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처음 걸려온 형의 전화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문객이 나타났음에도 안내는커녕 마중 나오는 유가족 한 명 없었다. 민철은 한차례 숨을 가다듬고는 식장 번호와 이름을 재차 확인했다.
103호
성명 : 해모수
성별 : 남
나이 : 57세
아버지가 확실했다. 민철은 식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이지 않는 손이 발목을 잡아끄는 듯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빈소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흔들리는 촛불 너머로 몇 개의 그림자가 파도 거품처럼 아른거렸다. 그를 반긴 건 익숙함과 놀람이 뒤섞인 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민철이구나...!"
민혁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하긴 했지만 10년간 얼굴도 내비치지 않던 동생이 정말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민철의 등장은 그에게 모종의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부모의 상실은 형제에게 결코 반갑지 않은 갈등을 만들어내기도 하니까. 하지만 민혁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민철에게 오늘의 방문은 그저 죽은 아버지에 대한 예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초겨울의 한기처럼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민철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듯한 민혁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그저 묵묵히 향에 불을 붙일 뿐이었다. 향은 점차로 연기로 변하며 형체를 잃고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죽은 이에 대한 추억이 서서히 소멸되어가는 것 같았다. 연기가 코끝을 스미자 민철은 속이 매스꺼워지는 것을 느꼈다. 반갑지 않은 어떤 장면이 떠오르려 했던 것이다.
"아찔해질 때면 공포를 가슴 깊이 삼켜라."
해모수가 그들에게 자주 내뱉던 말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를 강한 사람으로 평가했지만 그런 아버지도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5년 전 어머니가 사라진 후 아버지는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변했다. 그것이 수시로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을 흩어버리기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훗날 어렴풋이나마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10년 넘게 쌓아온 아버지와의 거리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민철에게 아버지란 '아내마저 희생시킨 냉혈한의 사업자'일 뿐이었다.
비록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더라도 그의 가르침은 여러모로 유용할 때가 많았다. 상황에 휩쓸리기보다는 상황을 네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민철은 잠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켰다. 향내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면서 마음이 오히려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향은 밀물처럼 빈소 곳곳으로 밀려들며 머물던 냉기를 밀어냈다. 민철은 해모수의 영정에 눈을 맞추었다. 집을 뛰쳐나오던 10년 전 그날 민철은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결코 아버지 앞에서는 울지 않으리라. 그를 위해 눈물 흘리지도 않으리라.'
민철은 손톱 끝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자신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건 알지 못했다.
민철과 민혁은 식장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묵묵히 소주잔을 채운 민혁은 먼저 한 잔을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10년 만에 본 민혁은 많이 늙어있었다. 하지만 그의 안색이 유독 어두워 보이는 건 단지 세월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술잔을 탁 하고 내려놓은 민혁에게 민철이 물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신 거야?"
민혁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 수만 가지 단어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민혁이 내뱉은 말은 민철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황금 조개가 사라졌어."
민철은 문득 며칠 전 받은 소포가 떠올랐다. 발신인에 해모수의 이름이 쓰인 소포를 받은 민철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민철이 아는 한 아버지는 결코 '소포'라는 수단을 통해 무언가를 보낼 사람이 아니었다. 해모수는 중요한 일은 반드시 직접 마무리 짓는 방식을 선호했다. 만약 이것이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해신 그룹'의 이름으로 보내면 될 일이었다. 굳이 발신인에 아버지의 이름이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연락을 끊었던 아버지로부터 10년 만에, 그것도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도착한 물건이 결코 평범한 것일 리 없었다. 해모수가 직접 보낸 것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지만 그보다는 해모수가 직접 물건을 건네줄 수 없는 상황일지 모른다는 가정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어쩌면 그룹에 큰일이 생긴 걸지도. 그렇다면 이 판도라의 상자는 더더욱 열어선 안돼.'
민철은 그것을 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이 아버지가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민철은 그 상자를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형으로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민철은 왠지 아버지가 보낸 소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차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민철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민철은 이미 떠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민혁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을 알았지만 어차피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민철이 돕겠다고 나서는 것이 오히려 민혁을 부담스럽게 만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 형제란 가장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먼 사이였다. 민철이 비록 가문을 떠난 상태라고는 하나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 임원은 적은 수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민철은 일종의 보험이었다. 민철이 해신 그룹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바람일 뿐이었다. 여전히 민철은 기업 총수 해모수의 둘 뿐인 직계 혈육 중 한 명이었고,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회장직을 이어받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2021년 8월 1일. 해모수의 서재.
[나는 아내를 찾아 떠나려 한다.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나를 찾으려 애쓰지 말거라. 책임만 남기고 떠나서 미안하구나. 대외적으로 아비는 사망한 것으로 해다오. 민철이에게도 이 아비는 죽은 걸로 전하거라.]
