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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Jul 03. 2022

_멋진 하루

: 다섯번째이야기




_Allegro


   "아빠 갔다 올게!"

   동그란 눈으로 끝까지 나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도랑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넨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일상임에도 익숙함보다는 늘 아쉬운 마음이 더 큰 순간이다. 그렇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면 어김없이 출근길이라는 타임어택이 시작된다. 


   지나가버린 버스의 뒷모습은 늘 원망스럽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여유를 잃어버린 체 버스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떠나간 버스에 대해 ‘내가 타야할 버스는 뒤에 있는데 내가 너무 빨리 왔구나’라는 법정스님의 지혜는 소용이 없다. 이미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은  세속인으로써 다른 건 몰라도 출근길의 버스만큼은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것이다. 

   봄날의 따스함을 노래하는 아침의 새소리도, 어젯밤 못 다한 이야기를 아침부터 재잘대는 여학생들의 소란함도 무심하게 지나치며 나는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버스 정류장을 가기위해 매번 지나치는 길목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청소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난새벽의 노곤함을 달래고 있었다. 연두빛 형광색의 강렬함에 이끌려 이 길을 지나갈 때면 나도 모르게 늘 그들을 관찰하게 된다. 대개는 담배를 태우거나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곤 하는데 오랜시간 모자에 눌려 있다가 이제야 튀어나온 삐죽빼죽한 잿빛 머리카락 아래에는 늘 밝은 얼굴이 있어 괜스레 나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러나 우연히도 오늘은 한 청소부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다. 지나치며 들었던 것이기에 많은 내용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고 딱 두 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파이팅! 사랑해!”


   이 말을 쓰면 많은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을 것 같지만 용기를 조금 내어 적어보자면 나는 파이팅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 이유는 좋게 말하면 보편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내게는 특히 후자에 가깝게 느껴질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게 ‘파이팅’이라고 외쳐주는 사람들의 진의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파이팅’이라는 말을 할 만한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진심으로 응원하고 힘을 주기위해서 이 표현을 쓰는 것이 맞는가라는 회의적인 의문이 들 때가 더러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좀 더 각각의 상황에 어울리는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면 시험을 보는 친구에게는 ‘너무 고민하지 말고 평소에 하던 데로 네 자신을 믿어보라’는 식의 말이거나 친구들과 볼링 한 게임을 할 때면 괜히 ‘야, 못해도 되니까 편하게 해’라고 하며 부담을 덜어주려고 한다.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살갑지 못한 내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파이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치 깊이 몰입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가슴을 울리는 진득한 진심이 전해졌다. 나는 수화기 너머에 어떤 상황이 펼쳐져있는지도 모르고 이 사람이 누구에게 그 말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    그러나 정황상 이 청소부는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전화기 너머에 있는 그 사람에게 달려가 같은 말을 전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잘것없고 누구나 살면서 수없이 들어봤을 말 한마디가 당사자에게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비견할 바 없는 든든한 기운을 북돋아 주는 순간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실시간 버스노선 시스템 덕택에 나는 누군가를 원망할 일없이 어제와 같은 버스를 제시간에 올라탈 수 있었다. 더욱이 오늘은 운이 좋게도 빈자리가 하나 있어서 편하게 앉아 갈수 있었다. 곧 버스가 출발했고 그렇게 출근길의 첫 번째 미션은 깔끔하게 성공한 듯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버스는 더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대부분이 마음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아마도 나도 그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나 싶었다.

   창밖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건물에 가려져 있는지 아직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여유를 천천히 되찾아가며 기분 좋게 하늘을 바라보다가 저 멀리 한가운데에 말갛게 떠있는 무언가가 아침달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매일 아침 저 자리에서 묵묵히 이곳을 비춰주고 있었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밤새 캄캄한 하늘을 밝히고도 여전히 지지 못한 달이었다.     




_Adagio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뒷모습>, Michel Tournier & Edouard Boudat  

   

   회사 근처에는 작은 공원이 있다. 나는 종종 점심을 간단히 먹은 뒤 공원으로 향하곤 한다. 물론 이곳을 오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작은 생활습관도 아니다. 그냥 어느 순간 왠지 이곳에 오고 싶을 때가 있다. 그 기분은 매우 충동적인 것이어서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나조차도 미리 알지 못한다. 그나마 이곳에 올 때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날씨가 좋아야한다는 것이다.     


