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다. 올해 여름이 역대 가장 더운 여름이 될 것이라는 기상청의 발표가 이번에는 맞으려나보다. 오월 언저리부터 봄을 쫓아내고 여름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듯 하더니 유월의 첫주가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깥은 벌써 한여름이다. 손썬캡을 써보지만 그래도 따가운 햇볕에 못난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 햇빛도 피하고 코로나도 피해야 해서 외출을 자제해 본다. 그러나 여름의 흔적은 집안에까지 침투해왔다. 여름 불청객인 작은 점같은 초파리가 벌써부터 거실 한구석을 힘겹게 비행하고 있다. 초파리는 화장실에서도 이리 저리 목적없이 날아다닌다. 초파리들은 왜 흔들거리며 날아다닐까? 초파리를 쫓는 내 눈에 그들의 흔들리는 모습이 불안해 보인다. 내 눈이 흔들리면서 불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혼하기 전 살던 친정집은 단층짜리 주택이었다. 친정집 부엌에는 초파리들이 항상 있었다. 특히 여름철 30도를 웃도는 더위가 시작되면 씽크대 수도 꼭지에 매달아놓은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두는 까만 비닐 봉투에 초파리들이 모여들어 내 눈앞에서 웽웽거리곤 했다. 내 눈에 티가 들어가서 까만 점들이 공중에 떠있는 것 같기도 했다. 초파리들은 설거지를 하는 내내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잡을려고 손을 뻗으면 이 작은 놈은 죽지 않으려고 잽싸게 빠져나간다. 멀리 도망가지도 못하는 초파리를 잡지도 못하고 바람에 나부끼는 허수아비 옷소매 마냥 손을 허우적대었다. 짜증이 일었다.
“엄마, 음식물 쓰레기 제때 좀 치워라. 초파리들이 드글 드글하니 드러버 죽겠다~”
“여름이믄 원래 어느 집이나 다 생기는 긴데 그기 치운다고 치아지나. 음식물 쓰레기 수거해가는 날 꺼정 놔두야제.”
결혼을 하고 내 살림이라는 걸 꾸리게 됐다. 맞벌이를 핑계로 집에서 밥을 해먹는 일이 많지 않았다. 쓰레기가 만들어지지 않으니 버릴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런 어느 여름 날 나는 쓰레기통을 비우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쓰레기통 뚜껑을 여느 순간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초파리들. 나는 ‘드러버 죽겠는’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 있었다. 그 날부터 왜 초파리들이 우리 집에 서식을 하게 되었는가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무심코 버린 조그만 음식물 부스러기, 씽크대에 고여 있던 젖은 찌꺼기,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 식탁에 놓인 바나나. 찾아보니 원인은 무수했다. 나는 그날부터 초파리 퇴치를 위해 온 집안을 살펴보았고 원인을 찾아 박멸을 시도했다.
하지만 완전 박멸과 재발 방지는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내 원인 분석이 잘못 된 건가 아님 박멸을 위한 내 노력이 부족한 건가 혹은 가족의 협조가 결여된 건가. 그도 아니라면 초파리는 원래 많이 생기기 마련인 걸까?
초파리가 내 집을 떠나지 않듯 불안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없애고 싶은 것이 어찌 초파리뿐이겠는가. 잠시만 방심해도 어느 틈엔가 머릿속에 들어와서 심장을 콩닥거리게 하고 손에 땀이 차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근대 사회의 주된 불안의 원인을 경제적 특성에서 기인한 삶의 불확실성이라고 진단했다. 진입하기도 힘들었지만 한번 진입하면 잃는 것 또한 무지 어려웠던 과거 신분제사회의 지위는 근대화가 되고 자본화가 심화된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성과에 따른 보상으로 규명된다. 그런데 경제적 성과라는 것이 경제적 특성 때문에 단순히 노력을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노력의 결과가 불확실할 뿐 아니라 운이라는 요소와 타인과의 경쟁이라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 요인까지 더해졌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불안'
우리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하고 더군다나 타인들로부터 변함없이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러한 우리의 요구와 세상의 불확실성 사이의 불균형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위에 대한 불안을 낳게 한다.
내 삶이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닌 내 상사와 고용인에 의해 대부분의 내 시간들이 결정되던 그 시절에 나는 피고용인의 지위를 잃게 될까 불안했다. 회사를 향한 내 노력과 그 노력에 대한 평가가 평행선을 그리지 못하고 가격을 결정하는 수요공급곡선처럼 교차되고 어긋나 버릴까하는 긴장의 나날들이었다. 한편으로 피고용인의 지위를 잃어버릴 그 날에 대비하여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무엇’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그 ‘무엇’을 알지 못하고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또 불안해했다. 몸은 농경 사회의 정착민이었지만 마음은 목초지를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이었다. 몸과 마음이 다른 공간에서 분리되어 있으니 불안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피고용인의 지위를 잃는 불안을 피고용인의 지위를 버림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불안해만 하고 걱정만 하던 ‘무엇’을 실행해 나가기로 했다. 나는 지금 피고용인이 아니다. 더 이상 눈치를 볼 대상도 없고 누군가를 위해 사용됐던 내 시간은 이제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 나는 시간을 돈과 맞바꿈으로써 해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하면서 앞으로 나의 날들을 채워나갈 그 ‘무엇’이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고 있다.
지금 나는 커다란 불안의 씨앗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지만 불안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또 다른 불안이 생겼다.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 눈치 볼 대상은 없어졌지만 동시에 내 인정욕구를 채워줄 대상도 사라져버려 흔적이 희미해진 내 사회적 존재감, 사라진 월급과 함께 날아가 버린듯한 경제적 지위, 만족이 안 되는 내 성취 욕구.
초파리의 박멸이 불가능했다면 박멸을 시도하기 보다 내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없애는 것으로 타협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해도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일 수 밖에 없고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우리는 늘 불안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자유로운 지금, 나는 여전히 미래가 불확실해서 불안하고 또 사회적 욕구와 존중의 욕구를 채우지 못할까 초조해 한다.
글을 쓰는 지금 컴퓨터의 하얀 화면 앞에서 흔들거리며 떠다니는 초파리마냥 불안함의 감정도 내 하얀 마음속에서 작달마한 점의 크기로 곳곳이 묻어 있다. 잠깐의 틈이라도 보일라치면 불안이라는 놈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아직도 ‘무엇’을 이루지 못하고 헤매는 나를 조롱하듯 웽웽거린다.
초파리 없애는 방법을 검색을 했다. 통 계피, 시나몬스틱, 소주 희석액, 락스 희석액, 뜨거운 물, 음식물 쓰레기 즉각 치우기 등등. 방법은 많고 몸은 부지런히 품을 들여야 한다. 시간을 들이고 힘을 내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써야 하는데 박멸이 불가능할 것 같아 일부 그 놈이 날아다니는 것을 잠깐 참을 지, 그래서 찬바람이 불어 내게도 초파리없는 클린한 날이 자연스렙게 오기를 기다릴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