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오아시스
* 8편에서 이어집니다.
사막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척박한 토양을 거름 삼아 자라난 이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람의 온기다. 콩나물시루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시들지 않는 소외감은 서서히 굳어가는 10월의 한기처럼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어서 일종의 마비 상태를 초래하고, 숙이고 굽히던 습관 탓에 이제는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굳어진 왜소한 어깨와 구부정한 목은 좀처럼 하늘이나 세상보다는 땅바닥을 향해 있어서 45도 아래쪽을 바라보는 것이 신체적으로나 마음적으로 자연스러울 정도다. 그러다 보니 흔해 빠진 모래알 숫자를 세어보는 수고를 자청하곤 하는데, 의미 없는 행위가 현재의 처지와 어울린다는 식의 철학적 자조보다도 그런 무심함에 젖어들거나 하릴없이 신경을 쏟는 행위만이 해체되지 않는 근심을 흩어줄 것 같아서다.
어찌하여 자신의 세상이 이토록 한 순간에 삭막해졌는지를 고민할 시간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현재의 굶주림을 버텨내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문제다. 불행에 빠질 틈이 없는 것도 행복인 걸까. 시설에 거주하는 아이들의 얼굴은 늘 한결같았다. 실수라기보다 의도적으로 버려진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아버린 아이들. 귀환에 대한 희망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진 아이들. 그들의 표정은 대개 미래를 다 잃은 이의 그 무엇이어서, 사막처럼 모든 감정이 메말라있다.
그들에게 신기루 같은 오아시스라도 존재할 수 있을까. 신기루를 쫓아 내달린 사막 여행자의 운명은 치미는 갈증과 희미해진 의식뿐. 사막에서 정신을 잃는 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안식처라고 굳게 믿었던 어떤 징조가 환상이었다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분명 일주일 치 물이 있을 줄 알았던 물병에 구멍이 나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순간의 허탈처럼 눈앞을 막막하게 할 때다. 한 번의 커다란 사건이 성급한 일반화를 거치는 데는 그가 가진 비합리성이 윤활유처럼 작용해서 이제는 먼발치에서 희망 비슷한 것이 보여도 스스로의 눈을 의심할 뿐 진심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그런 신기루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희망고문을 덜어주는 것이어서, 그런 미끼를 함부로 던져주는 행위는 의도와 관계없이 참된 조력이라기보다는 낚시꾼의 횡포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에 가깝다.
과로
"이젠 그렇게 한 번 지치면 회복이 더뎌서 다음 날이고 그다음 날이고 피로가 가시지 않는 걸. 과로나 무리도 어지간할 때나 할 수 있는 거지 눈이 터질 것 같고 머리는 움직일 생각도 않는데 시간은 이제 겨우 점심을 막 지난 시점이라면 그 막막함을 어찌 버틸까. 하루 이틀이야 어찌어찌 이를 갈며 버텨내겠지. 근데 그거 일주일, 한 달, 두 달, 끊어질 기미가 안 보이면 소복소복 쌓인 절망 같은 것들이 한순간에 삶을 걷어차버리는 거거든. 그러니까 너 힘든 거 함부로 무시하고 버티면 안 된다? 중앙선 함부로 넘지 말고 커브길에서 액셀 밟지 마. 지금 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느려 터진 똥 차 한 대가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네 남은 수명을 지켜주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젠장. 근데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냐고...!' 눈앞을 가린 서류더미는 언제 이걸 다 살피고 정리할까 싶고, 호기롭게 가져다 둔 바인딩 기계는 온통 수작업 투성이로 용지의 위치를 조금만 실수해도 고리 구멍이 어긋나거나 간혹 용지 끝이 찢어지는 경우도 있어 자칫하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두터운 서류뭉치 중 실수한 위치가 몇 쪽인지 찾아서 다시 출력하는 수고 따위를 햄버거 세트 옵션 변경하듯 손쉽게 추가해버리니 그런 여파를 고려하면 단순작업이라고 하기엔 분위기나 집중 정도가 살얼음판인데, 시시때때로 흐려지는 제정신은 졸음과의 치열한 사투로 이미 그로기 직전이다.
좀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진도에, 이깟 서류 작업 따위 하고 하찮게 보아오던 타인의 수고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고, 그저 수고했다 라는 도매급 인사 따위로 그들의 수고를 후려쳤던 것에 대한 반성이 고개를 든다. 이래서 직접 해보기 전에는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고 했던가 싶기도 하고, 세상 일 쉬운 거 하나 없다는 흔한 말의 진면목을 제대로 짚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동안 잡스럽다 치부했던 노동의 실제 질량을 깨닫는 통찰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고 해도 현실에는 마법이 적용되지 않아서 커피나 에너지 음료 따위를 다발로 들이켜도 몸과 마음은 이미 절전모드 상태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 1시를 가리키는데 종착지는 여전히 멀기만 하고, 결승점에 도착하더라도 과연 휴식이나 편안과 같은 안락한 단어가 나를 찾아와 줄까 싶은 게, 어떻게든 더 많은 시간이 낭비되기 전에 일을 끝마치고 꿀 같은 회복기를 쟁취해야 한다는 당장의 초조가 그녀를 더욱 괴롭힌다.
밤 10시가 넘은 시점에 두 손으로 들어 옮기기도 버거운 서류뭉치가 가득 담긴 박스를 가리키며 "정리 좀 해놔 아침에 봐야 하니까"하는 말 같지 않은 지시를 던지고 사라진 상사의 뒤통수를 생각하면 손에 잡히는 무언가라도 집어던지고 싶지만 그래 봐야 치울 것만 늘어나는 것 같고, 그런 갑질스런 행위가 이루어질 당시에 변변한 저항조차 해보지 못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죄 없는 물건에 화풀이를 하는 건 더더욱 의미 없다는 자조와 함께, 이제 막 때려던 엉덩이를 마치 잠깐 옷매무새나 고치려고 일어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루 온종일 앉아있어서 이제는 눅눅한 기운이 맴도는 의자 시트에 다시 붙이며 불만 따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네 걱정 마세요. 잘 정리해 두겠습니다." 하고 웃음 지었던 자신의 반응이 떠오르며 방향 잃은 노여움이 치민다.
분노의 번지수가 한참 잘못되었다는 사려 깊은 판단보다도 내가 어쩌다 과거 당연스럽게 불의라 내질렀던 어떤 행위들에 대하여 사소한 반박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하는 책망이 그녀의 깊은 한숨을 타고 흘러나온다. 그게 잔혹한 현실이라는 걸 깨달아서일까? 일자리라는 것이 한 사람의 가치관을 좌지우지할 만큼 치명적인 삶의 그 무엇이 되어서? 눈앞의 상대가 나를 마른걸레 짜듯 쥐어짜려고 마음먹으면 이보다 훨씬 더 괴로워질지 모른다는 사회 선배들의 괴담에 기초한 공포 때문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잡생각만큼이나 바삐 움직이는 그녀의 초조한 손짓은 어쩌면 내일-이제는 오늘이 된-아침 보란 듯이 정리해서 내밀고자 했던 당찬 계획이 무산될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불안 때문일지도 몰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