르시나 봐요.

- 네. 냥집사예요. 이쪽에 와서 같이 앉으시겠어요? 흉보는 건데, 저쪽 테이블 사람들 밥맛이거든요.

- 아, 네.


미경은 핸드백을 챙겨 옆 테이블로 이동했다. 고양이는 어느새 미경의 어깨 위로 성큼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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