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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Oct 03. 2021

허먼 멜빌 - <모비 딕>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TV 명화극장에서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영화 '백경'을 보았다. 영화를 접하는 것은 TV를 통해서만 가능한 시절이어서(나는 극장이 없는 도농 읍면에서 살았다) 주말에 TV에서 하는 모든 영화 프로그램-KBS 토요명화, KBS 명화극장, MBC 주말의 명화-을 다 섭렵하던 시절이었다.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백경'을 시청했다. 도입부는 약간 지루한 영화였는데 딱 두 가지 이유로 나는 이 영화가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하나는, 주인공의 친구가 자신의 관을 짜서 친구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장이 흰고래의 몸통에 묶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선원들에게 고래를 잡으러 오라고 손짓하는 장면이었다. 두 장면 다 어린 나에게 신비한 섬뜩함과 한 가지에 몰입하는 사람에 대한 숭고함을 느끼게 했다. 니중에 '백경'은 책이 원작인 줄 알았고 언젠가는 이 책을 읽어봐야지 마음먹었다.


독서토론 모임 '책담'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책을 정하고 책을 정한 사람이 토론할 논제도 정한다. 순번이 돌아온 토론 리더는 책임감을 갖고 책을 읽어야 한다. 다행히 책담 멤버들 모두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이라 지금껏 펑크 난 적이 없었다. 이번 달은 내 차례였다. 문득 중학 시절 본 영화 '백경'이 생각났다. '백경'의 원작은 <모비 딕>이다. 책을 찾아보니 세상에, 우리 집 베개보다 두꺼운 듯했다. 멤버들이 다 좋아하고 비교적 부담 없는 책을 고르고 싶었지만 이런 베개 두께만한 책은 토론 리더가 되었을 때나 완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의 원망을 안고 이달의 책으로 나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골랐다.


허먼 멜빌은 1819년에 태어나 1891년에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릴 적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기에 학교도 중도에 그만두어야 해서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서 일찍부터 측량기사, 은행원, 교사 등의 직업을 전전했으나 생계를 위한 충분한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멜빌은 선원이 되어 포경선에 승선하게 되었다. <모비 딕>은 작가 자신이 포경선의 선원이었을 때 경험이 많이 녹아 있다. 그래서 책에 묘사된 고래와 포경업에 대한 묘사가 백과사전 못지않다. 그래서 한때 <모비 딕>은 도서관의 소설 코너가 아닌 고래학 혹은 어류 코너에서 찾아야 했던 적도 있었다. 3년 여간의 포경선 선원 생활을 하고 귀국한 후 멜빌은 자신의 진기하고 독특한 경험을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야기해 주곤 했다. 요즘으로 치면 인기 유튜버가 되었으리라. 멜빌은 말재주가 아주 뛰어나 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너무 재밌다.' '말로만 하지 말고 책으로 써봐라'라는 말을 해주었다. 글 쓰는 것도 좋아해서 틈틈이 글도 쓰고 책도 냈던 멜빌은 자신의 이야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의 응원에 힘입어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쓰기로 했다. 그 책이 <모비 딕>이다.

독서모임 책담 후.


<모비 딕>은 1851년에 출간되었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멜빌은 헌신을 다해 책을 써냈는데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하니 10여 년간의 작가 생활을 집어치우고 다시 생계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모비 딕>은 세상에서 잊혔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소설이 되었다.


세월은 흘렀고 멜빌은 죽었다. 미국에서는 서부 개척이 있었고 남북전쟁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실패했으며 유럽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를 뒤흔든 1차 세계 대전이 발생했다. 1900년대 들어서 미국에서는 자본주의가 팽배해졌고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에 온 기독교인들은(정확히는 청교도) 초심을 잃고 돈을 좇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과 권리를 뺏고 있었다. 이런 때에 어느 문학평론가가 <모비 딕>을 찾아주었다. 문학평론가 레이먼드는 <모비 딕>을 일컬어 "이 세상 최고의 문학 작품'이라고 했다.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머싯 몸은 <모비 딕>을 영어로 쓰인 세계 10대 소설로 뽑기도 했는데 이런 것들을 계기로 <모비 딕>은 작가가 죽은 후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모비 딕>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게 된 데에는 앞서 말한 세계의 불안정한 흐름과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격변의 세상과 그동안 믿고 있던 개인과 집단의 신념들에 대한 배신감이 당대에 공공연히 퍼져 있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격변기에는 옛 것을 새로이 돌아보고 곱씹어 보는 게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다.


