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서류더미로부터 고개를 들었을 때 뼈마디에서 오래된 마룻바닥 밟는 소리가 났다. 관절마다 뜨거운 기운이 열꽃처럼 피어났다. 아픈 눈을 달래기 위해 잠시 세상을 닫았다가 여는데 가장 먼저 벽시계가 눈에 박혔다. 순간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나도 모르게 하품을 했던가 싶다가도 입을 벌린 기억은 없어서, 슬픔은 아닐텐데 하면서도 어느새 차오른 눈물은 뭘까. 혹사당한 몸으로 여지없이 밝아올 긴 하루를 버틸 생각을 하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자신에게 그런 일탈을 실행할 만용에 가까운 용기가 없음을 능히 알고 있으면서도 구멍 난 풍선 같은 마음에 바람을 불어 보는 이유는 뭘까.
버틸 수 없음을 인정할 때 포기는 절망이 된다. 커다란 행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소소한 절망이라면 그마저도 나름의 위안일 텐데. 욕심이 지나쳤던 걸까. 이제는 우울이 늑대 무리처럼 몰려와 영혼을 물어뜯는 느낌이다. 일보다는 삶 그 자체가 고역이고 일터에는 퇴근이 있지만 삶은 언제나 근무 중이다. 퇴근 수단을 강구해보자면 떠오르는 것은 생에 대한 마지막 자기 의사결정권이 있을 뿐. 하지만 자신의 삶을 자유나 의지 따위로 임의 종결지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소극적 자유 오남용에 대한 상상이 현재의 그녀에게 사이다 같은 위로나 해방감 따위를 제공할 수 있을까.
결국 꽃은 시들고 마는 걸까. 한강에 몸을 던진 사람들이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렇게 공감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으니 멈춰있던 시간이 지구 탈출 속도로 날아간다. 퇴근은 이미 그른 것 같고 자칫하면 출근도 어려울 시간이니 잠시 의자를 뒤로 젖히고 무거운 머리를 기댈 밖에. 그때 사무실 불이 탁 하고 켜지며 그녀의 마지막 소망에 홈런을 날려버린다. 아직은 다시 대면할 마음의 준비가 안된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치고, 미친놈은 잠이 없다고 했던가. 저 상사는 아침 차려줄 가족도 없나.
들으라는 듯 가방을 탁 하고 소리 나게 내려놓은 그는 그녀의 감각세포로 모종의 전기가 이미 흘렀음을 안다는 듯이 "다 됐냐?"하고 말을 허공에 던진다. 공중을 맴도는 말은 붙들지 않으면 그만인데 무의식적으로 "네" 하고 대답해버린 스스로에 대한 한탄을 곱씹을 새도 없이 "가져와 봐" 하는 소리에 급히 후회를 삼킨다. 순간 저는 사지가 잘렸나 하며 속으로 씩씩거리면서도 이미 몸은 반사적으로 분류된 서류뭉치들을 챙기는 중이다. 내가 똥개도 아니고 하면서 자아정체성에 대한 답 없는 물음을 던지다가도 그만두면 또 어디로 가겠어하며 이건 복종이 아니라 타협이라고 상황을 정돈해보려는 관성적 대처에 소름이 돋는다.
"여기 내려두고 가"하는 상사의 머리에 상자를 거꾸로 엎고 싶은 욕망을 뒤로하고 그의 책상 옆의 공간을 적절히 확인한 후 지나다니다 발에 치이지 않을 위치에 세심한 손길로 서류더미를 내려두고 돌아온 그녀가 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는데 머릿속의 샘물에 바닥이 드러난 것 같고 양쪽에서 종을 쳐대는 느낌과 함께 호흡이 메마르고 고르지 못한 것이 벌써 다 썼나 싶어 이름도 써 있지 않은 알약 하나를 털어 넣는다.
알약 복용이 그녀에게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은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알약 복용을 챙기는 엄마를 보며 반드시 지켜야만 하나보다 했고 정체도 모를 알약을 모두가 으레 당연하게 복용하는 모습을 보며 따라 하는 게 이롭겠다 했던 게 사실이었다. 머리가 큰 후에는 알약 복용에 대한 의구심이나 호기심으로 보도자료에 적시된 내용들 간의 인과관계를 되짚어본 적도 있었지만 알약을 복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어떤 고장이 초래되는 것은 공통적인 증상이었고 그러한 흐름을 적절히 끊지 못한 경우 돌연사나 의문사로 이어진다는 분석에는 특별히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삶을 지탱하는데 필수적인 무언가가 이 알약에 들어있다' 정도의 러프한 결론을 받아들인 후 그녀가 경험적으로 터득한 새로운 단서는 이 알약이 제공하는 무언가는 용량이 정해져 있어서 유달리 힘든 하루를 보내거나 감정 소모가 큰 경우 알약 복용 시기를 알려주는 어떤 '느낌'과 '징후'가 다른 날보다 더 빠른 시점에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그날의 경험은 분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지정된 시간에만 알약을 복용하는 줄 알았던 그녀는 어떤 위험징후를 감지했음에도 참고 버티기 위해 애썼고, 이제 예정된 복용시간이 되어 그녀가 알약을 복용하려고 했을 때 생각과 행동이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 느낌을 받았고 머리에서 보낸 신호에 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장면이 마치 사진이나 정물화로 느껴졌고, 기분이나 감정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일제히 자신의 몸을 빠져나간 것처럼 속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손에 쥔 알약을 입으로 가져가는 대단찮은 동작이 해결 불가능의 난제로 느껴지고 꽤나 긴 시간을 홀로 멈춰있었음에도 상황에 대한 이질감이 없었다. 만약 그때 옆을 지나다가 전원선이 분리된 기계처럼 멈춘 그녀를 보고 상황을 짐작했던 누군가가 없었다면 그녀 역시 뉴스 보도에서 에둘러대던 흔해 빠진 사망자 중 한 명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주변인이 그녀의 입에 알약을 대신 털어 넣은 뒤에도 한참을 초점 없는 눈길로 자신의 빈 손바닥을 응시하던 그녀는 다시 잠깐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어떤 지배나 통제라고 부를만한 것을 되찾았으며 그 일을 겪은 후 그녀는 그런 '느낌'이 들면 주저 없이 알약을 털어 넣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