   가로세로 길이가 100미터가 조금 넘어 보이는 정사각형 형태의 공원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공원의 북쪽으로는 독서실과 노인정이 인접해있고 서쪽으로는 차선이 없는 도로를 건너 초등학교와 고등학교가 나란히 위치해 있으며 남은 주변에는 기껏해야 4~5층 정도 되는 작은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주거지역을 이루고 있다. 그러다보니 노인정에서 나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과 공부를 하다가 잠시 쉬러 나온 학생들, 수업을 마치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어린이들과 잠시 산책하러 나온 동네 주민들까지 시간대에 따라서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 나타난다. 게다가 지도상으로 보면 이 공원은 대략 동네 가운데 즈음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공원을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동네를 왕래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곳을 지나다니게 된다. 나 역시 점심시간에 굳이 이곳을 찾아오지 않더라도 출퇴근을 하면서 하루에 적어도 두 번씩은 반드시 지나쳐야만 하는 곳이기에 이 공원을 찾는 것 자체가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길었던 겨울을 보내고 이 공원에도 봄의 따스한 볕이 비치었다. 앙상했던 나뭇가지들은 어느새 넘실거리는 푸른빛으로 가득했고 그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가로운 봄날의 끝에 선 어느 하루였다. 사무실에서는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 에어컨을 달래며 제법 뜨거워진 날씨로부터 벗어나려하고 있었다. 나는 에어컨 특유의 쾌적함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아직은 창밖의 따스한 온기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오전일과 시간이 지났다. 나는 간단히 점심식사를 마치고 문밖을 나서기로 했다. 오늘아침 집을 나설 때와 다름없이 파란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희끗하게 남아있던 아침 달은 이제 보이지 않았고 밝게 빛나는 태양아래 제법 뜨거워진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원을 향해 걸었다. 공원까지는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비어있는 벤치를 찾아서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왔고 마침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앉았다. 오전 내내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지금 이 순간 가장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는다. 근처 노인정에서 나오신 듯한 할머니가 보행 보조기를 밀며 천천히 내 앞을 지나가는 동안 오전수업이 끝난 초등학생들은 이곳을 놀이터삼아 여기저기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다. 그렇게 익숙했던 풍경을 아무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낯선 뒷모습을 하나 발견하였다. 건너편 잔디밭 한가운데에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유난히 곧게 뻗어있는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를 등받이 삼아 가만히 앉아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옆에는 아마도 그 남자가 벗어놓은 듯한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안쪽으로 구부러진 팔꿈치의 뒷모습을 보아하니 팔짱을 끼고 있는 듯 했다. 드문드문 자란 풀들 사이로 나무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탓에 두 다리는 편하게 앞으로 뻗었는지 아니면 아빠다리를 하고 있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평온한 단잠에 빠진 것은 확실해보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인근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작업자인 듯 했다. 몇 달 전부터 공원 바로 앞에 있던 교회가 철거를 마치고 신축공사를 시작했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오전일과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러 나오신 분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내가 가진 직업의 특성상 건설현장을 자주 방문하게 된다. 내가 담당하는 현장이 없다면 대개 하루 종일 사무실 안에서 시원한 에어컨바람과 함께 날씨와 상관없이 업무를 보겠지만 담당하는 현장이 있다면 한주에 1,2회 정도 건설현장에 나가게 된다. 그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디자인하고 납품한 도면이 실제로 잘 지어질수 있도록 현장을 관리·감독하는 일이다. 그러다보니 건설현장을 방문하더라도 밖에서 오랫동안 뭔가 노동을 한다기보다는 기껏해야 30분정도 현장을 살펴보는 일이 대부분이다. 이후 추가로 협의할 사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현장사무실이나 근처 카페 등의 쾌적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현장을 방문하게 되면 여러 작업자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나는 주로 현장관리자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작업자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일은 거의 없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이미 여러 개의 계약관계가 얽혀있으므로 따지고 보면 결국 서로 아무사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이곳의 위계를 따져보자면 나는 현장의 총책임자를 관리하는 최상위에 위치해 있고 작업자들은 하청의 하청을 거쳐 가장 말단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현실에 대해 나는 조금의 불만도 없으며 오히려 재미있게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현장에서 무슨 행동을 하고 있든 간에 그들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지 않는다. 평소에는 지시받은 일을 있는 그대로 진행하고 있고 쉬는 시간에는 앉아서 쉬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잔다. 자신의 모습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고민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글로만 익히 알고 있었던 인간의 순수함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본래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던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형태의 소박함과 자유로움. 내가 그들로부터 발견한 것은 아마도 19세기 말 문명인이었던 폴 고갱이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의 삶을 경험하면서 새롭게 발견하고 매료되었던 무언가와 같지 않았을까.     


   나는 여전히 단잠에 빠져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있다.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이라는 회사의 내부 규약과 앉기 위해서는 비어있는 벤치를 찾아야한다는 의식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곧 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이곳에 앉아있던 20여분 남짓한 시간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옆을 지나갔다. 당연하게도 그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친 사람은 아마 몇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의 모습에서 고단한 노동자의 삶이라고 예단하고 자기기만적인 연민을 표하며 자신의 계급의식을 확고히 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를 가리키며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지금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저런 곳에서 잘도 졸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누군가로부터 나또한 자유롭지 않았다. 어쩌면 이들 중 한명은 내가 기억하지 못한 과거의 내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을 떠날 시간이 되었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맑은 하늘에 어울리는 산들바람이 그가 앉아 있는 방향에서 불어왔다. 금방이라도 단잠에 빠질 듯한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졌고 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위해 굳이 발걸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_Largo     


   유난히 톤이 좋은날이 있다. 일을 마치고 어김없이 빈손으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다보면 한순간 그 톤들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음이 느껴진다. 하늘의 석양이 내리는 짧은 시간의 따스한 톤, 어둑어둑한 하늘 속에서 잔잔히 떠내려가는 양떼구름의 희읍스름한 톤, 어스름이 내리기전 낮과 밤의 경계에서 파랗다고 하기에는 조금 채도가 떨어진 선명한 초저녁의 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톤으로 가득한 하늘 한가운데에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는 초승달의 아늑한 빛들.     

