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하늘이 거뭇거뭇해지는가 싶더니 하얀 빗줄기가 한 획씩 그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일에도 온도차가 있는 걸까? 하룻밤 사이에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긴박한 알림음이 병실 내부를 울리고 잠들어있던 환자는 참을 수 없는 몸부림을 친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그 모든 것들이, 심지어는 그 몸부림마저도 어떤 저항에 직면한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너무 아파서, 그 고통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려는 몸부림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의 완벽한 단절을 눈앞에 둔 채로, 이제 자신의 내부에 남아있던 조악한 그 무엇만으로 마지막 수분, 수초를 견뎌야 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그런 세포 하나하나가 쪼그라들어가는 뒤틀림처럼 보였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돌아가는 상황, 그 절망과 혼돈에 대한 반작용. 문득 슬프다기보다 처연한 마음이 들었다. 몸을 비롯해 삶의 모든 것들이 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죽음일 것이다.
간호사가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살핀다. 급히 의사를 부르고 그 의사가 간호사를 시켜 또 다른 의사'들'을 불러 모을 때까지 상황은 숨 가쁘지만 침착하게 돌아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오갔고 이런저런 기구들이 동원되었다. 때때로 어떤 행위는 그 행위의 목적이 달성될 것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의무감을 충족하기 위해서이거나 단지 그렇게 하도록 정해져 있거나 혹은 스스로의 죄책감이나 다른 누군가의 책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루어지는데,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은 후자처럼 느껴졌다. 양손을 포개어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를 다급하면서도 성실한 손길로 꾹꾹 눌러대는 동작과 가로로 이어진 긴 실선에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는 모니터를 바라보는 구슬땀 맺힌 속눈썹 아래로 가끔 깜박이면서도 한 곳만을 의연히 직시하는 그 눈동자에 묻은 냉철함 사이의 간극이 그것을 알려주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이미 모든 걸 포기한듯한 그 눈빛은 서로가 서로를 보며 시선을 교환하고, 가슴을 누르던 손길에 조금씩 힘이 빠지고 느려지며, 결국 그 작은 모니터의 실선처럼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는 환자의 축 늘어진 손끝을 바라보는 식으로 한 생명의 종언을 결정짓는다.
후는 시선을 돌려 다른 병상에 누운 한 남자를 본다. 얼굴이 눈에 익은 그 남자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하나뿐인 누나가 죽어가는데도 편하게 누운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어색하다. 아니, 어색해야만 한다. 후는 그 평온한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다. 그 얼굴을 움켜잡고 일그러트리며 소리치고 싶다. 어째서 일어나 울부짖지 않는 거야. 죽어가는 누나의 메마른 손조차 잡아주지 못했던 거야. 그럴 거면 죽어. 제발 죽어. 지금 죽어. 깨어나지 마. 그냥. 이대로. 죽어.
후는 비스듬히 누운 채로 눈을 뜬다. 누나의 웃는 얼굴이 보인다. 악몽을 꿨나 보네, 하고 누나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 준다. 그래,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다시 누나의 얼굴을 본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다.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순간 눈앞의 모습이 변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얼굴, 다른 분위기. 후의 눈동자가 떨린다. 그는 엎드려 오열한다. 소맷단을 말아 쥐고 그의 이마를 훔치던 소명이 흠칫 뒤로 물러선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경련하듯 떨리는 아직 크지 않은 그의 등판을 본다. 안아주고 싶은데. 안아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그를 안아주는 것이 위로일지 그녀는 알 수 없다. 이제 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가 나를 필요로 하는지 내가 사라지길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장례만 치르게 해 주세요."
모든 것을 놓아버린 눈빛으로, 텅 빈 눈동자로 후는 말한다.
"장례만 치르고 나면..."
여기까지 말한 후는 한차례 숨을 씹어 삼킨다.
"... 군말 없이 당신들을 따라갈게요."
"그래서, 정말 그 사람들을 따라갈 거야?"
후는 소명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분명 그는 무어라 말하고 있지만.
"가야지."
그의 가슴에는 둥그스름한 도자기 형태의 유골함이 들려있다.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내가 할아버지께."
"아니."
단호하다. 이번에야말로 후는 소명의 말에 대답한다.
"아니, 아무것도 하지 마. 아무것도. 나에 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추측하지도 마. 알겠어? 대답해 어서!"
그 서슬 퍼런 으르렁거림에 소명은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침묵이 흐른다.
"미안해."
후는 뒤돌아 그들에게로 향한다. 소명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지만 그 손길은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린 것처럼 중간에 멈춰 서고 만다. 후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그녀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작은 기대감이 서린다. 후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왜..."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탓에 소명은 한걸음 다가선다.
"뭐라고? 후야, 잘 안 들려."
후는 뒤돌아선다. 그리곤 다시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걸어간다. 조박사가 그를 조수석에 태우고 출발한다. 제복 차림의 요원이 그녀에게 다가선다. 그녀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요원의 뒤를 따른다. 곧 그녀가 탄 차도 그림자가 되어 사라진다.
'왜 누나가 죽었어야 했지?'
후는 달려가는 차 안에서 생각한다. 왜 누나는 죽어야만 했을까? 소명이 우리를 찾아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그 연구소로 제 발로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그저 누나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죽음을 당해야만 할 처지였기 때문일까. 후는 조박사에게 말한다.
"부탁이 있어요."
그는 조수석 쪽으로 흘깃 눈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말해."
"그 가상현실인가 하는 거 말이에요. 제가 들어갈게요. 몇 가지만 제가 원하는 데로 해주세요. 그 안에 또 다른 저와 소명이를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그가 소명이를 볼 수 없도록 설정해주세요. 가능한가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원하는 건 그게 다니?"
"아뇨. 하나 더 있어요. 지난 모든 기억을 지워주세요.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가능은 할 것 같다만. 한번 노력해보마."
후는 더 이상 말을 않는다. 조박사는 운전하는 중에도 슬쩍 한 번씩 그를 향해 눈길을 던진다. 후는 그저 창밖을 내다볼 뿐이다. 나무며 인도며 건물 따위가 빠른 속도로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