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의 장례식

망고, 너마저

by 작가 전우형

아이는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얼마나 오래, 그리고 많이 담아두었던 건지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초여름 장맛비처럼 그칠 줄 몰랐다. 아이를 달래던 엄마의 눈에도 물기가 서렸다. 나는 웃고 말았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 관성처럼 씩. 분명 웃으면 안 될 상황인데 나도 모르게. 바나나는 사흘 전 아이가 데려온 작고 노란 관상용 물고기의 이름이었다.


바나나의 장례는 꽤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장지는 길 건너 버드나무 아래가 선정되었다. 버드나무는 물가를 좋아하고 버드나무 잎의 얇고 긴 모양새가 바나나를 닮았다. 더군다나 그 버드나무는 옆에 기운 센 느티나무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인지 좀처럼 어깨를 펴지 못했고 따스한 봄이 찾아왔음에도 옷을 바꿔 입지 못했다. 그 모든 것들이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어항에서 죽어간 작은 물고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엄마의 설명은 퍽 설득력이 있었고 아이의 고개는 절로 끄덕여졌다. 그 버드나무는 카페에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길 한 번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나무였으나 분명 그런 거리상의 이점이 장지 선정의 주된 고려요소는 아닐 거라고 나 또한 굳게 믿었다. 두 사람은 작은 구덩이를 파고 움직임을 완전히 멈춘 바나나를 묻어주었고, 그 주변을 새로 뜬 깨끗한 물로 적셔주었다. 그것은 마치 입관 전 깨끗하게 정리한 시신에 새 옷을 입히고 염을 하듯 먹먹한 슬픔을 누르며 진행되었다. 통곡이 밀려들기 직전의 정조기처럼, 말 많던 아이도 고요해졌다. 바나나를 다시 흙으로 덮어줄지 아니면 나뭇잎 같은 것들로 가려줄지 잠시 의견이 엇갈렸으나 최종적으로는 근처에 떨어져 있던 마침 딱 적당한 크기의 버드나무 껍질이 관 뚜껑을 대신하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되었다. 아이는 전에 없던 침착함과 성의 있는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장례 절차가 마무리되고, 바람에 흔들리던 촛불이 비로소 연기만을 남기고 완전히 사그라들었 때 아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 뚝 흘리기 시작했다.


장례는 물론 슬픈 일이었다. 그 행위가 가진 의미를 모르는 아이에게도, 대상이 비록 반나절밖에 함께하지 못한 작은 관상용 물고기일지라도. 아이는 바나나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무언가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 그것은 가슴에 둥지를 튼다. 그리고 이름을 더 이상 부를 수 없을 때 재가 되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자국만은 남아, 마치 감각이상이라도 온 것처럼 은근히, 오래도록 아리다. 고통을 상쇄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떠난 이의 이름을 충분히 부르짖는 것. 불러주지 못한 만큼. 불러주었어야 할 만큼. 그만큼 애타게 이름을 부르다 보면 이름은 비로소 마음에서 깨끗이 떨어져 나간다. 아이는 마치 그것을 미리 경험이라도 해본 것처럼 바나나를 부르며 통곡했다. 아이 엄마의 기억 속 할머니의 마지막처럼. 그의 할머니도 저토록 슬픈 목소리로 곡을 했다고 한다. 먼저 떠나버린 바깥양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한 여자아이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머물고 있었고 그 아이에게도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은 '망고'. 하나는 초록색, 다른 하나는 파란색 지붕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아이는 각자 자기 물고기를 소개하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바나나'와 '망고'가 사는 작은 어항은 카페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다음 날은 어린이날이었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은 카페 앞을 지날 일도 없었다. 아이들은 물론 바나나와 망고에게 밥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관심이란 대상을 수시로 갈아타기 마련이었(어른도 별반 다를 건 없지만), 당장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작은 관상용 물고기에게 관심을 유지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나름 행위의 필요성을 얇은 끈으로 붙잡고 있었더라도 실천할 수단이 없었거나. 이유야 어찌 되었든 바나나와 망고는 해가 지면 아무도 없는 어두 컴컴하고 오후 잠깐밖에 해가 들지 않는 카페에 이틀 동안 남겨졌다. 설상가상으로 물고기들을 챙겨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카페지기는 멍한 표정으로 창밖만 내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타 생명체에게 관심이 없었으며, 설령 있었다 해도 천성적으로 먹을 것에 관심이 없어서 자신이 배고프지 않으면 자기 애들 밥 차리는 일도 등한시할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위인이었다. 어쩌면 쟤네들 밥은 줘야 안 죽을 텐데... 하고 패악한 생각을 잠깐 떠올려보았을지 모르나 결국 잘못된 사료는 독이 될지 모른다는 핑계로 포기하였음이 분명했다. 아무튼 그렇게 바나나와 망고의 곁에는 결국 아무도 없었다.


