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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의 예술상점 Nov 28. 2024

06. 상실 II

서커스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네 앞에 펼쳐진 것은 네가 알던 서커스의 무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그것은 서커스도, 무대도 아니었다.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불빛을 발했고, 얽히고설킨 실 같은 구조물들이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낯선 관계인이 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너에게 두 개의 문을 가리켰다.


“너는 선택해야 한다. 진실을 따를 것인가, 환상을 지킬 것인가?”


첫 번째 문은 그녀가 지나갔던 길을 따라갈 기회를 의미했다. 그녀가 왜 떠났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진실에 도달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문은 돌아오지 못할 길을 암시하고 있었다.


두 번째 문은 무대를 다시 세우고 서커스를 재건할 기회를 제시했다.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떠나간 이들을 잊은 채 새로운 꿈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문은진 실을 외면한 채 환상에 머무는 선택임을 말없이 암시하고있었다.


너는 망설였다. 서커스는 너에게 무엇이었는가? 단순히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환상의 공간이었는가? 아니면 너와 그녀, 그리고 모두의 욕망과 한계를 드러내는 거대한 무대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너 역시 이 낯선 관계인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유라고 믿었던 모든 선택이이미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것은 아닐까?


결국 너의 손은 한 문을 향했다. 문이 열리고 너는 그 뒤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 선택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네가 서커스에 대한 모든 환상과 진실을 스스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몇 년 뒤, 서커스는 네 곁을 떠나 있었다. 무대의 불빛도 사라졌고, 단원들의 웃음도 희미해졌다. 하지만 서커스는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 새로운 무대 위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 서커스는 네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네가 남긴 흔적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넌 선택했지만 여전히 그 선택에 대하여 탐탁지 않았다. 문 뒤에 펼쳐진 세계는 너의 의지로 열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 과정에서 느낀 감각은 마치 연극의 배우처럼 이미 정해진 대사를 읊은 기분이었다. 너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나는 낯선 관계인에 의해 선택당해야 하는 존재로서 삶을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깨달았다. 어쩌면 모든 삶이란, 이미 짜인 무대 위에서 스스로 주인공이라 믿으며 발버둥 치는서커스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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