이슈메일이라는 우울한 청년이 '이슬비 내리는 11월처럼 영혼이 을씨년스러워져서' 무작정 바다로 나가기로 마음먹고 포경선을 탔다. 배를 타기 며칠 전 우연히 한 여인숙에 머문 이교도 퀴퀘그와 친구를 맺고 같은 포경선 피쿼드호에 승선하였다. 피쿼드라는 이름은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에 온 기독교인들에 의해 종족이 몰살당한 인디언 부족의 이름이었다. 배에는 일등항해사 스타벅, 이등항해사 스터브, 삼등항해서 플래스크를 비롯 약 서른 명의 선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배의 선장은 에이하브, 흰고래 모비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고 고래뼈로 다리를 만들어 다닌다. 에이하브의 목적은 흰고래 모비딕을 찾아 죽여 자신의 복수를 하는 것. 선동에 타고난 재주를 가진 에이하브에게 다 같이 선동되어 선원들도 흰고래 모비딕을 찾기 시작한다. 이슈메일의 친구 퀴퀘그는 어느 날 몸이 아파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 스스의 관을 짜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피쿼드호는 마침내 흰고래를 발견하고 사흘간의 처절한 추적을 벌인다. 마지막 사흘째 되는 날 피쿼드 호의 선원과 에이하브와 모비딕의 마지막 사투에서 모비딕의 공격을 받은 피쿼드호와 선원들은 소용돌이와 함께 모두 바다로 가라앉고 퀴퀘그의 관을 구명보트로 잡은 이슈메일만이 오롯이 살아남아 바다 위에 떠다니다 구조된다는 이야기이다.


680페이지에는 위의 스토리가 약 절반을 차지한다. 나머지 절반은 무엇일까? 바로 고래와 포경에 대한 백과 사전식 지식의 나열과 설명이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은 소설이기도 하면서 고래 백과사전이기도 하다. 이런 백과사전식 설명은 소설을 읽는 데 꽤나 방해가 되고 있다. 책에 나와있는 설명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고래의 역사, 뼈 모양, 고래의 종류, 고래 그림들, 고래고기 요리, 고래의 해체법, 향유고래의 머리 연구, 고래기름 짜는 법, 용연향, 작살의 종류와 작살법, 포경선의 구조, 포경 밧줄 등등이 있다. 지루하게 느껴지고 이런 세세한 고래와 포경에 대한 지식을 내가 왜 읽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고래에 대한 설명이 없어도 <모비딕>을 읽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래서 고래 설명을 뺀 스토리로만 된 소설판들도 꽤 된다. 독자의 외면을 받을 것이 뻔한 데 멜빌은 왜 이런 설명을 상세히 썼을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멜빌이 <모비딕>을 출간하기 전 유럽 혁명 전 메테르니히 체제, 즉 모든 것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가 프랑스의 2월 혁명을 통해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것에 대한 비유라는 의견이 있다. 비평가도 아니고 분석을 굳이 하고 싶지만 평범한 독자인 나는 그 말이 맞게 거니, 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책담의 토론에서도 이 부분에 대하여 각자 의견을 나누었는데, 멜빌은 고래를 너무나 사랑했다, 멜빌은 고래덕후였다, 멜빌은 고래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납득할 만한 생각이 아닌가!


1959년 영화 '백경' 속 스타벅(왼쪽)과 에이하브선장(오른쪽). 유튜브 화면 캡처.


논문 같은 고래와 포경에 대한 백과 사전식 나열을 제외하면, 나머지 다른 부분들은 너무나 술술 읽히는 작품이었다. 아니, 술술 읽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진도가 느린 작품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야기가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듯 이해가 되고 쉬이 동감을 느끼지만 작가가 중간중간 써놓은 묘사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생각들, 그리고 인물들의 독백, 그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철학적 사유와 다양한 세계관들의 향연이 펼쳐지기 때문에 스토리만 읽어서는 온전히 <모비딕>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그 독백과 대화를 이해하고 사유하려면 몇 번이고 곱씹고 생각하고 다시 되뇌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겨우 5페이지짜리 한 챕터를 넘기는 데로 하루 온종일이 걸리곤 하는 것이다.(이 책은 총 135개의 챕터가 있다!) 이러다가는 책을 기한 내에 못 읽겠다 싶어 다음에 다시 보려는 다짐으로 밑줄만 잔뜩 그어놓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만 했다.


책에는 너무도 많은 생각할 거리가 넘쳐있어 하나하나 다 나열하자면 독후감을 쓰는 데  한 달 내도록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나를 구제하는 차원에서 이번에는 세 가지 정도만 감상을 적어볼까 한다.

