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34

이별

by 작가 전우형

* 33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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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한가운데 사람들이 모여 웅성이고 있다. 소명은 걷는다. 그들의 어깨너머로 바스러진 차량의 잔해가 얼핏 보인다. 소명은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다가선다. 부서진 유리조각이 붉은 피로 물들어있다. 한 사람의 손이 보인다. 소명은 그 손을 집어든다. 지나치게 가볍고 차갑다. 한 사람의 손이 이토록 무생물 같을 수 있을까. 소명은 그 손바닥을 자신의 볼에 갖다 댄다. 진득한 핏물이 그녀의 턱선을 타고 흐른다. 그 피는 곧 검붉은 조각으로 말라붙는다.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힘을 주어 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팔이 떨어져 나온다. 덜렁거리는 팔을 얼굴에 붙인 채로 소명은 뒷걸음질 친다. 그런데 따뜻하다. 분명 차갑게 식은 손이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따뜻하다.


분쇄된 원두가루에서 고소한 참기름 향이 퍼져 나왔다. 소장은 끓는 물을 드립포트에 붓고 온도를 확인한다. 흩뿌리듯 뜨거운 물을 부어 분쇄된 원두가루를 적신 뒤 시계를 본다.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며 소장은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살짝 다신다. 드립포트를 살짝 기울인다. 곧은 물줄기가 떨어지며 부풀어있던 원두가루가 심장처럼 펄떡이며 서서히 가라앉는다. 방울방울 떨어지던 검고도 진한 커피는 조금은 굵어졌지만 여전히 가느다란 흐름을 끊어질 듯 이어나가며 서보를 채운다. 알람이 울리고, 그는 드립포트를 내려놓으며 참았던 숨을 푸 하고 내쉬며 코로 한 번 크게 들 이마 쉰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화살처럼 내리쬐고 있었다. 소장은 그 빛줄기에 서보를 이리저리 기울이기도 하고 가볍게 흔들어보기도 하며 커피의 색과 투명도를 확인한다. 신중한 손길로 잔의 1/3 가량 원액을 따른 후 살짝 기울여 입술을 축인다. 커피를 머금고 입을 오물거리다가 가끔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긴 소장의 모습은 흡사 유물 감정사의 그것처럼 신중하고 진지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과장되어있다. 커피잔에 온수를 부어 원액을 희석한 그는 다시 맛을 확인하며 같은 과정을 몇 번 더 반복하다가 잔을 내려놓으며 무어라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소장은 커피를 즐겨마시는 편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솜씨 좋은 비서에게 커피를 부탁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직접 커피를 내려마시는 수고 따위를 하기보다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한 잔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을 것이다. 그가 커피를 내려마시기 시작한 건 비서에게서 커피를 내리는 과정이 복잡한 심사를 달래는데 제격이라는 권유에서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굳이 커피를 내리는 과정을 배운 대로 하나하나 집중해서 해보았지만 어질러진 마음을 정돈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지금 그를 고민에 빠트린 일은 커피 내리기 따위로 진정될 수준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그렇게라도 하면 모종의 마법이라도 펼쳐져 시간이 빨리 흐를까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보고는 더디기만 하다.

칩에 부착된 위치추적장치 덕분에 소장은 소명의 위치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든 소명을 되찾을 자신이 있었고 그래서 조박사가 소명을 연구소 밖으로 내보낼 때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소명의 회복을 부정적으로 내다봤다. 저항이 너무 심해서 상담도 치료도 어려웠다. 그러나 소장은 소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핏줄이었다. 딸아이에 이어 손녀딸까지 그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소장은 절박한 심정으로 소명을 보냈다. 피험자 데이터를 조작해 소명을 조박사의 프로토타입 테스터로 선발되도록 하는 것은 소장의 지위에서는 쉬운 일이었다. 보고된 대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두 사람이라면 소명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어떠한 변화든 그것이 치료의 시발점이 되길 원했다.