해모수가 짤막한 메모를 남긴 채 자취를 감춘 뒤 만 하루가 지났다. 그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추적은 불가능했다. 해모수가 말 그대로 마법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해모수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은 그의 서재 입구에 설치된 CCTV였다.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간 장면이 해모수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스마트폰, 지갑, 카드를 비롯한 모든 귀중품 역시 그대로 남아있었기에 달리 추적할 방도가 없었다. 극단적 선택을 염려해 밖으로 통하는 창문과 난간을 비롯한 건물 인근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특별한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서재의 후미진 곳에 미심쩍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기하학적 형태의 그을린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떤 단서도 될 수 없었다. 증명 가능한 것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마법진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했다는 이야기는 해도 안 되는 말이었고 해 봐야 소용없는 주장이기도 했다.
해모수의 실종은 사실 민혁에게 그리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다. 5년 전 어머니가 실종된 후 해모수는 이미 몇 차례 자리를 비운 일이 있었다. 민혁에게는 부재를 알리고 떠났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민혁은 그것을 신임의 표현으로 여기고 득의만면해하기도 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해모수는 평소 모습 그대로 회장직을 수행했지만 그런 식으로 기업의 대소사는 차근차근 민혁에게로 넘어가는 추세였다. 민혁은 그렇게 자리를 비운 해모수가 언젠가는 영원히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추측이라기보다는 어떤 확신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사라진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것이 틀림없어.'
민혁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책임감 하나로 기업을 이끌던 해모수가 비밀스럽게 자리를 비울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민혁도 익히 알고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그녀는 현명했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몇 차례 찾아왔던 커다란 위기를 모면하는데도 그녀의 역할이 지배적이었다. 해신 그룹은 그녀라는 거목에 붙은 작은 가지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거목은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그런 그녀가 공공연하게 민혁을 차기 대표로 인정했기에 해모수 회장의 뜨뜻미지근한 태도에도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여러모로 달랐다.
공식석상에서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그를 차기 회장으로 여긴 지 오래였다. 유일한 경쟁자인 민철이 10년 전 집을 떠난 후로 몇몇 사람들은 아예 대놓고 차기 회장으로 대우하기도 했다. 민혁은 아버지의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른 시기에 중요한 직위를 미리 확정해두는 것이 때때로 큰 부작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해결할 일이었다. 민혁은 대신 입지를 다지는데 주력했다. 해신 그룹이 추진하던 사업들이 지지부진한 와중에도 민혁이 담당한 사업은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해신 그룹을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로서의 면모를 모두에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퍼즐만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해신그룹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황금 조개를 정식으로 인계받는 일이었다.
2021년 8월 9일. 해모수의 장례식장.
민혁은 미쳐버리기 직전이었다.
'아버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정말 그룹이 망하게라도 하려는 거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해모수의 태도가 민혁의 머리를 더 지끈거리게 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원인모를 편두통이 민혁을 괴롭히고 있었다. 돌덩이에 짓눌리는 듯한 통증은 머릿속을 채운 고민들과 함께 민혁의 정신을 아득할 정도로 압박해왔다.
'아버지는 어째서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차기 회장직을 정리하지 않은 걸까?'
해모수가 심중으로라도 민혁을 후계자로 생각했다면 황금 조개는 내어놓고 사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황금 조개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민혁 역시 황금 조개를 직접 두 눈으로 본 적은 없었지만 해모수의 금고에 깊은 곳에는 황금 조개가 있다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금고는 텅 비어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불패의 해신그룹 신화에는 점차 금이 가고 있었다. 해모수는 이전처럼 영민하게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고, 중요한 순간에 결정을 미루다 최악의 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현재 상황에서 민혁이 회장직을 물려받는다고 해도 그룹의 상징인 '황금 조개'가 없으면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었다. 그의 회장 취임식에서조차 황금 조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세간에 떠도는 [황금 조개가 사라졌다.]는 루머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가는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해신 그룹의 운명에 거대한 암운이 드리울 것이 뻔했다.
인어공주의 일기장. 117페이지.
그가 해변에 쓰러져있던 나를 데려온 것은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는 나를 극진히 간호해주었고, 말 못 하는 나를 대신해 입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와 사랑에 빠졌고 바다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음 해에 쌍둥이 아들인 민혁과 민철이 태어났다.