첫째, 선장 에이하브와 흰고래 모비딕의 관계이다. 모비딕은 늙은 고래이다. 향유고래는 원래 회색인데 나이가 들면 점차 흰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모비딕은 늙었지만 아주아주 큰 고래이다. "모비딕은 죄가 없다"(책담 멤버 중 한 명의 강력한 주장이다.) 태어나길 고래로 태어나 자신의 무대인 바다에서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산 죄밖에 없다. 그런 모비딕을 에이하브는 자신의 다리를 뺏어갔다는 이유로 모비딕을 '악'으로 규정하고 처단을 결심하고 명령했다. 혼자서 복수는 어려우니 피쿼드호의 선원들을 타고난 선동력과 웅변으로 동참시킨다. 에이하브의 명연설에 선원들은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스스로 소용돌이로 빨려가는 오디세우스가 탄 배의 선원들처럼, 히틀러의 말에 동조된 나치들처럼 가슴이 끓어오르고 모비딕을 악의 근원으로 여긴다. 에이하브는 지산이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독재자이며 가만있는 자연을 개발하려고 못살게 구는 자본주의이다. 모비딕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며 순수함이다. 자연과 순수는 독재자와 자본주의에 쉬이 파멸된다. 가만두면 늙어 죽을 모비딕이었다. 굳이 선제적 복수를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소수의 누군가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모비 딕>의 미국판 표지


둘째, 스타벅의 쓸데없는 동정심에 화가 난다. 에이하브의 의도를 파악한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처음부터 에이하브에 반대하였다. 고래는 타고난 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그 미물에게 무슨 짓이냐고 에이하브에게 대놓고 대항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스타벅은 에이하브와 자신과 함께 피쿼드호 전체가 에이하브의 욕심 때문에 파멸의 길로 접어들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스타벅은 부인과 아들에 대한 애끊는 미안함과 넘쳐나는 그리움을 삭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하브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못한 것이 아니라 죽이지 않았다!)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했다. 왜 그랬나? 왜 이런 비극적 선택을 했어야만 했나? 스타벅은 40년 고래잡이 작살잡이 에이하브에 대한 존경과 연민을 갖고 있었다. 이런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결정적 순간에 스타벅을 나약하게 만든 것이다. 왜 항상 선한 사람은 결정적일 때 마음이 약해지는가? 왜 다수의 의로움을 우선하는 사람들은 결정적 순간에 우유부단해지는가? 우리는 역사적 순간에 이런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숱하게 보았다. 스타벅이 에이하브를 총으로 쏘지 않고 살려둔 그 선택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했다. 역사에서 우리는 악은 꼼꼼하고 선은 너그러운 것은 충분히 견뎌내었다. 이제는 다수의 정의도 과감한 처단과 결정의 선택을 하여야 한다.

사족, 커피전문점 '스타벅스(STARBUCKS)'는 <모비 딕>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이름에서 따왔다.


셋째, 이슈메일의 친구 퀴퀘그에 대한 단상이다. 퀴퀘그는 온몸에 문신을 새긴 태평양 어느 섬의 왕자인 이교도이다. 요조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인물이다. 이슈메일은 처음에 식인종 퀴퀘그를 무서워하고 꺼려 하였다. 하지만 그와 두어 번 같이 밤을 보내고(그냥 같이 한 방에 잔, 아무 일 없이) 담배를 나눠피고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면서 오히려 기독교인보다 더 인간적이고 정의롭고 선하며 보편적인 퀴퀘그를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다. 서로를 알고 선입견과 편견을 무너뜨리니 비로소 어떤 한 존재의 진실과 진면목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편견과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남북으로 나뉘고, 남녀로 갈라지고, 지역으로 편을 먹고, 종교를 이유로 서로에게 총을 겨눈다. 곁을 보지 않고 옆을 돌아보지 않고 내 것만 나만 보고 생각하면 사람은 외골수가 되고 편견의 장막 속에 갇힌다. 이슈메일이 그러했듯, 포경 도시 낸터컷의 사람들이 그랬듯 피쿼드호의 사람들이 처음에 그랬듯 퀴퀘그를 식인종으로 단정지었으나 알고 보니 그 어떤 기독교인들보다 더 멀쩡했다. '술에 취한 기독교인보다 취하지 않은 식인종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라는 이슈메일의 생각이 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슈메일의 목숨을 구한 건 이교도 퀴퀘그였다. 중요한 건 다양성과 포용이다.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이 다가오기에 우리는 그런 작품을 고전이라고 부른다.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는 작품을 고전이라고도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고전이 있고 나도 꽤 많은 고전을 읽었다. 하지만 올해 내가 선택한 최고의 고전은 단연코 <모비딕>이다. 이 책은 내가 20대, 30대에 읽었다면 아마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을 거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그만한 깊이를 가지지 못한 어린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가 반납하고 책을 구매했다. 이 책은 곁에 두고 수시로 밑줄 그은 부분을 열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10년에 한 번은 꼭 <모비딕>을 다시 읽어볼 것이다. 그때는 사전을 옆에 끼고 모르는 단어, 용어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밑줄마다 감상을 달아가면서 좀 더 긴 독후감이나 그도 아니면 독후감 시리즈라도 써 볼 것이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여유 있고 조금 더 크고 너른 사람이 되어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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