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4도씨

12월의 첫날은 꽤나 매섭군

by 작가 전우형

2020년의 마지막 달의 첫 태양이 밝았다. 캄캄한 어둠에 질식해있던 하늘의 노랗게 뜬 얼굴에, 가장자리부터 파르스름한 여명이 돋아난다. 싯푸른 하늘은 손이 닿으면 하얗게 얼어버릴 듯 차가워 보인다. 완연한 겨울 하늘이다. 입김이 솔솔 불어 나오는 것을 가만히 쳐다본다. 차분한 호흡에 맞춰 오르내리는 하얀 덩어리들은 잠시 제멋대로 춤을 추다가 어디론가 사라진다. 잠이 덜 깬 표정을 한 햇살이 눈도 비비지 못한 채 그림자에 둘러싸여 있던 대지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한다. 따뜻한 손을 비비며 밤새 얼어붙은 땅의 얼굴을 매만지지만 오랜 시간 굳어있던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정말 추운 계절의 한가운데에 선 탓일까?


오랜 시간 아이들의 장난감 책상 노릇에 만족해왔던 고타츠가 드디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장난감 방 한구석에서 산처럼 쌓인 자석 블록, 카드, 변신로봇, 팽이, 레고 따위에 짓눌려있던 그 녀석이 거실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는 온기를 뿜어낸다. 춥다고 재잘대면서도 얇은 가을 내복에 여름 반팔, 반바지를 입고 설쳐대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고타츠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타다닥 거리며 발톱 부딪히는 소리로 뛰어다니던 강아지 녀석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어디로 기어들어갔을지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고타츠 펼친 우리집.jpg




12월의 첫날, 이곳 평택의 아침 기온은 영하 4도씨였다. 카페로 출근하기 위해 운전석에 앉았을 때, 더 이상 식을 수 없을 정도로 식어버린 시트의 냉기가 얇은 옷가지를 뚫고 고스란히 허벅지와 둔부로 전해져 왔다. 형언하기 어려운 냉기에 온몸에 한차례 진동이 오갔다. 시동을 걸자 얼어붙어 있던 엔진에 잠시 부하가 차는 듯 요란하고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 퇴근할 때 켜 둔 히터 3단의 바람이 얼굴로 확 몰아치며 순간적인 냉기를 더했다. 아직 전혀 데워지지 않은 엔진의 열기로는 제정신이 아닌 채 최고 효율의 에어컨 바람을 뿜어내는 히터를 말릴 재간이 없었다. 바람 세기를 '0'으로 돌리고 나서 운전석 시트 열선을 켰지만 온기가 퍼질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출발해서 엔진을 덮이는 수밖에.' 충분히 준비될 시점을 기다릴 시간은 언제나 부족한 법이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난 후, 브레이크 페달 위에 올려져 있던 있던 발을 엑셀레이터 페달 위로 옮겨 가볍게 힘을 주었다. 약간의 둔탁한 엔진음이 더해지며 미끄러지듯 차가 앞으로 나갔다. 시리도록 차가운 스티어링 휠을 좌우로 몇 차례 돌리며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차 내부에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훈기를 만끽하기도 전에 어느덧 저 앞으로 카페 간판이 보였다. '행복한 카페'. 겨우 따뜻하게 데워진 차에서 내려야만 하다니. 상실감이 더해진 한기는 또 한차례 온몸에 훑고 지나가며 참을 수 없는 미세진동을 일으켰다. 이제 나는 다시 밤새 차갑게 식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한차례 침을 꿀꺽 삼키고 카페 시건장치를 풀었다.



의외였다. 카페 안은 비정상적으로 따뜻했다. 설마 누가 왔던 걸까? 순간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둘러보고 말 것도 없었다. 가로 5m, 세로 10m도 채 되지 않는 카페 안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파악하는 데는 숨 몇 번 내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데...? 아차!' 이 익숙한 온기. 히터가 밤새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퇴근할 때 히터 전원을 내리는 걸 깜빡했었구나!' 불이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건너편 소방서에 걸린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자나 깨나 불조심. 당신의 삶도 재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커피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립용 원두가 뭐가 있더라... 콜롬비아, 몬순, 예가체프, 만델링...'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은 역시 바디감이 그윽한 만델링이지.'


