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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형 Jul 05. 2022

_가파도-2

: 여섯번째이야기





1. 청현색  

   

   해안가를 따라 두 시간 정도 걸으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부드러운 모래해변의 낭만이나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의 신비함은 없지만 넘실대는 청현색 바다의 수평선을 어디서든 볼 수 있고 그 위로는 맑은 하늘이 창연히 펼쳐져있다. 종종 바다 너머에서 송악산이나 한라산의 풍경이 또렷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제주도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꽤 흥미로운 경험이다.

   이곳의 해안 길에는 그늘이 없다. 덕분에 가을햇살의 따스함이 고스란히 배어있어 걷기에 좋았다. 이따금씩 바다와 가까워질 때면 고요한 물결의 끝에서 열심히 떠들던 파도가 있었다. 파도는 내 앞으로 잔잔히 밀려와 작은 목소리로 재잘대고는 곧 자그맣게 부서져 사라지곤 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걷는 것을 좋아했다. 특별히 걷기 좋은 길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고 그냥 주변의 일상을 담아내는 흔한 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너를 바래다 줄때면 매번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거나 아니면 근처의 작은 산책로를 찾아 걷곤 했다. 여행을 떠나 외딴도시의 조용한 숙소에 머물 때도, 화려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찾아다닐 때도 우리는 그 자체만을 바라보기보다는 주변을 걸으며 사소한 것에도 한 번씩 눈길을 주곤 했다. 이처럼 열심히 걷는 것에 대해 우리가 따로 이야기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늘 그렇게 함께 걸었던 이유는 아마도 걸어야 보이는 것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싶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는 거야.       

   


   반복되는 사소한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네게 말을 건넨다. 너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을 떠올렸으며 내게 뭐라고 답을 해줄까.     



   우리는 오랜 시간을 서로에게 길들여졌다.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우리는 이제 이세상의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고 갈구하며 관능을 탐닉하고 감정을 쏟아내었으며 그렇게 비워낸 만큼 다시 채워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더 많이 사랑했으며 그만큼 더 행복해졌다.

   그러나 가끔씩 그렇지 않은 날이 있었다. 누군가는 편하게 잠들었을 시간에도 쉽사리 잠들지 못한 날이 있었다. 사소함에 스쳐지나갔던 일들이 유난히 기억에 오래 남았고 오해인줄 알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헛헛해지던 순간이 있었다. 괜찮다며 다독였던 마음의 상처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번 덧나버린 마음은 끝끝내 아물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해왔고, 여전히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불안해했으며 때로는 두려워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이곳에 같이 오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약간은 떨어져 걸으며, 별다른 말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낯익은 너의 존재를 낯설게 느끼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서로 모습을 다시 제대로 바라보고 싶었다.     



   "그것은 너를 위해 내가 소비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고, 너를 위해 쏟아낸 뜨거운 땀방울이었으며, 너를 위해 피워낸 따스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여러 번의 기회를 놓쳐버린 우리는 결국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 섬을 떠올리며 언젠가 혼자서라도 이곳에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만 나는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가 좀 더 일찍 이곳에 왔더라면 지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던 사막여우의 말을 우리가 다시 떠올릴 수 있었을까.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며 소비했던 소중한 것들과 그것에 대한 책임감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2. 유록색     


   구릉이 없는 이곳은 가장 높은 지점의 해발고도가 20m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키가 큰 나무들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허리아래 높이의 청보리밭과 해안가의 초화류들로 이루어져있다. 유일하게 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걸으면 느린 걸음으로도 30분이면 다시 바다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을 걷다보면 중간 중간에 나오는 돌담길과 보리밭 사잇길의 풍경은 누구도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유혹을 견디지 못한 나도 중간에 새어나와 발길이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적당히 풍경이 보이는 자리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눌러 앉았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풍경에 나는 나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시야는 흐릿해졌고 가을햇살에 반짝이는 청보리밭이 들어올 정도만 눈꺼풀을 열어두었다.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이대로라면 달콤한 꿈을 꿀 것만 같았다. 이따금씩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바다의 향기를 품은 따스한 바람이 코끝에 닿을 때마다 유록색의 물결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우리는 걷는 것만큼이나 벤치에 앉아 머무는 것도 좋아했다. 바닷가에 가면 바다에 뛰어들어 놀기보다는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앉아 하늘과 새와 모래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흙내음이 물씬 풍기는 아침 숲길을 산책할 때도,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찰을 거닐다가도 괜찮은 풍경을 담아낼만한 곳이 있으면 잠시 앉아 그 운치를 즐겼다. 그 시간은 짧고 고요했지만 우리에게는 한곳을 바라보며 서로 교감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여기는 어때

  정말 아름답지

  하지만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것은 해가 지고난 뒤에 있어

  그리고 나는 지금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지

  너는 어때

  무엇을 기다리고 있지?          



  나는 우리가 함께 바라보았던 많은 것들을 기억한다. 총총걸음으로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길고양이를 발견하는 것도, 어스름이 짙게 깔린 저녁이면 10미터가 훌쩍 넘는 나무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잠드는 까치들을 찾아내는 것도(아래에서 보면 커다란 밤송이같이 보이는데 우리는 이것을 까치밤이라고 불렀다), 오래된 담벼락에 숨겨져 있는 고유한 색채와 질감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서로가 좋았을 때는 같이 바라보는 모든 것이 좋았다.

