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의 납치극 - 8

부모의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

by 작가 전우형

* 7편에서 이어집니다.


결핍


'아이'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무수한 결여를 부모의 사랑과 지원으로 하나씩 해결하며 서로 다른 속도로 어떠한 지점에 이른다. 비로소 홀로서기의 출발선에 도착한 아이는 자신을 지켜주는 장벽인 동시에 진지하고 자유로운 탐험의 장애물이었던 '부모'라는 한계를 넘을 준비를 하고, 이내 또 다른 돌풍에 상처 입고 휘청이면서도 자신의 영역을 넓히며 세계지도를 만들어간다.


부모의 사랑은 대체재가 없다. 충족과 보살핌의 시기에 부모의 사랑을 수혈받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영구 문신이나 주홍글씨 같은 항구적 결핍이 새겨진다. 들키기 싫어 아등바등 애써도 송곳처럼 삐져나온 과거는 채 아물지 못한 피딱지를 헤집어댄다. 마음 곳곳에 존재하는 죄수번호 같은 낙인은 누군가가 구태여 지적하지 않아도 스스로 늘 신경 쓰는 그 무언가 이고, 그런 무의식적인 '의식' 탓에 결코 세련되다고는 평가할 수 없는 방식의 관계 맺음으로 드러나고 만다.


스스로 눈치채지 못할 뿐 누구나 그 모습을 보면 숨은 사정에 대한 은밀한 소설 하나쯤은 구상하고도 남을 만큼 과장되고 티 나는 방식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 보지만 그처럼 지나친 자기 방어가 오히려 외로움을 리필한다는 것은 모른 채 자신에게 운명론적 고독을 덧씌우기도 한다. 메마른 입가에 웃음이 번졌던 어쩌면 충분히 행복이라 부를만한 찰나의 순간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마저도 흑빛으로 물들인 채 자신의 인생은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의미'라는 단어로부터도 소외되었다는 말로 가슴의 살덩이를 푹푹 떠낸다.


처음부터 없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 나이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자조로 시선을 내리깔고, 사람들의 악의 없는 관심을 오히려 두려워하며, 결국 부모 없는 자식은 있을 수 없음을 지식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탓에 새로운 종류의 절망에 획을 긋는다. 덮을 수 없는 상실감은 '자신'이라는 존재가 훗날 어떤 결론에 도달한 순간까지도 이 세계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을 무너트리고, 이런 종류의 고민을 시시때때로 안고 사는 탓에 일반적인 아이와는 무척 다른 나이테를 경험하게 된다.


누구에게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나에게는 결코 당연하지 않은, 수시로 나의 처지를 덜컥 깨닫게 만드는 수많은 종류의 결핍들로 인해 태어난 이유를 의심하며, 미뤄두어도 자꾸만 떠오르는 '내 부모는 나를 왜 이곳에 보냈을까'와 같은 생각에 이미 골몰하는 자신을 뒤늦게 알아차릴 때마다 자신을 책망할 이유가 아닌 일로 자신을 책망한다. 그러한 책망들이 마치 세상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나 목소리인 것처럼 귓바퀴와 정수리 안쪽 3cm 지점쯤을 맴돌고, 약간은 왜곡된 경험의 누적 탓에 아이들은 훗날 누군가 덜컥 사랑한다며 다가와도 도돌이표처럼 되새겨온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 '부모에게서도 버림받은 존재'라는 자신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묘하게 단정 지으며 미리 선을 긋거나 도망치고 만다.


굶주림


예정되지 않은 시간에 깨어난 아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함께 잠든 친구들의 의도된 고요와 평온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그들의 꿈속도 겉모습처럼 평화로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는 문득 엄마를 떠올렸다. 얼굴조차 기억에 없는 엄마의 모습은 실루엣만 남은 그림자 인형 같았다. 살벌하리만치 잘 정돈되고 통제된 그곳에서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것이나 부모에 대한 어떤 잔상 같은 것을 여전히 마음에 품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되는 행위였다. 아이가 부모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과연 의지로 억누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한 것처럼 위장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생존에 대한 진지한 위협일 것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관리'하는 가장 원초적 방법은 바로 급식 통제였다.


갓 태어난 아이도 이미 알고 있을 만큼 배고픔은 직설적이며 공포 그 자체다. 한 끼 굶은 아이는 어쩐지 에너지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에 잔잔한 짜증이 찰랑이고 다음 식사 시간 즈음이 되면 시장기를 느낄 뿐이다. 그저 유달리 다른 때보다 밥맛이 좋고 '포만감'이라는 단계에 도달하기까지 다른 때보다 많은 양의 식사를 허겁지겁 먹어치운 후 '내가 한 끼를 굶었었지' 하는 수준이다. 이성을 잃을 만큼도 아니고 생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제공할만한 사건도 아니다. 하지만 식사를 두 번 정도 굶은 아이의 속사정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남이 먹다 만 음식에 침이 고일뿐 아니라 먹을 것을 보는 눈빛에 날카로운 살기마저 맴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 방어인 떼를 쓰는 것이나 소리 높여 울어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짜증이나 분노는 점차 공포로 변한다.


아이를 굶주림으로 길들이는 건 매우 잔인하고도 효과적이다. 굶주림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아이는 다시는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극단적으로 최선을 다한다. 아직 가르치지도 않은 예의범절이나 공손함마저 스스로 터득하기도 하는데 그 발달 수준은 경이로울 정도다. 통제를 따르지 않는 아이를 걸러내기 위해 '이곳'에서는 대리양육 프로그램에 입소 전 충분한 길들이기 단계를 거친다. 운영요원이나 대리 양육자의 노동강도나 정신건강에도 이로웠고 아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뼛속 깊이 깨닫는 부수 효과도 있었다. 이곳에서의 질서와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을 주지 않는 수준의 무력 과시나 공포 조성은 필수적인 것으로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에 대한 도덕적 논란이 내부적으로 벌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지만 어쩌면 그런 비생산적인 감정 따위가 취급되지 않는 것은 이 세계의 당연함 중의 하나였기에 으레 그런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말았다.


입소한 아이들의 연령대는 다양했지만 모두 부모의 대리양육 요청에 의해 보내진 아이들로 사실상 부모의 품으로 되돌아갈 확률은 희박했다. '이곳'의 아이들에게 사랑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굶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었다. 단순한 미움 이상의 무시가 확연한 증오보다 무서웠고 '없는 사람 취급'이 단지 정서적 결핍 이상의 실질적 허기나 곤궁으로 다가올 때 아직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갈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에게 다가오는 미래의 공포나 예기 불안 따위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생존에 대한 진지한 위협은 착한 아이 양산에 안성맞춤이어서 아이들은 미래에 어쩌면 닥칠지 모를 배고픔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그곳 사람들의 말에 순종하기를 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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