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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Jul 05. 2022

_가파도-1

: 여섯번째이야기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는 거야




PM 01:24     

   

   운진항에 도착했다. 배시간이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딱히 성수기도 아니고 주말도 아닌데 어디서 알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드는지 신기했다. 어젯밤에 뉴스를 보다가 이번 주에 이곳에 태풍이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배가 뜨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잠들었었다. 갑작스런 풍랑주의보로 울릉도행 배편을 눈앞에서 놓친 적이 있는 나로서는 쉬이 잠들 수 없을만한 고민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합실은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걱정했던 것처럼 마라도행 배는 기상여건으로 인해 전부 결항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가려고 하는 가파도행 배편은 상대적으로 거리가 가까워서 인지 정상 운항하고 있었다. 다만 내일 아침부터는 날씨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최대한 이른 시간에 배를 타고 나오는 게 좋겠다는 주의를 들었다. 걱정이 하나 해결되니 또 다른 걱정이 생겨난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기에 일단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에 감사하기로 했다.

   배가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고 대합실에서 그 시간을 보내기에는 단체관광을 온 어르신들의 시끄러운 수다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서성이던 나는 결국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PM 02:10     


   탑승수속을 마친 여객선이 출항했다. 여객선이라기보다는 조금 큰 통통배 같은 느낌이었지만 내부는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은 형형색색의 외투를 걸치고 단체관광오신 어르신들이었고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파도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 아님에도 파도가 꽤 높은 탓이었는지 배는 꾸준히 흔들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마음 같아서는 밖에 나가서 잠깐이라도 풍경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상황상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쉬운 대로 창문을 통해 바다를 구경했다. 따뜻한 오후햇살이 물비늘을 일으키며 수면위에서 반짝였고 크게 넘실대는 파도와 어우러져 역동적인 풍광을 연출해냈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유리창이 너무 흐릿했다.

   아까 터미널에서의 떠들썩한 대합실 분위기는 이곳으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원래 목소리가 큰 것인지 아니면 주변의 소음 때문에 더 목소리가 커진 것인지 짧은 시간 동안에도 어르신들의 수다와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왕왕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나는 이정도의 에너지라면 섬에 들어가서도 시끄러운 분위기를 결코 피하기 어려울 것임을 직감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약 2시간 후면 가파도에서 본섬으로 나오는 마지막 배가 출항한다는 점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면 관광객들은 다 떠나고 이곳에 남아있는 사람은 아마도 마을주민들과 숙박하는 소수의 관광객들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하루를 조용히 보내고 싶었던 나는 섬에 내리자마자 관광객들이 떠날 때까지 미리 예약해두었던 숙소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자그마한 항구에는 섬에서 나오려는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내가 타고 온 여객선이 그물에 가득 찬 물고기들을 쏟아내듯 관광객들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 오고가는 관광객들로 인해 작은 항구는 마치 축제라도 열린 것처럼 북적거렸다. 나는 그 틈 속에서 큼지막한 지도가 그려져 있는 리플릿 하나만 챙긴 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커다란 파도가 해안가를 덮치듯 관광객들은 무리를 지어 사방팔방 쏟아졌으며 몇 개 안 되는 건물들 틈사이로 빠르게 흩어졌다.      


     

PM 02:35     


   일단 숙소에 들어와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배낭을 내팽개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 침대의 폭신함과 함께 바스락거리는 이불에서 기분 좋은 햇볕냄새가 났다. 그 편안함에 나는 금방이라도 단잠에 빠질 것 같았다. 어제 하루 종일 한라산을 등산한 것도 모자라 오늘아침에 산책을 한다고 또 한참을 걸었더니 발과 무릎이 성치 않았다. 게다가 오후에 또 열심히 돌아다니려면 지금 어느 정도 체력을 비축해두어야 했다. 오자마자 옷가지를 널브러트리며 풀어헤쳐놓은 가방만 정리하고 여유로운 낮잠을 즐기기로 했다. 그러다 아까 잽싸게 챙겨온 지도를 뒤늦게 발견했다.    



PM 02:45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듯이 나도 아무런 계획 없이 잠들 수는 없었다. 낮잠을 잠시 미루고 침대에 엎드려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사전에 어느 정도 조사한 바가 있었기 에 크게 눈여겨 볼만한 것은 없었다. 구릉이 없어 평평한 이곳의 길은 간단했다. 해안가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길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섬을 가로지르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좁다란 길들이 두 길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 밖에도 바다밭 이라던가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 아카이브룸 같은 평소라면 관심을 가질만한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것들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 섬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쯤인 것 같다. 가파도는 현대카드와 원오원건축사무소가 2013년부터 시작한 대단위 지역 재생 프로젝트로써 지역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선에서 자연, 경제, 문화를 복합적으로 개발한 곳이다. 이른바 가파도 프로젝트라 불리며 5년여의 시간 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그 과정과 성과를 담아낸 전시가 이태원에서 있었다. 나는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전시를 보게 되었고 그 날 처음으로 이 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사실 전시 그 자체는 내게 큰 인상을 주지는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가파도 프로젝트가 만들어낸 가치와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지만 사실 내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은 그냥 가파도라는 섬 그 자체였다. 깨끗한 바다와 푸른 청보리밭, 그리고 제주도 특유의 검은 돌들로만 이루어진 있는 그대로의 수수하고 소박한 섬. 거기에 더하여 좋은 숙소까지 있다면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행지였다.      


   나는 이 섬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네가 생각났고
 꼭 너와 함께 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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