작은 용기를 저울 위에 올리고 0점을 세팅한 뒤 원두를 부으며 올라가는 숫자를 확인한다. '14, 17, 18, 19, 20! 됐어.' 하는 순간 21로 바뀐 숫자를 지그시 노려본다. 'Calm down, Calm down...' 핸드드립 사이즈에 맞게 세팅된 페이마 그라인더에 만델링 20g을 붓고는 버튼을 눌렀다. '위잉'하는 소리와 함께 원두의 형체가 조금씩 사라짐과 동시에 진한 고동색과 갈색빛이 도는, 입자가 다소 굵어 둔탁한 느낌을 주는 가루들이 용기에 소복이 담아져 있다. 뭔가가 갈리는 듯한 음색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터음만 들리는 것을 확인하면 그라인딩이 완료된 것이다. 과부하가 걸리지 않도록 얼른 off 버튼을 눌러주어야 한다.


여과지를 펼쳐 원두가루를 균일하게 채워 담는다. 진한 맛을 더욱 살리기 위한 칼리타 드리퍼에 원두가루가 담긴 여과지가 잘 안착되었다면 이제는 온수를 담을 차례다. 커피머신에서 온수 버튼을 누르자 '취익'하는 파열음을 내며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온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끝에서 3cm까지 온수를 채운 후 온도를 확인해본다. '91도' 적당한 수치다. 스팀을 이용해 온도를 올릴 수도 있지만 오늘은 이대로 내려보기로 한다. 드립포트에 옮겨 담는 과정에서 온도는 3도에서 4도 정도 떨어진다. 찰랑거리는 드립포트를 손에 든 채로 스톱워치를 확인한다. '3분 30초'. 가운데부터 가볍게 물줄기를 돌려나가며 원두가루를 촉촉이 적신 후 'start'버튼을 누른다.


뜸 들이기 시간이 초단위로 줄어드는 것을 보며, 원두에 포함되어 있던 가스 성분이 조금씩 빠져나오는 장면을 바라본다. 마치 갯벌에서 조개의 숨구멍이 볼록거리듯 재미난 광경이다. 어느새 30초의 시간이 흐르고 드립포트를 살며시 기울여 곧고 얇은 물줄기를 흘려보낸다. 머핀 모양으로 부풀어 오르며 가운데가 분화구 모양으로 서서히 파여간다. 가장자리까지 촉촉함을 넘어설 정도로 물이 차오르면 잠시 드립포트를 내려놓고 다시 물을 채우며 기다린다. 칼리타 드리퍼 아래쪽에 뚫린 3개의 추출구로 투명한 검붉은 빛을 띠는 드립 커피 원액이 졸졸졸 흘러나오는 것을 지켜보다 약해질 때쯤 다시 드립포트로 물줄기를 흘려보낸다.


이번에는 가운데에서 시작해 나선형으로 서서히 돌려나가며 바깥쪽을 충분히 적셔준다. 30초 정도의 시간이 남으면 드립포트를 거두고 알람을 기다린다. "띠띠띠, 띠띠띠..." 시간이 다 되었다. 더 시끄럽지 않도록 확인 버튼을 눌러준다. 대략 350ml 정도의 만델링 커피가 내려졌다. 일단 희석하지 않고 하얀색 에스프레소 잔에 2/3 정도를 채운 후 향을 음미했다. 그윽하면서도 진한 향이 느껴졌다. 한 모금 들이켜 혀 아래쪽으로 모아 본다. 입속 가득히 묵직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역시 만델링은 이맛이지'. 온수를 200ml 정도 부어 희석한 후 찻잔에 따라 언제나 앉아 글을 쓰며 카페를 보는 테이블로 향했다.


핸드드립은 아침을 여는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감각의 밀도가 초단위로 세분화되는 것을 느끼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마시면 모든 뇌세포가 한순간에 일어나 합창을 하는 판타지에 빠진다. 글쓰기 전쟁에 참여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어느 정도는 커피 중독이겠지.' 이제 또다시 하얀 바탕에 깜빡이는 프롬프트와 눈싸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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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이면 언제나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연한 회색 문구. 그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촉감을 느끼며 하얗기만 하던 세상에 나만의 무언가를 채워나간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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