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앞에 놓인 꽃

단편 소설

by 작가 전우형

언제나 움츠러들어있던 그녀의 어깨만큼이나 무덤은 작고 보잘것없었다. 그 앞에 선명하고 붉은 꽃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도 벌써 3년이 흘렀다. 세상의 그늘 아래 묻혀있었던 그녀의 인생을 기억하는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중 나 이외에 그녀의 무덤에 꽃을 가져다 둘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시간의 흐름도 참혹했던 그날의 기억을 희석해주지 못했다. 절망에 베인 상처와 피딱지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 깊고 날카롭게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졌다. 그녀의 상실은 내가 살던 세상의 절반을 앗아갔지만 나를 제외한 세상은 변한 것이 없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고요하고 평온한 타인의 일상을 보고 있노라면 잠시 밀어두었던 분노가 급작스럽게 치밀었다. 삶의 끝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지만 그 당연한 진리도 나를 짓누르는 외로움과 후회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고아원 옆에 가건물 형태로 지어진 낡고 허름한 카페였다. 그녀는 언제, 어떻게 고아원에 맡겨졌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평범한 줄 알았다고 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 틈에 있다 보니 그것이 이상한 것인지 몰랐다고. 점차 자라나면서 누구에게나 자신을 낳아 준 부모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자신이 버림받은 존재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기에 슬픔과 원망은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고 한다. 그보다는 사랑과 사람에 대한 본질적인 불신, 감정에 대한 무감각, 앞으로의 삶에 대한 걱정이 훨씬 더 무거웠다고 한다. 부모가 왜 자신을 고아원에 맡겼는지 궁금하지 않으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이유든 납득할 수 없을 테니 궁금하지도 않다고. 그녀에게 과거란 너무 망가져 고칠 수 없는 시계와도 같았다.


남의 일처럼 자신의 과거를 말하는 그녀에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내가 그 카페를 자주 찾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며칠 째 카페로 출근도장을 찍던 내게 그녀가 던진 첫마디는 값싼 동정 따윈 집어치우라는 말이었다. 혼자에 익숙해진 그녀의 마음은 이제 막 냉동실에서 꺼낸 가래떡처럼 단단해서 내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어 보였다. 나의 어떤 태도가 그녀에게 동정으로 느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어떤 종류의 관심이든 그런 식으로 밀어내 왔을 것이었다.


그녀의 커피 내리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낀 건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현재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몇 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때만큼은 그녀의 말과 행동 곳곳에 묻어 있던 얼룩진 것들이 사라진 것 같았고 그 평온한 모습은 나에게 하나의 이상향이 되어주었다. 그녀가 지난날의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잠시나마 편안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과거를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 쓰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녀뿐 아니라 나를 향한 주문이기도 했다.


카페로 들어서는 내게 그녀는 왜 또 왔냐고 따져 물었다. 나는 말없이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했다. 어이없다는 눈빛의 그녀에게 나는 이전에 내려준 커피가 맛있어서 다시 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커피가 정말 맛있었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얕은 한숨을 내 쉰 그녀는 꽁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려주었다. 아무래도 커피가 맛있어서 왔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같은 일이 몇 번 더 반복된 후 그녀는 말없이 나를 끌고 다른 카페를 향했다. 그곳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나는 그녀의 커피가 정말 맛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커피 맛을 구실 삼아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커피를 맛있다고 한 사람도, 그 커피를 남김없이 마시는 사람도 내가 처음이었다고, 훗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맛있었다고, 그도 그럴 것이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커피를 맛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며 오해를 풀어주려 했다. 그녀는 여전히 불퉁했지만 단단한 무언가가 녹아내린 듯 굳어있던 표정에 그동안 보이지 않던 미묘하고 새로운 선이 만들어졌다. 직감적으로 나는 그 표정이 그녀가 진심으로 기분 좋을 때 짓는 미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맛있는 커피가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느낀 후로 나는 그녀의 커피를 더 이상 맛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맥주잔 비우듯 깨끗하게 비울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대화가 있은 후로 그녀는 카페를 찾은 나를 박대하지 않았다. 두터운 외투를 벗어던진 듯 그녀와 나 사이의 공기는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조금 더 직설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실력으로 카페는 왜 하냐고. 손님이 이렇게 없는데 유지는 가능하냐고.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없이 웃음만 지었다. 수심에 찬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이내 그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다. 사람은 얼마든지 웃으면서도 울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녀가 답을 해준 건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별 다른 이유는 없어. 그저 내가 버려져있던 장소가 어느 카페의 구석진 자리였다고 원장님께서 내게 말씀해주셨거든. 부모님이 카페를 즐겨가던 분이셨다면 언젠가 한 번쯤 우연히라도 이곳을 지나치지 않을까 해서." 나는 멍해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는 그녀의 담담한 언어가 내 뒤통수를 후려친 까닭이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카페로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에 묘한 실망감이 묻어있었던 까닭을. 나는 그것이 내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작은 종소리가 '딸랑' 하고 울릴 때마다 그녀는 오지 않을 누군가를 내심 기다렸던 것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기다렸던 사람이 내가 될 수 없음에 서운함을 느낄 여지마저 없을 만큼 부모님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은 컸고, 그 안에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외로움을 억누르느라 힘겨워하는 그녀에게 남녀로서의 감정은 사치였다.


