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인가, 눈을 감으면 그녀가 보였다.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꿈어서 깨어났을 때뿐이다. 인간은 현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꿈에 기대는 걸지도 모른다. 꿈속에서 나는 금강 둔치를 걷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에서. 선명하게.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나 때때로 꿈은 현실보다 더 직설적이고 생동한다.
“이렇게 기대고 있으면 심장이 말을 걸어와요. 그는 온 힘을 다해 현재를 밀어내고 있어요. 그러지 않고서는 1분도 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 성실함에 기대고 있으면 세상은 온통 새하얘져요. 지나온 길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요. 하지만... 없어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아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걸까요? 얼마나 오래전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걸까요? 얼마나 춥고 외로웠을까요.”
따뜻한 기운이 가슴에 닿았다. 압박은 분명하고 선명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어요. 어디에 있든 우린 같은 시간을 살아갈 거예요.”
그녀의 손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사위는 침묵에 잠겼다. 그녀의 호흡이 살갗을 스쳤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풍경.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욱 괴로운 건 꿈이었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
알람이 귀를 두드렸다. 나는 로스팅실 문을 열었다. 캐러멜 빛이 완연한 생두들이 투닥거렸다. 그들은 배고픈 일곱 살처럼, 형제간의 경쟁구도에 위기감을 잔뜩 느낀 막내처럼 공격적으로 자신의 욕구와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아우성을 지켜보면서 온도와 색을 확인했다. 레버를 열면 숨 가쁜 연기와 함께 잘 익은 원두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스켓을 냉각기에 올려두고 다음 재물을 투입한 뒤 문을 닫았다. 모든 사나운 소음들이 한꺼번에 멀어졌다.
그녀와 나의 거리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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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하고 질서 정연한 움직임들이 나를 지나 공간의 저편으로 서서히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완벽한 멈춤’을 느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나는 온몸을 휘감는 한기에 부르르 떨어야 했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걸 느낀다는 말은 이상하다. 내가 무언가를 느낀다는 건 그 속에서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니까.
우주는 관성으로 움직이고 운동은 일단 시작되면 에너지가 감소되지 않는다. 우주는 완벽히 빈 공간이고, 그곳을 유영하는 물체들의 저항은 ‘0’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우주의 빛, 무한하고, 무수하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먼 곳에서 시간을 거슬러 날아드는 빛, 그중 일부만을 간헐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핵심은 ‘소리’다. 공간이 우주로 변하지 않는 한 미세한 소리는 남는다. 눈을 감았을 때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빛은 저장될 수 없고 차단되는 순간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 세상은 빛이 차단된 세상의 다른 이름이다. 때때로 보이지 않을 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세상은 ‘없다’. 정말로 그렇다면 나조차도 존재할 수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주체를 상실했으므로 성립이 불가능하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내부를 보고 서서히 눈꺼풀 너머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얇은 막을 투과한 어슴푸레한 빛무리를 느낀다. 해가 뜨면 잠에서 깨는 것처럼, 눈을 감아도 세상은 움직인다. 하지만 나는 완벽한 멈춤을 느꼈다. 세상과 시간이 완전히 멈춘 것처럼.
그때도 그랬다. 나는 희영을 만날 때마다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내가 완전히 멈춘 것을 알았다. 눈빛이 하나의 점에 수렴할 때까지 나는 눈동자를 움직일 수 없었다. 곧 절대 0도에 도달한 것처럼 호흡이 얼어붙었고 심장은 두근거림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뛰었다.
찰나의 침묵 속에서 금강은 유유히 흐르고 억수같이 내렸다. 그녀의 눈물이 작은 새처럼 날아들었다. 작고 하얀 새가 어깨에 앉았을 때 빨리 감기 하듯 세상은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신비한 빛의 흐름이 그 날갯짓을 따라 길을 만들었다. 밧줄처럼 희고도 분명한 질감이 나를 휘감아 왔다. 손에 잡히지 않는, 그 하얗고 투명한 선은 다름 아닌 소리였다. 내가 피아노 연주가 들리던 집을 떠올린 건 그 순간의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