   이런 날에는 집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이 기분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속도를 늦추고 지나가는 풍경을 살핀다. 매일 가볍게 스쳐지나가던 보잘것없는 풍경임에도 살랑대는 나뭇가지가 그리는 유려한 선들 위로 파르르 떨리는 꽃잎이 현란한 색조을 더한다. 호박색 햇살을 흠뻑 빨아들인 하늘은 거짓말처럼 점점 더 짙고 푸르게 변해가고 그사이 오후 내내 햇빛 속에 숨어있었던 작은 그림자들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그 톤들을 홀로 만끽하다보면 문득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생각난다. 논문을 쓰기위해 매일 도서관에서 온 나라의 문자들과 사투를 버리고 있을 여자 친구에게 이 따스한 톤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이 풍경을 그대로 담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 햇빛을 좋아하는 우리 집 고양이와 오늘 하루의 마지막 빛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들.     

   그러나 이 좋았던 순간들을 나는 늘 담아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시간이라는 오선지 위를 수놓은 빛과 색과 소리와 향기와 촉감이 빚어낸 아름다운 음률을 나는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 그것을 이해하거나 담아낼 기술이나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의 자연스러운 조화 앞에서 어쩌면 나는 그저 무력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감정이 고인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좋았던 감정들을 공유한다. 발걸음이 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고 그렇게 한없이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지나간다. 아스라이 멀어져간다. 순간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닳고 닳아 자그마한 추억이 된다. 그것은 작고 사소하지만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그렇게 나의 해변에는 빛이 나는 작은 모래알이 하나 더 생긴다. 수많은 모래알들 사이에서 유난히 빛이 나는 모래알하나, 어느 날 나는 그 모래알을 발견하고는 자세히 보기위해 발걸음을 늦추고 다시 한 번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아름답다고 생각하겠지.




_A tempo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이 편의점 앞에는 한 노숙자와 말쑥한 차림의 젊은 여성이 술판을 벌이고 있다. 노숙자야 뭐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편의점 일을 하면서 종종 보던 사람인데 됨됨이는 나쁘지 않으나 가난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도시라는 정글 속에서 치열한 생존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종의 진화를 그렇게 한 것인지 어수룩하고 느릿느릿한 동작 속에는 특유의 뻔뻔함과 일종의 야비함을 숨기고 있다. 하여튼 누가 봐도 정말 안 어울리는 이 두 사람은 달랑 소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취중진담을 나누는 듯하다. 멀리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워낙 그 내용이 궁금해서 앞마당에 나가 슬렁슬렁 비질을 하며 가만히 엿들어 보니 젊은 여자가 살짝 꼬인 혀로 이런저런 자기얘기를 하면 노숙자가 다리를 꼰 채로 적당히 맞장구쳐주는 흐름이다. 꽤나 귀여운 자세로 담배를 입에 물고서 커피 한 잔을 마시듯 종이컵에 담긴 소주를 홀짝이는 그녀의 모습은 여우비처럼 생경하기가 이를 데 없지만 묘한 매력을 풍긴다.

   이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인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다른 노숙자가 어기적거리며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술자리에 합류한다. 그러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거리를 쏘다니며 용도를 알 수 없는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주워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마침 지나가던 경비원아저씨와 한차례 실랑이를 벌이는데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는 듯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호통을 치다가도 다시 살살거리며 상황을 어영부영 넘기려는 그의 모습은 덥수룩한 수염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길러온 노련함인 듯하다. 이런 그들을 상대로 그녀는 오히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천진난만하게 높은 곳에 올라가 피우던 담배를 줄 듯 말 듯 하며 장난을 치는데 방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잡힐 듯 말 듯 한 담배 한 개비를 향해 덤벼드는 그들의 모습이 우습기 짝이 없다.

   한여름 새벽 6시에 펼쳐진 한편의 희극 같던 술판은 반시간 남짓이 지나서야 그녀가 자리를 떠나면서 그 막을 내린다. 이들이 남기고 떠난 텅 빈 술판에는 그들의 냄새만큼이나 진하게 남아있는 알 수 없는 여운으로 가득했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곳만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 장소를 배경으로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사람들이 빠르게 그 앞을 스쳐 지나가는데 역시 그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띠리링하는 종소리와 함께 들어온 담배손님에 의해 나는 마치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교대시간.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알 수 없는 여운에 나는 멍하니 창밖의 하늘만 바라본다. 어느새 밝아진 하늘 한가운데에는 아직 지지 못한 아침달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_rit.


비가온다
길을걷는다
아무도없다
어두운주변
드문드문비춰오는
가로수사이빛한줄기에
놀라 멈추면
문득
머리속을가득채우는
비오는소리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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