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은 나를 아껴주셨다. 내게는 형제가 많았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따사로운 햇빛 아래 무럭무럭 자라났다. 세월이 흐르며 부모님도 힘에 부치셨는지 허리가 구부정해지셨다. 나와 형제들은 이제 독립할 시기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려 할 때였다. 갑작스럽게 사방이 흔들리고 우리가 살던 동네로 무언가 거대하고 육중한 것이 들이닥쳤다. 그것은 눈앞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먹어치우는 블랙홀 같았다. 그토록 강해 보였던 부모님도 자비 없는 괴생물체 앞에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렇게 부모님과 이별했다.
보호해줄 이가 사라진 나는 모진 시련을 당해야만 했다. 한동안 움직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열렸고 새로운 곳으로 옮겨졌다. 거하는 곳이 바뀌었지만 시련은 그대로였다. 새 거처는 빛도 들지 않는 어둡고 습하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멀리 약간의 빛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늘이 나의 안간힘을 알아봐 준 걸까. 드디어 자그마한 틈을 비집고 머리를 내미는 데 성공했다.
해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역시 이제 막 어둠 속을 헤쳐 나온 모양새였다. 탄광의 광부처럼 거뭇거뭇한 얼굴을 바라보며 서로 웃었다. 처지야 어떻든 일단 혼자가 아니어서 안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차분히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볼 작은 여유조차 없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세상을 들어 올렸다. 지평선이 상하좌우로 흔들리고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태양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곤두박질쳤다. 독방 같은 공간에서 강제 퇴거당한 우리는 좁은 공간에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붙어 있어야만 했다. 발가벗겨진 기분이었지만 그런 것들을 재고 따지기에는 코뿔소처럼 제멋대로 몰아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더 컸다. 웅성거림이 좁은 공간을 가득 매웠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의 처지가 이랬을까?" 의아함이 메아리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멀리서부터 그동안의 웅성임과는 다른 높고 뾰족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명 비명소리였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았지만 서로의 어깨가 시야를 가릴만치 빼곡히 붙어있던 터라 상황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 공포는 스멀스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야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땅바닥이 쩍 하고 벌어지며 사람들이 상어의 아가리 같은 거대한 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피해보려 아우성쳤지만 그 짧은 비명소리만큼이나 저항은 무력하고 보잘것없었다. 눈앞의 사람과 나는 공포에 물든 눈동자로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우리는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타의로 중력가속도를 체감하던 나는 역설적으로 평온함에 빠져들어갔다. 주마등이란 단어가 이런 느낌일까? 시간이 느려지며 가시밭길 같던 지난날의 사소한 장면들이 차창 밖 풍경처럼 스쳐갔다. 찰나가 영원처럼 늘어지던 그때, 무언가 나를 허공에서 잡아챘다. 소용돌이로 뒤섞인 세상이 방향감각을 잃고 곤두박질치더니 땅과 하늘이 뒤 바뀌었고 무언가가 정수리를 후려치는 느낌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곳이 물 속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몸의 절반 이상이 흙속에 처박혀 있어 떠내려가지 않은 채 용케 그곳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 무슨 인연인지 옆에는 아까 먼저 떨어져 내린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안간힘을 쓰는 사이 그가 눈을 떴다. 다행히 숨은 붙어있었던 모양이다.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우리는 그곳에 적응해야만 했다. 살아남으려면 우선 기반을 다져야 했다. 터전을 넓혀가며 살 길을 마련해나갔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는 다시 해님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사뭇 자태가 늠름하고 파릇파릇하고 꼿꼿했다. 이제 예전의 꼬질꼬질함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조용하고 아늑한 나날이 이어졌다. 초여름의 햇빛은 그간의 고단함을 사르르 녹여줄 만큼 달콤하고 따스했다. 이따금씩 커다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길고 짧은 부리를 휘두르는 것들이 주위 사람들을 물어가기도 했으나 그보다 덩치도 크고 노란 챙 달린 모자를 쓴 사람이 우리를 지켜주자 사나운 약탈꾼들은 이전처럼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 모습이 퍽 통쾌했다. 식수는 충분히 마시고도 남을 만큼 충분했고, 신비롭게도 그 물은 써도 써도 샘솟는 마법의 샘물 같았다.
이제 충분히 자란 나는 예전의 내 부모처럼 아이를 키워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빛과 때때로 몰아치는 비바람으로부터 새끼들을 지켜내며 버티다 보니 어느덧 높고 푸른 하늘과 눈부시고 따가운 볕이 내리쬐는 계절이 문을 두드렸다. 새끼들을 주렁주렁 매단 나는 고개를 숙여 흐르던 땀을 훔치다 사뭇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땅바닥과 맑으면서도 흐릿한 물이 저 멀리로 보였던 것이다. '어느새 내가 이만큼을 살아냈구나.'
스스로가 조금 대견스러웠다. 고되고 버겁기만 했던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눈물을 훔치며 주위를 돌아보자 아름다운 황금빛 자태를 뽐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었다. 그토록 크고 거대해 보이던 노란 챙모자를 쓴 사람도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독방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던 무력한 시절로부터 완벽히 벗어났으리라. 어두침침한 물속에서 자리 잡으려 안간힘 쓰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던 찰나였다. 마치 지진의 전조인 듯 우르릉거리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부모님과 생이별하던 그날의 두근거림과 공포를 연상케 했다.
풍작이었다. 농부는 휘파람을 불며 트랙터를 몰았다. 잘 자란 벼들이 논을 빼곡하리만치 채우고 있는 황금빛 들판은 농부의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긴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수확의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트랙터가 덜컹이며 논을 거니는 동안 잘 자란 벼들이 우수수 쓰러지며 수레에 담겼다. 금세 한 수레가 가득 찼고, 농부는 타는듯한 가을볕 아래 쉼 없이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이마의 구슬땀을 연신 닦아내면서도 농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대조적으로 트랙터가 지나간 곳에는 종전의 아름다운 황금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은 짓밟히고 부러진 흔적들로 가득했다. 대만 뾰족하게 남은 그곳의 광경은 마치 공동묘지의 그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잠시나마 풍요의 기운이 넘치던 그곳은 생명의 흔적이 사라진 폐허로 변했고 부모와 생이별한 고아들만이 남아 기나긴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