소장의 바람은 절반만 이루어졌다. 선명과 후는 소명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명은 두 사람과 함께하는 동안 몰랐던 인간의 따뜻함을 머리와 몸으로 느꼈다. 칩의 기능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흘러들어왔고 그들의 온기가 얼어붙어있던 소명의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움츠러든 마음에 빗장이 풀렸고, 빈 공터와 같았던 소명의 삶에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한 일들은 단지 소명의 치유 하나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소명은 두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소명은 그들을 떠날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편히 잠들었던 선명의 집에서의 첫날밤, 소명은 엄마의 뱃속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어색하지만 따스했던 하루. 사람의 숨결. 탯줄처럼 가늘지만 질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느낌. 소명에게 부재했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사소한 충만감 속에서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소명은 공허했다. '물건'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고 '용도'로 취급받는 아이에게 인간적인 대접은 사치였다. '기능'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시설 속에서 소명은 점차 자신을 잃어갔다. 소명은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려면 강해져야 했다. 사냥개가 되어도 좋았다. 어차피 매일 누군가는 죽어나간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되긴 싫었다. 죄책감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소명은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 대신 자신이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인간을 부품처럼 쓰는 공장으로 두 사람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소명은 치유되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소에서는 아니었다. 소장이 조금 더 사려 깊었다면 소명을 불러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조금 더 침착했다면 거대한 트럭으로 밀어버려도 소명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추론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조금 더 인간의 모습으로 손녀딸의 기억에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명은 눈을 뜬다. 조명이 밝다. 눈이 아프다. 다시 눈을 감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억에서 사라진 것인지 추측하기 어렵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선명 언니와 후와 함께 차를 타고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잠든 걸까? 시끄러운 기계음이 고막을 파고든다. 소리는 이곳이 천국이 아님을 알려준다. 천국이라면 기계 따윈 없겠지. 아니, 그것도 편견인가? 소명은 눈을 뜬다. 몸을 일으키려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내뱉고 만다. 작살로 꿰뚫는듯한 고통이 전신을 관통하는 탓에 온 몸에 힘이 빠질 정도다. 너무나 선명한 통증이 절망스럽다. 깨어났을 때 고통이 없으면 죽은 거라지.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 그녀는 다시 눈을 감는다.


소명은 그 손바닥이 자신의 것임을 알아차린다. 소명은 다시 걷는다. 검은색 테두리의 창문이 보인다. 그 속에서 누군가가 웃으며 소명을 향해 손을 흔든다. 소명은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까워지지 않는다. 손을 흔드는 모습이 아무리 달려가도 계속해서 멀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진다. 소리치고 싶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숨이 차오르고 그녀는 멈춰 선다. 소명은 다시 걷는다. 멀지 않은 곳에 후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후는 그녀를 보지 못한 듯 지나친다. 소명은 후의 어깨를 잡아채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멀어진다. 소명은 후를 따라 걷는다. 후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저 멀리 다시 검은 테두리의 창문이 보인다. 그 속에서 누군가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후는 그녀에게 화답하듯 손을 흔들며 달려간다. 후는 그녀에게 얼싸 안긴다. 문득 후가 뒤를 돌아본다. 분명 그의 눈동자는 소명을 직시하고 있다. 소명도 손을 흔들며 달려간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분명 두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다.


사진 속의 얼굴이 낯설다. 명이 언니의 웃음은 밝았다. 하지만 사진 속의 얼굴은 울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이 장례식장처럼. 소명은 후를 본다. 빈소 한쪽에 석상처럼 굳어있는 후는 소명을 흘끗 보고서도 반색하지 않는다. 그는 외롭고 또다시 혼자다. 뒤에 인기척이 느껴진다. 처음 보는 세 사람이 다가온다. 머리칼이 희끗하고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소명에게로 다가온다. 소명은 주춤하고 물러서고 만다. 남자는 그대로 소명을 지나쳐 상주와 목례를 한 뒤 분향하고 그 뒤를 따라 중년 여성이 헌화를 한다. 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빈소 내부로 퍼진다. 세 사람은 잠시 묵념한 뒤 절을 두 번 한다. 소명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본다. 머리가 희끗한 남자가 후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린다. 후는 아무 말 않는다. 중년 남녀가 그 뒤를 따른다. 후는 배웅하지 않는다. 그들 중 한 사람의 뒷모습이 소명의 눈에 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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