그렇게 나란 존재는 그녀의 고독을 쌀 한 톨만큼도 덜어주지 못했다. 사랑까지는 원하지 않았지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어떤 벽이 존재했다. 그 벽은 너무나 공고해서 무너트릴 수도, 우회할 방법도 없었다. 서로에게 닿을 유일한 통로는 너무나 오래 닫혀 있어서 어떻게 여는지도 몰랐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녀는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방법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가 걱정되었다. 보육원과 인접하기는 했지만 그 일대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영세한 보육원인만큼 경비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젊은 여성이 홀로 운영하는 카페. 그런 곳이 적절한 보호로부터 소외될 때 벌어지는 참극은 저녁 뉴스의 단골 소재였다. 심지어 그녀는 모두가 잠든 밤에도 카페 문을 닫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그녀의 부모라고 하더라도 자식을 버린 미안함에 벌건 대낮에 찾아올 수는 없지 않겠냐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러다 큰 일 난다고 다그쳐봐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큰 일? 큰 일이라면 이미 벌어지고도 남았지. 한 사람의 인생에 부모에게서 버려진 것보다 더 큰일이 있겠어? 안 그래?" 초점 없는 눈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걱정이 앞섰지만 타인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스마트폰의 진동이 상념에 빠져 있던 나를 깨웠다. 그녀의 번호가 발신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며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그녀에게 필요할 때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내 번호를 알려준 것이 벌써 1년도 넘은 일이었다. 하지만 남에게 밑지거나 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피했던 그녀였기에 그동안 전화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전화를 했다면 심각한 상황일지도 몰랐다. 만약 전화 건 상대가 그녀가 아니라면...? 일부러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버튼을 화살표 방향으로 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인근 경찰서 강력계 형사라고 소개한 김 모 경관은 그녀의 스마트폰에서 최근 통화기록을 확인하고 전화를 걸었다고 말했다. 나는 의아함을 뒤로한 채 우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김 모 경관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자신은 살인사건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며 현장에는 그녀의 스마트폰이 남아있었다고 말했다. 사망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핏자국은 남아있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 그녀가 살해당했다고 단정 지을 근거는 없었다.


경관은 나의 지난 24시간의 행적을 상세히 물었다. 알리바이를 확인하는 뉘앙스였지만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일단 지난 통화기록을 보고 내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부터가 허구였다. 나는 그녀와 통화한 적이 없었다. 나는 경관을 슬쩍 떠보기로 했다. "바로 어젯밤에 통화했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 별다른 문제는 없었던 것 같아요. 신고가 들어온 시각이 언제죠?" "어제 통화한 시각이 언제쯤이었나요?" "밤 12시경부터 30분가량 통화했던 것 같아요." "그럼 사건이 발생한 시점은 그 이후가 되겠군요." '걸렸다. 요놈.' "그렇겠죠. 그런데 지금 카페에 계시나요? 몇 가지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리로 가도 될까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하시죠."


운전대를 잡고 내달리던 중 한 사람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손님이 뜸하던 그녀의 카페에 나 말고 한 사람의 손님이 더 있었다. 워낙 존재감이 없던 터라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그는 나 만큼이나 그녀의 카페를 자주 찾았다. 구석진 자리에서 묘하리만치 거슬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살피는 모습에 한동안 경계하기도 했었지만 매일같이 커피만 조용히 마시고 사라지는 그의 모습에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는 그만두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그중 단 한번, 그와 가까이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그녀를 대신해 카운터를 보던 그날, 평소처럼 문을 열고 나타난 그는 카운터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카운터로 다가와 주문을 했다. 왠지 그날 들었던 건조하고 딱딱한 억양의 그의 목소리와 조금 전 전화기 너머로 전해진 경관의 목소리가 닮았다고 느껴지는 건 과도한 억측일까?


