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와서 생소했던 것은 대자보 문화였다. 아니 21세기, 4차산업혁명시대에 아직도 손으로 쓰거나 타자를 쳐서 붙이는 벽보가 있다니. 온라인으로 소통하면 될 것을 왜 젊은 청춘들은 저렇게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의견을 나눌까.
대학가 대자보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동아리나 스터디 모집글 뿐 아니라 심각한 대자보도 있었다. 선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성 대자보와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 학교의 운영을 지적하는 것들도 있었다. 오며가며 사람들은 대자보를 읽었다. 대자보 훼손 사건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젊고 창창한 학생들이 옛날 방식으로 이런저런 이슈를 공유하는 모습은 퍽 흥미로웠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해도 손으로 직접 쓰거나 타자를 쳐서 종이에 담은 진심과 그에 대한 관심은 변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2013년 '안녕들하십니까’ 사건은 이런 대자보의 힘을 여과없이 보여줬다. 시작은 철도노조 파업, 밀양 송전탑 충돌 등 사회 이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평범한 대자보였다. 그러나 이 취지에 동감하는 대자보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고 같은 제목의 페이스북 페이지는 10만명 이상이 찾아와 ‘좋아요’를 눌렀다. 글의 취지를 반박하는 대자보도 대학 캠퍼스에 잇따라 올라왔다.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 처음 대자보가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풍경이었다. 당시 대학가는 앞선 대선에서 극심한 보·혁 갈등을 겪은 뒤 대부분의 사회 이슈에 냉소와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그런데도 예사로운 ‘안부’를 묻는 이 대자보에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다.
기자 초년병이던 나는 당시 대자보 열풍을 분석한 기사를 썼다. 대학생들이 직면한 불투명한 미래와 무한 경쟁의 피로 때문이라고 적었다. 취업난과 과도한 경쟁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서로 안부를 묻는 형태로 문제의식을 표출했다고 분석했다. 과거 대자보는 학생회 등이 조직적으로 게시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는 ‘경영 08 현우’라는 개인이 나섰다는 점도 주목을 받았다.
기사를 쓰며 문의했던 전문가들은 언론이 공론의 장 기능을 다하지 못한 데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신뢰도가 낮아지면서 대학생들이 전통적인 공론의 장으로서 대자보를 선택했다고 했다. 대자보 앞에서 옆 사람과 바로 토론을 벌이는 등 오프라인 미디어가 가진 장점도 있었다. 아무튼 그 기사 이후로 대자보 열풍은 수그러들었고 곧 기억에서 잊혀졌다.
시간이 흘렀다. 4년 전 가을, 많은 동료 선배 후배들이 회사를 떠나갔다. MBC나 조선일보 등 다른 언론사로 이직하거나 아예 직업을 바꿨다. 좋은 이들이었다. 너무 안타까웠다. 회사에 더 나은 복지 혹은 기자들이 떠나지 않도록 비전을 심어달라고 물밑에서 수차례 제시했지만 바뀌는 게 없었다. 그래서 공채 우리 기수 포함 밑의 후배들과 의기투합해 회사에 대자보를 쓰기로 했다. 언론사 기자들은 아직도 종종 회사에 대자보를 붙인다. 다만 최근에는 공중파, 일간지, 통신 등을 합쳐 거의 우리회사 기자들만 대자보를 쓰는 듯 하다.
대자보는 '국민일보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로 시작했다. 막내급 기자들이 퇴근하고 몇주간을 모여서 문구를 구상했다. 회사에 항의하되 애사심을 보여주자고 했다. 일부 꼰대님들께서 "니네는 뭘 안다고 설치느냐. 일은 제대로 하고 항의하느냐"고 할까봐 여러 문구를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지만 우리도 기자고 회사가 좋은 방향으로 움직였으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언론으로 기능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자고 뜻을 모았다. 우리 회사 대자보는 딱 입구에 붙는다. 모든 이가 왔다갔다 하면서 볼 수밖에 없다. 많이 걱정했고 일부는 일이 잘못될 경우 퇴사할 각오까지 했다. 덜덜 떨면서 대자보를 게시했는데 오히려 반응이 의외였다. "잘봤다" "후배들이 이런 고민이 있었구나" "글 잘 썼더라" 하는 의견이 다수였다. 물론 지금도 크게 회사가 달라지진 않았다만, 그래도 이 조직이 그나마 살아 돌아가고 후배들을 존중하는 곳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제 회사에 또 하나의 대자보를 붙였다. 본보는 정부가 발표하기 전에 이태원 클럽이 게이클럽이라고 가장 먼저 '단독'을 달고 보도했다. 강남구청이 확진자 동선을 공개했는데 '블랙수면방'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이 동성애자가 많이 찾는 찜방이며, 무분별한 성관계가 이뤄진다는 보도도 했다. 성행위 등을 매우 자극적으로 썼다. 더럽다 더러워, 게이들 다 죽여버려야 한다는 댓글이 무수하게 달렸다.
얼마 전 토요당직이라 회사로 나갔는데 전화가 폭주했다. 거의 5분에 한번 꼴로 울렸다. 두 가지 주제로 나뉘는데 "왜 정부가 밝히지도 않았는데 이태원 클럽을 게이클럽이라고 명시해서 인권을 침해하느냐"는 것. 또 하나는 "코로나를 잡으려면 이태원 클럽 갔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검사를 받게 해야 하는데 이런식으로 기사가 나가면 다들 아우팅이 겁나서 쉬쉬하고 사태가 더 커진다"는 거였다. 자신을 커밍아웃한 게이라고 소개한 이도 있었고 지인이 게이라는 여성분도 있었다. 정말 100통이 넘는 전화가 쏟아졌다.
그들의 말은 하나같이 맞았다. 사랑의 하나님이 가르치신 건 보듬고 포용하는 것이지 배척하고 망신주고 너는 사회악이라고, 우리와 다르다고 선 긋는게 아니었을 거다. 그들이 욕을 먹더라도 성적 취향이 아니고, 이 시국에 클럽 간걸로 먹어야 한다. 뭔가 미안하고 죄스러워 오는 전화를 다 받았더니 멘탈이 나갈 것 같았다.
그 기사가 나간 이후 회사 내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어제 붙인 대자보는 10년차 미만 젊은 기자들이 고민한 결과다(사실 선배들이 쓰긴 했지만..). 기독교 가치를 지키되 좀 품격을 지키고, 회사 내부에서도 객관적인 보도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회사가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자정 작용을 통해 혐오 언론사, 소수자를 차별하고 협박하는 언론사라는 오명은 좀 벗어야 하지 않을까. 종이에 한자한자 박혀내려간 후배들의 진심을 선배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