바다 왕국을 떠나면서 나는 황금 조개를 가져왔다. 황금 조개는 캄캄한 바닷속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귀한 진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세상에서 그 진주는 단지 아름다운 장신구에 불과할 것이었다. 마녀는 나의 목소리를 빼앗아가는 대신 인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주었다. 나는 마녀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그것은 바로 황금 조개의 용도를 바꾸어달라는 것이었다. 마녀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바뀐 기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마녀는 차차 알게 될 것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원하던 왕자를 만나기도 전에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였다.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수 없었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인간의 다리는 위기를 모면하기에 부적합한 구조였다. 죽을힘을 다해 육지를 향해 손과 발을 저었고 가까스로 해안가에 도달한 나는 너무나 지친 탓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처음 보는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의 이름이 '해모수'라는 것을 알았다. 목소리를 잃었던 나는 그에게 글을 배웠고 우리 둘은 필담을 통해 사랑을 나눴다. 가끔 내가 의미심장한 문장을 그에게 건네는 것은 전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나를 찾았고, 그 후의 결정은 최고의 선택으로 남았다.
황금 조개를 문지르면 껍질에 새겨진 양각의 문자가 빛나며 입을 열었고 그 안에는 궁금해하던 미래가 쓰여 있었다. 한 가지 사소한 문제라고 한다면 그 내용은 오직 나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 부부는 황금 조개로 알아낸 정보를 이용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건강에 조금씩 문제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뒤늦게 마녀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녀는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며, 황금 조개를 결코 남용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미래를 아는 것은 매력적이고 중독적이어서 한 번 미래를 엿본 사람은 결코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황금 조개를 작동해 처음으로 미래를 엿본 순간 결코 헤어날 수 없는 마녀의 덧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완연해가는 나를 보며 그는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의 닦달에 결국 나는 황금 조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황금 조개가 나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었음을 알게 된 해모수는 다시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로 다짐했고, 내게도 약속을 요구했다. 우리는 황금 조개를 금고 깊숙한 곳에 넣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로 웃음을 잃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그는 좀처럼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던 예전과는 행동과 눈빛, 말투 그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사업에 관한 몇 가지 악재가 연달아 터지기도 했다. 조금씩 건강을 되찾아가는 나와는 달리 그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미래를 얻는 대신 자신을 잃으리라.]
마녀가 예언한 대로 흘러가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서랍 깊숙이 밀어두었던 황금 조개를 다시금 꺼내게 된 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2016년 7월 31일. 인어공주의 병실.
병실 문을 열고 해모수가 들어왔다. 그녀는 가쁜 호흡을 내쉬면서도 해모수를 반겼지만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했다. 한 번 내어준 시장 주도권을 되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민혁을 통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지만 사업은 여전히 정상궤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 번은 기업의 뿌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큰 손실도 있었다. 고개를 떨어트린 채 말을 잇지 못하는 해모수를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 그리 힘든가요?"
해모수는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당신... 어떻게 말을?!"
그녀는 해모수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랍니다. 당신의 고민은 결코 사라질 수 없어요. 아무것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예의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만 보이던 확신에 찬 그것이었다.
"이제 선택을 내려야 해요. 당신이 기업을 되살리길 원한다면 저는 당신의 뜻을 따를 거예요. 하지만 저와 함께하고싶다면 더 이상 기업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그리고 저와 함께 이곳을 떠나야 해요."
해모수는 그녀의 억지에 가까운 제안에 놀라면서도 그녀가 결코 허튼 말을 할 사람이 아님을 떠올렸다.
"내 뜻에 따르겠다니, 그건 참 무서운 말이구려. 두 가지 제안 모두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지금 선택해야만 해요. 지금이 아니면 선택할 기회조차도 잃게 될 테니까요."
해모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 말은... 설마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가요?"
그녀는 천천히 눈을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타는듯이 붉은 석양 한가운데로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래요. 제가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저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유일한 방법은 오늘 자정이 되기 전에 바다로 돌아가는 방법 뿐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한차례 힘겹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바다로 돌아가면 다시 당신을 만날 방법은 없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황금 조개를 당신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겠어요. 그 대가는 물론 당신이 상상하는 그 무엇이겠죠.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니에요. 다만 당신이 진정으로 그걸 원하는지 궁금할 뿐이에요."
해모수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소. 나의 바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었소. 하지만..."
그녀는 해모수를 한 차례 지그시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그 눈빛은 엄마가 말썽쟁이 아이를 바라볼때의 그것과 같았다.
"못난 사람.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군요. 한때는 당신의 그런 면이 귀엽기도 했지만 오늘은 마냥 기다릴 시간이 없군요. 당신이 우려하는 것은 민혁이에 관한 것이 아닌가요?"
해모수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로서는 결코 인정하지 않고 싶었던 말을 스스로 꺼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물론 민혁이에게 모든 걸 물려주고싶소. 이제 그녀석도 자기 앞가림정도는 할 줄 아니까. 하지만 지금은 기업이 너무나 힘든 상태요. 더구나 나도, 당신도 없이 민혁이 혼자 무너져가는 회사를 감당하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잖소."
그녀가 기다렸다는듯 말을 이었다.
"그 고민을 해결할 다른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할건가요? 나와 함께 떠날 수 있나요?"