나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그녀는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형사 행세를 하며 그녀의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건 그 남자는 매일같이 카페를 찾던 그 남성일 것이다. 그녀의 스마트폰이 그에게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신상에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찰에 신고를 넣어야 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일단 보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부모가 말없이 어딘가를 다녀온다는 것을 알았다. 몰래 부모의 뒤를 쫓은 그가 발견한 곳은 작은 보육원과 그에 딸린 허름한 카페였다. 가로등도 없어 사방이 적막에 갇힌 깊은 밤이었지만 카페에 켜진 불로 인해 그 일대는 사물을 분간하기에 충분했다. 그의 부모는 카운터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그저 머물렀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의 부모가 카페의 한 여성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밤늦은 시간이면 사라지는 그의 부모가 어디를 향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카페의 여성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그가 모를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잃어버린 누이가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들어가면 잃어버린 누이 이야기를 했다. 어렴풋이 누이가 사라진 날이 그가 태어나던 날이라는 말도 들었다. 아버지는 누이를 잃어버린 것이 자신 때문이라며 넋두리를 했다. 아버지의 눈에 왠지 모르게 자신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누이의 그림자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 그의 누이는 누군가에게 납치당했다. 그날 그의 아버지는 간호사의 호출을 받고 분만실로 들어갔고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곁을 지키던 중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병원 복도에 3살 배기 딸아이를 홀로 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섬뜩한 기분으로 분만실 밖으로 나온 그의 아버지는 딸아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마 아내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악전고투에 가까운 분만 과정으로 진이 빠진 아내가 충격이라도 받으면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가까이 있던 간호사에게 밖에 있던 아이가 사라진 것 같다며 찾아봐달라고 부탁했고 그날이 그의 부모와 누이가 함께했던 마지막 날이 되어버렸다. 그의 부모님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그는 잃어버린 누이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늘 누이의 그림자가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얼마 전 눈물로 오열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목격했다. 직전에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무언가를 알려주었고, 그는 그 전화가 누이를 찾았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이었음을 직감했다. 부모가 말없이 어딘가를 다녀오기 시작한 것은 그 전화를 받은 후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는 부모님의 뒤를 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유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장소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오래전에 잃어버린 누이의 소식이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어째서 그의 부모가 그에게 누이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간 누이의 존재를 그에게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미진함이 있었다. 누이의 존재를 숨겨야 하는 이유는 그가 받을 상처가 걱정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누이의 죽음에 그가 괜한 자책을 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누이의 생존을 확인했다면 더 이상 그에게 숨길 필요가 있을까? 아직 알려야 할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이가 이미 가족으로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일까? 수많은 상상과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 답은 누이를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누어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누이의 카페를 찾아갔을 때 늘 그보다 먼저 와있는 남성이 있었다. 그 남성은 누이에게 꼬리 치려 애쓰는 늑대 같았지만 누이는 그 남성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늘 그 남성이 거슬렸다. 누이와 단 둘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좀처럼 그 남성은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밤 시간에 카페를 찾기에는 부모님에게 둘러댈만한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부모님께서 일주일간 제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누이의 카페로 향했다. 구름 사이로 달무리가 비치는 깊은 밤이었다. 그는 누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카페. 카운터에 엎드려 잠든 그녀를 향해 회색빛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다가선다. 그림자의 손에서 날카로운 달빛이 반사되었다. 짙은 회색 후드를 눌러쓴 그가 그녀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할 때 한 남성이 쫓아 들어와 소리친다. "안 돼! 그만둬!" 갑작스러운 소란에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고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남성과 눈이 마주친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그녀에게 달려든다. 두 사람의 생존을 건 몸부림에 카운터는 난장판으로 변하고 소리친 남성이 다급히 달려들어 보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듯 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 짓는 그는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남성이었다. 그녀는 목을 부여잡은 채 쓰러져 있었고 바닥은 이미 그녀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뒤이어 따라 들어온 그의 어머니는 아수라장이 된 장내의 풍경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던 그의 눈에 갑자기 흰자위가 도드라지며 그가 힘을 잃고 쓰러졌다.


