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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Jun 19. 2024

그 해 여름, 내 어린 날의 풍경

엄마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경상도 생활 사투리

1980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그때 논이 있었다. 열마지기 정도 된다고 기억한다. 어린 내 눈에는 엄청 커보였다. 모내기가 끝나고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사람 손으로 농사 일을 하던 때라 여름에 피가 날 때면 피를 뽑으러 자주 논에 나가야 했다. 아버지는 직장을 다녔지만 일요일에는 손을 보태 피를 뽑으러 논에 나가곤 했다. 아침 일찍 아버지가 논에 가면 엄마는 새참을 준비해서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십리쯤 거리에 있는 논까지 걸어갔다. 아주 가끔 일요일이 시시해질때면 나는 엄마를 따라 논에 갔다.


아버지: 좀 늦었네. 하마나 오나, 기다릿네. 좀 출출하드라.

엄마: 정구지가 보드랍아가 찌짐이를 부친다고 시간이 좀 걸릿심더.

아버지: 정구지 찌짐이? 좋지. 찌짐이에는 탁배기도 있으면 좋은데.

엄마: 당신이 하도 무~싸가 술이라 카믄 엉글나는데, 그래도 오늘은 아침부터 고생하이깨네. 자, 여 있심더.


엄마가 머리에 이고 온 광주리 안에는 정구지 찌짐이, 탁주 한 병, 고추장에 참기름 깨소금 열무김치를 넣어 머무린 비빔국수, 김치 한 보시기가 스뎅 그릇에 담겨 들어있었다. 나는 정구지 찌짐이보다 빨갛게 물들어 자태를 뽐내고 있는 국수가 좋았다. 황소가 투우사의 빨간 천을 보고 날뛰듯 빨간 국수를 보자 내 가슴도 뛰었다.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앉아 엄마가 덜어주는 국수를 한 젓가락에 한 주먹만큼 올려서 한 입에 다 넣어 볼 안에 터질 것 같았지만 두 세번만 씹고선 바로 넘기기때문에 금방 입 안은 텅비었다. 아버지의 국수 한 입은 아버지 주먹보다 컸지만 아버지도 두 세번만 씹고 바로 꿀꺽하고 국수를 삼켰다. 아버지 식성을 닮은 나는 하루 세 번 밥은 어렵지만 국수는 먹으라고 하면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국수를 사랑했다.


아버지: 꿀꺽꿀꺽, 크하~~ 좋타!

엄마: 술이 그래 좋는교? 내사 사 술이라 카믄 엉글난다. 엥간히 무야 말이지. 말술이다. 말술.

아버지: 니도 함 마시볼라나?

엄마: 그래. 나도 함 무 보자. 묵고 당신맹키로 깽판 함 직이봅시더.

아버지: 장마가 시작될랑가. 날이 미피하니, 이런 날 탁배기 한 사발 해야지. 태야 니도 함 무 볼래?

엄마: 아 한테 뭔 술인교?

아버지: 와? 엄마 아버지하고 한 잔은 괘안타. 아나.

나: 옴마, 내 할매하고 탁주도 무 보고 소주도 무 봤다. 맛있던데!

엄마: 잘 돌아가는 집구석이다. 쯧쯧


엄마와 아버지가 남은 탁주와 정구지 찌짐이를 작살내고 있을 때 나는 논 앞에 있는 도랑으로 내려갔다. 더위에 물장구가 제일이었고 재수좋으면 물장구 몇 번에 미꾸라지를 한 소쿠리 잡아올 수도 있었다. 한여름은 미꾸라지가 아직 어릴 때이긴 했지만.


엄마: 태야, 인자 고만 가자. 어여 나온나.


도랑에서 손도 담그고 발도 담그고 한참 놀던 나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도랑을 나왔다.


아버지: 달가지에 그 시커먼 거 뭐꼬? 풀때기가, 거싱이가?

엄마: 에고! 미꾸라지는 한 마리도 못 잡고 달가지에 거싱이만 붙이 왔네. 여 오바라. 떼내구로.


엄마는 손으로 내 다리에 붙은 시커먼 뭔가를 잡아서 힘껏 당겼다. 엄마 손에 있는 그것은 꾸물꾸물거렸다. 되게 못생기고 무섭게 생겼다.


나: 아악! 이기 뭐꼬?

엄마: 거싱이 아이가?

나: 거싱이가 뭔데?

엄마: 니는 거싱이도 모르나? 논에 천지삐까리로 있는데. 그래서 논에 드갈때는 스타킹을 꼭 신고 가야된다 아이가. 논에 많은 건데 도랑가에도 있었던 가베? 거싱이도 얼라 피가 맛있는 줄 아는 갑다. 거싱이는 피 빨아 묵는다 아이가.

나: 뭐? 피? 옴마 내 다리 잘 바바. 또 있는 거 아이가? 히잉~

엄마: 읎다. 정신 없는 거싱이 한 마리가 있었는 갑다.


엄마는 텅빈 스뎅 그릇과 보시기를 챙겨 광주리에 넣었다.


엄마: 날이 덥십더. 같이 퍼뜩 하입시더.

아버지: 저쪽 끈티까지만 하믄 되는데 혼자서도 금방 한다.

엄마: 당신 일 하는 기 더디가 금방 되겠능교? 손 빠른 내가 거들어야 금방 끝나지. 일~ 나소. 갑시더.


피 뽑으러 논에 들어간 엄마 아버지를 기다리며 나는 거싱이가 무서워 도랑에 들어가지 못했다. 피 뽑으러 따라왔다가 내 피만 뽑힌거였다. 무서움이 더위를 이긴 거다. 뙤약볕 아래서 나는 꽃반지를 만들었고 필기를 뽑아서 껍질을 벗긴 다음 하얀 속을 껌처럼 씹었다. 위 속으로 넘어가 보이지 않은 비빔국수는 더 이상 그립지 않았고, 일찍 나온다고 못본 들장미 소녀 캔디만 아쉬운 10살 소녀의 일요일 오전이었다.


= 경상도 사투리 뜻

-하마나: 이제나 저제나           
-정구지: 부추
-찌짐이:  전
-엉글난다: 지긋지긋하다. 몸서리쳐진다.
-엥간히: 어지간히                  
-미피하다: 후덥지근하다
-아나: 물건을 건네줄 때 쓰는 말 "자, 여기 있어"        
-거싱이: 거머리
-얼라: 아기
-끈티: 끝. 가장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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