  하지만 사소한 다툼이 하나씩 늘어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가 서로를 더 이해할수록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맞춰줄 수는 없는 것처럼 너도 나에게 모든 것을 맞춰줄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듯 각자의 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오랜 시간동안 길러내고 가꾸어온 많은 것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공유하고 보여주면서 때로는 자극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고 내 마음대로 바꾸고 싶은 것도 있었으며 없애고 싶은 것도 있었다. 다만 그것을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배려라는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며 인내하고 기다렸을 뿐이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무엇을 기다리는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질문하지 않고도 알아주길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 무엇을 보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무엇을 기다렸는지도 잊어버린 체 더 이상 서로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3. 주색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에 나는 다시금 눈앞이 아찔해 졌다. 그 웃음소리를 영영 다시 들을 수 없게 되리라는 생각이 견딜 수 없는 일임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나에게는 사막의 샘 같은 것이었다.

"얘야, 네 웃음소리를 다시 듣고 싶구나……."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 밤으로 꼭 일 년째가 돼, 나의 별이 내가 작년 이맘때 떨어져 내린 그 장소 바로 위쪽에 있게 될 꺼야……."      
 "얘, 그 뱀이니, 만날 약속이니, 별이니, 하는 이야기는 모두 못된 꿈 같은 게 아니니?"   

그러나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물론이지……."    
"꽃도 마찬가지야. 어느 별에 사는 꽃 한 송이를 사랑한다면 밤에 하늘을 바라보는 게 감미로울 거야. 별들마다 모두 꽃이 필 테니까"
"물론이지……."     
"물도 마찬가지야. 아저씨가 내게 마시라고 준 물은 음악 같은 것이었어. 도르래와 밧줄 때문에…….기억하지……. 물맛이 참 좋았지"   
"그래……."   
"밤이면 별들을 바라봐.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 있는지 지금 가리켜 줄 수가 없어. 그 편이 더 좋아. 내 별은 아저씨에게는 여러 별들 중의 하나가 되는 거지. 그럼 아저씬 어느 별이든지 바라보는 게 즐겁게 될 테니까…….그 별들은 모두 아저씨 친구가 될 거야. 그리고 아저씨에게 내가 선물을 하나 하려고 해……."  

그는 다시 웃었다.    

"아, 얘야, 그 웃음소리가 난 좋다!" 
"그게 바로 내 선물이 될 거야……. 그건 물도 마찬가지야……."    
"무슨 말을 하고 있니?"     
"사람들에 따라 별들은 서로 다른 존재야. 여행하는 사람에겐 별은 길잡이지. 또 어떤 사람들에겐 그저 조그만 빛일 뿐이고, 학자인 사람에게는 연구해야 할 대상이고, 내가 만난 사업가에겐 금이지. 하지만 그런 별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어. 아저씬 누구도 갖지 못한 별을 가지게 될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있니?" 
"밤에 하늘을 바라 볼 때면 내가 그 별들 중의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내가 그 별 들 중의 하나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모든 별들이 다 아저씨에겐 웃고 있는 듯이 보일거야. 아저씬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는 또 웃었다. 

“그래서 아저씨의 슬픔이 가셨을 때는 (언제나 슬픔은 가시게 마련이니까)나를 안 것을 기뻐하게 될 거야. 아저씬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로 있을 거야. 나와 함께 웃고 싶을 거고. 그래서 이따금 그저 괜히 창문을 열게 되겠지……. 그럼 아저씨 친구들은 아저씨가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것 보고 꽤나 놀랄 테지. 그러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줘.
"그래, 별들을 보면 언제나 웃음이 나오거든!"
그들은 아저씨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난 그럼 아저씨에게 못할 짓을 한 셈이 되겠지……."    

그리고는 그는 다시 웃었다.   

- 어린왕자 26번째 이야기 중

 

  말간 해가 수평선 아래로 몸을 숨기자 어스름이 사방에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이 좋았다. 해가 남기고 간 따뜻한 색채와 기운이 여전히 청보리밭 표면위에 찰랑이며 남아있었고 차고 푸른빛이 도는 어스름은 땅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청현색 바다의 무한한 수평선과

  발끝에서 잘게 부서지며 재잘대던 파도들과

  맑은 하늘 안에서 만개한 하얀 구름들과

  작은 바람에도 하늘거리며 싱그럽게 빛나던 유록색 청보리와

  따뜻하게 색이 바랜 나무벤치의 고즈넉함까지    

      


  이 모든 것들은 해가 지고 난 그 짧은 시간동안 본연의 색을 잃어버리고 검은 실루엣만을 남긴 체 사라져간다. 그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그동안 좋았던 기억과 아름다운 인상들이 떠오르면서 오늘하루도 잘 살아왔구나, 내일은 더 자세히 바라보고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PM 07:11     


   어둠이 완전히 내린 섬에는 바람과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간단히 커피를 내리고는 바로 테이블에 앉아 펜을 들었다. 오늘하루를 잃어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었던 나는 지나간 생각과 감정들을 마구 적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장의 끝에는 네가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같이 왔더라면 지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나는 더 이상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이 적적하게 느껴졌던 나는 옆에 있는 스피커로 잠시 음악을 틀기로 했다. 특별히 듣고 싶은 음악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뭐라도 좋을 듯 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실루엣만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잔잔한 음률이 거실을 가득 채우는 동안 오늘하루의 무거운 피로감이 나를 서서히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한 샤워가 생각났고 나는 남아있는 커피를 마저 비우고는 욕실로 향했다.  


 






PM 08:54


  어둠이 짙게 깔린 평평한 섬에는

  따뜻한 빛과 잔잔한 음악으로 채워진 곳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두 사람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어쩌면 여전히 존재했을지도 모를 것과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무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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