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있었어

공지사항에 있어서

by 작가 전우형

초승달처럼 희미하지만 밝은 눈이 말했다.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요즘 아이들은 참 빠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더니 벌써 연애의 시작이었다. 8살 아이에게서 수줍게 터져 나온 '사귄다'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사용하는 단어의 수준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걸 보면 가끔 놀라곤 한다. 이제는 어른과 아이의 언어 사이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는 것 같다. 개학 직후 몰려온 코로나로 온 가족이 함께 격리되었던 아이다. 7일간의 격리를 마치고 등교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나 흘렀을까? 그렇게 여자 친구를 만드는데 7일. 조금 멋지다.

"뽀뽀는 했어?"

"코로나가 심각한데 뽀뽀를 어떻게 해!"

나는 웃고 말았다. 놀리려다 되치기를 제대로 당한 꼴이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뭐야? 그럼 사귄 것도 아니잖아?"

"아냐. 진짜야. 손도 잡고 그랬어!"

"코로나가 심각한데 손은 잡아도 돼?"

"그래서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서 양 끝을 잡았지."

나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역시 요즘 애들은 멋지다. 그나저나. '요즘' 애들이란 건 내가 옛날 사람이라는 건가? 그렇게 웃었던 게 3월 중순 경이다.


오늘은 조금 다른 표정이다. 오후 다섯 시. 피곤할 만도 하지. 그나마 이 아이들이 학교에 잘 적응하는 건 쌍둥이인 데다 연년생 동생이 같은 학교 병설 유치원에 다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피곤함과는 조금 다른 색깔의 실망감. 신이 나서 떠들던 아이의 말수가 줄었다. 무슨 일인 걸까.

"많이 피곤한가 보네. 안색이 별로다."

"여자 친구랑 헤어져서 그래."

헤어졌다고?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분명 사귄다고 했었지. 그게 헤어진다고 훗날 말할 정도의 사귐이었구나. 아이는 비교적 담담한 얼굴이었다.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았지만 분명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계획이 있었어."

"..."

"4월쯤엔 헤어지기로 했었거든."

나는 아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이도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거니는 나이 어린 커플을 떠올렸다. 두 아이가 나뭇가지를 사이에 두고 함께 걷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헤어졌다고 말하는 지금, 그 아이의 눈을 다시 본다. 그 계획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리고 언제 만들어졌을까? 문득 "우리 이제 헤어졌다?"라고 말하는 한 아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놀란 듯한 다른 눈동자. 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는 미묘한 봄바람. 그리고 어린 자존심. "그래. 우리 4월엔 헤어지기로 했었잖아. 안녕!" 운동장 바닥에 나동그라진 나뭇가지. 멀어지는 그림자. 하지만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교실에서 만나 손을 흔들겠지. 전날 밤 누군가는 엄마에게 안겨 이 사실을 자뭇 진지한 어투로 털어놓았겠지. 아니면 아빠이거나.


그 아이가 말한 '계획'이라는 단어가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아이의 표정도. 표정에는 사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다만 그토록 담담한 얼굴로. 평소의 웃음기가 잦아든 전에 없던 침착한 얼굴로. 우린 4월쯤에 헤어지기로 했다고 말하는 그 아이의 속내가 신경 쓰였다. 분명 아무렇지 않겠지만, 또 막상 그렇게 아무렇지 않지만은 않을 여덟 살의 작은 가슴이. 표현할 수 없는 그 표정과 오후 다섯 시를 조금 넘긴 봄날 해 질 녘의 기다란 빛줄기가 만든 그림자와 그때의 실내를 떠돌던 수많은 단어들 사이에서도 유독 귀에 박힌 '계획이 있었어'라는 그 아이의 말이. 이제 막 학교를 가서 친구를 만나고, 더 친해지고 덜 친해지는 관계들 속에서 꽃잎처럼 피어나고 또 떨어질 아이의 성장이. 그 아이는 새로운 친구에게도 '사귄다'는 말을 쓰게 될까? 그리고 언젠가 "내겐 계획이 있었어!"라고 같은 얼굴로 말하게 될까? 궁금한 미래는 공백으로 남겨두기로. 다만 그날과 비교하기 위한 과거를 살포시 접어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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