그에게는 특이한 정신분열증이 있었다. 잃어버린 누이에 대한 깊은 증오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자아는 둘로 분리되었고, 평소에는 아무 문제도 없던 그가 간혹 악몽을 꾸고 나면 발작이 시작되었다. 일단 발작이 시작되면 그는 매우 파괴적으로 변했고 잃어버린 누이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며 증오를 퍼부었다. 그의 부모가 누이의 소식을 그에게 전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발작에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의사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 팔다리를 묶어두어야 할 만큼 발작은 심각해졌고 자주 일어났다.


"어찌 이런 일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건가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이 그녀의 행방을 찾아 헤맸던 것은 그의 정신분열 증세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을 느낀 그의 부모는 잃어버린 딸을 찾아가 그의 치료에 도움을 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딸의 소재를 파악된 뒤, 은밀한 방법으로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의 위치를 알려주고 그녀와 만나게 한 것도 아무 잘못도 없는 두 사람 사이의 해묵은 감정이 그렇게나마 해소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은 잘 풀려가는 듯했다. 누이와 동생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이끌렸고 두 사람의 사이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그녀에게 동생의 상태를 알리고 도움을 부탁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일주일간 여행을 떠난다고 했던 것도 실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묵은 한을 풀어주려 했던 것이다. 호전되어간다는 말에 방심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평소에는 발작을 대비해 잠들 때만 조치를 취해두면 되었지만 일주일을 묶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최근 한 달 동안은 단 한 번의 발작도 없었다는 것이 두 사람의 긴장을 풀어헤쳤는지도 모른다. 그녀와의 만남이 시작된 후 그의 상태는 호전에 호전을 거듭하고 있었기에 그의 치료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주치의조차도 완치 가능성을 언급했을 정도였다. 그랬기에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그를 혼자 두고 집을 비울 계획을 짰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되찾은 딸아이는 비명에 떠났고, 아들은 누이를 죽인 살인자가 되어버렸다.


정신을 잃은 아들은 깨어나면 지금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은 우선 아들을 집으로 데려다 놓은 후 피 묻은 옷을 갈아입혔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살인사건 신고를 넣었다. 어차피 아들을 어디론가 피신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신이 든 아들은 통화기록을 토대로 경찰의 전화를 받게 될 것이고 별다른 의심 없이 경찰의 지시를 따를 것이다. 아들의 스마트폰의 통화기록은 삭제했다. 그것만 없으면 범행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 달아날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그 모습이 그의 정신증을 경찰 모두에게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줄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면 심신 미약이나 정신증으로 인한 감형은 큰 무리 없이 이뤄질 것이다. 그렇게라도 감형을 받고 죗값을 치르는 것이 그들에게 떠오른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였다.


카페 앞에 도착한 나는 일제히 나를 비추는 서치라이트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꿀릴 것이 없었다. 설사 그 경관의 말이 사실이었더라도 나는 그녀를 해치지 않았다. '대체 무슨 통화기록이 있다는 거야?' 나는 앞으로 걸어가며 내게 전화한 김 모 경관을 찾았다. 그에게 왜 통화기록이 있다고 나를 속였는지 단단히 따질 예정이었다. 텁수룩한 수염의 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정말로 범행 현장으로 올 줄이야. 당신을 살해혐의 용의자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서슴없이 수갑을 채우려는 그를 보며 나는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살해혐의? 지금 나보고 살해자라고 한 거예요? 이거 놔! 어? 이거 안 놔?!" 훈련받은 경찰들에게 일반인의 저항은 무력했다. 그의 뒤로 달려든 두 명의 경찰에게 신체를 구속당한 나는 속절없이 경찰차에 올라타야만 했고 이어진 며칠 동안 수 차례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녀를 해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내게 그들은 CCTV 화면을 보여주었다. 익숙한 카페의 카운터가 비치는 화면에는 나와 똑같은 차림새를 한 사람이 그녀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정신분열 증상을 인정받아 감형을 받은 나는 3년의 수감기간을 마치고 구치소 문을 나섰다. 여전히 나는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수용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무덤으로 향했다. 누군가 그녀의 무덤 앞에 놓아둔 꽃이 보였다. 핏빛처럼 붉은 꽃이었다. 그 사람은 아마도 나의 분신인 '그'일 것이다. 그녀의 죽음 이후 '그'는 퍽 잠잠해졌다. 3년의 수감기간 동안 그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에 대한 원한으로 생겨났던 그는 그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존재할 이유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여전히 그는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나보다 먼저 이 빨간 꽃을 가져다 둘 사람은 '그' 외에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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