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 11편에서 이어집니다.
아이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노란색 하원 차량에 탑승하는 다른 친구들을. 그러곤 남은 친구의 수를 가늠한다. 늘 이 시간까지 남아있는 친구들의 얼굴은 가끔 새로운 멤버가 추가되거나 매일같이 보이던 친구가 간혹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대개 어떤 평균을 형성한다. 남은 아이들은 상황에 적절한 언어를 모르더라도 눈빛이나 표정, 손짓, 발짓으로 너도 오늘도 남았구나 하는 위로를 서로에게 건넨다. 아이는 노란색 스타렉스가 친구들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강은 안다. 기대에 부푼 친구들의 표정이 그들의 행선지를 말해준다. 그래, 집. '어린이'집 말고 엄마 아빠가 함께 머무는 '진짜' 집.
이내 아무렇지 않게 각자 어떤 놀이에 몰두하는 아이들. 그러나 남몰래 무언가를 기다리며 촉각을 곤두세운다. 층계를 오르내리는 선생님의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발자국 소리. 나무 재질의 계단 내부가 어떤 질량의 움직임에 미세한 탄성을 발하는 은근한 진동음. 실내화 밑창이 부드러운 카펫을 스치는 사락거리는 소리. 그런 소리의 혼합이 한 차례 다녀갈 때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불리었고, 그 친구는 세세한 설명 없이도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고 빠른 동작으로 이미 싸 둔 가방을 짊어졌으며, 득의만면한 얼굴로 다른 친구들의 눈을 굳이 한 번씩 맞춘 뒤 선생님을 앞장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하루'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머무는 그 방에서 귀가 순서는 종종 부모의 삶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비중을 상대 비교하는 마음의 척도가 되었고, 모두가 사라진 방에서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린 아이는 어쩐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묘한 분함과 억울함, 시기, 질투 등이 혼재된 짜증에 휩싸이고 만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으로 남은 두 아이가 은근히 서로를 경계하며 자신의 이름을 먼저 불러주길 하고 고대할 때, 비록 그 대상이 엄마나 아빠가 아닌 낯선 사람이었어도 '마지막 순서'를 면피하게 해 주었다는 반가움으로 덜컥 손을 잡고 따라나서고 말았는지도.
그녀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건 아직 들이닥치지 않아 존재를 모르는 고통의 쓰나미가 아니라 지나치게 밝은 형광등 불빛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어째서 자신이 이 낯선 장소에 누워있는지 이해하기를 거부했는데, 그것은 사고로 인한 충격의 여파라기보다는 쓰러지기 전의 어느 시점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에 대한 판단을 무작정 뒤로 미루고 싶은 욕구에서였다. 가급적이면 어떤 시점 이전에 자신이 정신을 잃은 것이었으면 하고 스스로도 정확히 지시할 수 없는 임의의 시간을 떠올렸는데, 그 지점은 불과 몇 시간 전이기도 했지만 1년도 더 지난 어느 자정 무렵이기도 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을 눈치챈 간호사를 필두로 몇 명의 하얀 가운을 걸친 다양한 연령대의 의사가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점검했으며, 그녀를 후송한 짙은 오렌지색의 구급요원이 몇 가지 사항을 확인하고 자리를 떠난 뒤, 마지막으로 곤란한지 귀찮은지 어쨌거나 짜증과 피로 따위가 잔뜩 묻은 표정의 경찰까지 다가와 이것저것을 묻고 나자 그녀는 '내가 왜 이곳에 누워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더 이상 붙들 수 없었다.
자신이 뒤 범퍼를 비롯한 트렁크와 스포일러 부위를 거의 아작 내다시피 한 스포츠카의 정체가 단지 남편이 의뢰한 이벤트 업체 차량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그녀는, 괜한 짓을 했다는 번거로움이나 수리비를 어떻게 감당할지에 대한 걱정, 신호대기 중인 차량의 뒤를 정면으로 들이받았기 때문에 과실비율이 10:0에 가까울 거라는 난처함이 가득한 보험사 직원의 설명보다도 먼저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이 의식의 창을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결론에 다다르지 못한 그녀의 '안도'는 사고 전화를 받고 급히 나타난 남편의 품에 안긴 막내 아이를 보며 실체화되었는데, 막상 막내 아이가 눈에 들어오자 반가움보다는 덜컥 눈물이 앞섰으며, 그간의 막막함이 숨통을 쥐어짜는 듯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이 찾아와 그녀의 품에는 겨우 재회한 막내 아이 대신 각종 의료기기와 산소호흡기 다발 따위가 먼저 안겨야만 했다.
제정신이 입구쯤까지 돌아오자 그녀는 왜 그런 짓을 했냐며 남편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는데, 남편은 그녀의 물음에 대강의 대답을 하며 달래는 한편 그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녀가 몇 차례 다시 혼절하는 등 안정을 되찾지 못하자 수액줄을 통해 신경안정제가 투여되었고 이내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아내의 피곤에 지친 얼굴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피곤할 시간이 되었는지 칭얼대기 시작한 막내 아이를 달래느라 시간이 그토록 지체된 줄 모르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난 아내의 다른 아이들은 집에 잘 도착했냐는 물음에 뒤늦게 큰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이제 둘째 아이의 어린이집과 통화를 하던 중 "뭐라고요?"하고 큰 소리를 내고 만다. 아차 싶은 마음에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잠시 곁을 떠나 짧지 않은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서 그녀는 이상한 기색을 눈치챈다.
"왜? 세진이한테 무슨 일 있대?" 남편은 아직 상황판단이 덜 된 얼굴로 전해 들은 소식을 더듬더듬 꺼낸다. "세진이 벌써 집에 갔다는데... 혹시 자기가 누구 대신 보냈어?" 그랬을 리가... 내가 오늘 그럴 정신이 있었나...? 하는 말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녀는 오늘 자신의 하루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있다는 사실에 기반해 더듬거리며 기억을 되짚어본다. 제발 뭐 하나라도 손에 잡히길 바라며 기억의 밑바닥을 이 잡듯이 훑어보았지만 애초에 없었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을 리 없고, 어떤 불길한 상상을 억누르기 위해 다른 가능성에 집착해보려는 그녀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해지고 곧 이 세계와의 단절을 부를 의식의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결국 영혼이 사라진 몇 개의 언어. "아니. 나... 아무한테도 그런 부탁한 적 없어." "그럼 대체 세진이는 누가...?" 불길한 그림의 조각들이 서서히 아귀가 맞아 들어가며 눌러둔 실체가 탁 하고 상자 밖으로 튀어 오르지만 차마 문장을 끝맺음하지 못한 채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서로 바라본다. 누가 이 어처구니없는 순간에 대한 해답을 내려주길 바라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