해모수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만약 그런 수가 있다면 나는 당연히 당신과 함께 떠나겠소."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좋아요. 그 방법은..."
대화가 끝난 후 해모수는 병원에 그녀의 외출을 요청했다. 병원측은 외출은 자칫 그녀의 병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해모수는 고집스럽게 그녀를 휠체어에 태우고선 병원 문을 나섰고 그녀와 함께 어딘가를 향했다. 그날 자정이 넘은 시각에 해모수는 혼자 돌아왔고 쏟아지는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영원히 사라졌다.
1991년. 인어공주의 방.
민철은 그녀를 쏙 빼닮았다. 민철이 다섯 살 되던 해, 우연히 그녀의 방에 들어온 민철은 황금 조개에 손을 댔고, 극심한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놀라움은 민철이 바닥에 쓰러져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자신이 쳐둔 결계를 민철이 통과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인한 것이 더욱 컸다. 그녀의 방에는 보안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장치는 그녀의 기운에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민철이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는 건 어떤 이유로든 보안장치가 민철의 기운에 반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더 심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황금 조개의 입이 벌어져있다는 사실이었다. 허가되지 않은 사람이 황금 조개에 손을 대면 가벼운 쇼크로 쓰러지게 되어있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황금 조개가 작동되는 것은 아니었다. 황금 조개는 그녀가 가진 인어공주로서의 능력 없이는 작동할 수 없어야만 했다. 하지만 황금 조개는 작동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황금 조개의 벌어진 입에는 그녀만 알아볼 수 있는 메시지가 보였다. 메시지의 내용을 해석한 그녀는 경악했다. 그것은 민혁의 사망일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황금 조개는 만지는 사람이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내용을 알려주게 되어 있어. 그렇다면 이 아이가 형의 죽을 날을 궁금해했다는 거야? 이제 다섯 살 밖에 안된 아이가 어떻게...'
인간의 모습이 되어 해모수의 아내로 살고 있었지만 그녀가 가졌던 인어로서의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바다왕국에 살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녀는 기초적인 예지력이나 마음을 읽는 능력, 결계 형성 능력 등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수명을 희생해서나마 황금 조개를 작동시킬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황금 조개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그녀의 예지력을 극대화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민철은 그녀의 능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
민철의 능력은 결코 알려져서는 안 됐다. 그리고 민철의 마음 깊은 곳에서 형의 죽음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도 숨겨야만 했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고 만다. 그녀는 우연한 계기로 민혁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게 되었다. 이제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그녀는 민철로 하여금 해모수가 성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고 믿게 했다. 순진한 어린아이의 생각을 뒤트는 것은 굳이 마법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민철은 해모수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갖고 집을 떠났다. 대외적으로는 민철은 큰 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덕분에 민혁은 유일한 해신그룹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탄탄히 다질 수 있었다. 비록 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할 운명이더라도 그 전까지는 자신의 능력을 원 없이 펼쳤으면 하는 것이 엄마로서 그녀의 바람이었다.
2021년 8월 9일. 장례식에서 돌아온 후. 민철의 방.
집으로 돌아온 민철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들었다. 해모수가 보낸 바로 그 상자였다. 아버지가 종적을 감추면서 발송한 소포. 이제 민철은 그 상자를 열어보지 않아도 무엇이 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해모수가 이것을 민철에게 직접 전해주지 못한 이유는 분명했다. 이미 후계구도에 가장 근접한 민혁이 아니라 민철에게 황금 조개가 전해진 것을 공공연하게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기업 내 알력다툼의 불씨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왜 황금조개를 자신에게 보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민혁의 전화번호였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울먹거리는 형수의 그것이었다.
2016년 7월 31일. 어느 바닷가.
그녀는 해모수에게 누렇게 색이 바랜 하나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그 메모에는 날짜 하나가 쓰여 있었다. [2021년 8월 9일] 민철의 능력으로 작동한 황금 조개가 처음으로 예언한 민혁의 사망 예정일이었다. 그녀는 해모수 앞에서 마지막으로 황금 조개를 작동시켰다. 황금 조개의 예언은 7월의 마지막 날 해모수가 사라지면 그의 장례식 마지막 날 두 형제가 만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해모수에게 황금 조개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약속한 날짜가 되면 민철에게 보낼 것을 당부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바다의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해모수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돌아간 것이었다. 그녀는 5년 후 오늘 서재 뒤편에 설치해둔 마법진으로 자신을 소환하기로 약속했다.
해모수는 그녀를 향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그 후로도 매년 그녀가 사라진 바닷가를 찾았지만 그 곳에는 그저 바위에 부딪혀 부서져내리는 파도 거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해모수는 그녀와 약속한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약속한 그날 아침, 민철에게 황금 조개를 보내고는 서재로 돌아와 마법진 위에 섰다.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며 해모수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기묘한 형상으로 그을린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