멋진 어린이날을 보낸 두 아이는 다음 날, 그러니까 바나나와 망고가 방치된 지 만 이틀이 지났을 때쯤 느지막하게 카페에 나타났다. 일단의 움직임이 오갔고 장내는 조금씩 소란스러워졌다(카페지기는 그 소란이 분명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나 묵묵히 침묵을 지켰음이 틀림없고). 남자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초록색 지붕의 플라스틱 어항을 들고 길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부터 희미하면서도 명확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반면, 망고는 그때까지 여전히 살아있었다. 심지어 새끼로 보이는 작은 물고기 한 마리도 함께였다. 함께 두면 잡아먹힐지 모른다며 새끼 물고기를 다른 어항으로 옮기던 중 아이 엄마의 얕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일단의 소란이 추가된 후에, 결국 여자아이도 같은 모양으로 고개를 숙인 채 엄마의 손을 잡고 파란색 지붕의 플라스틱 어항과 함께 길 건너 버드나무 아래로 갔다. 마치 요단강을 건넌 듯 길을 한 번 건너간 물고기들은 다시 카페로 돌아오지 못했다. 다만 여자 아이는 보란 듯이 씩씩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나나의 이름을 통곡하듯 외치던 남자아이와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이름은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만의 독특한 의식이다. 그리고 가슴에서 떨어져 나간 이름을 애도하는 방식 또한 개별적 특수성을 띤다. 그래서 그저 수많은 '물고기' 중 하나일 뿐이었던 '바나나'는 아이에게 이제 유일한 물고기가 되었다. 물론, 아이는 그저 노란 물고기를 보고 바나나를 떠올렸을 뿐이고, 물고기에게 이름을 붙여주라는 선생님의 주문에 "넌 지금부터 바나나야!" 하고 말한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의미를 모르고 한 행동이라고 해서 완벽한 무효가 되는 건 아니니까. 아이는 어쩌면 장난스레 이름 붙인 한 생명체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자신의 행동과 선택의 무게를 어렴풋하게나마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라 투하 버튼을 눌렀던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의 B29 폭격기 조종사처럼. 폴 티베츠 중령이 자신이 떨어트리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건 몰랐건, 그 행동의 여파를 예상했건 예상하지 못했건 그의 행동은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행동의 주체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진다. 그 행동이 자신의 순수한 의지나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었다고 해도. 아이는 앞으로 자신이 이름 붙인 생명체를 보살피는 일에 더 관심을 쏟을지 모를 일이다. 후일담에 따르면, 두 아이는 바나나와 망고를 위해 다음 날에도 작은 초에 불을 붙였고, 잠자리에서 두런두런 바나나와 망고의 사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리고 버드나무 아래를 지날 때면 잠시 고개를 숙이곤 한다고. 그럼 거기서 나무가 올라오면 바나나 나무나 망고 나무가 되겠네? 하고 실없는 말을 내뱉는 카페지기를 아랫사람 보듯 흘겨보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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