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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Aug 14. 2020

중년 엄마의 아이돌 입덕기

사춘기 딸과의 소통 방법 찾기

때는 바야흐로 2014년. 딸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뾰족하고 예민한 포스를 가끔씩 내뿜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더니 다른 아이가 되어갔다. 어릴 때의 그 귀염 뽀작하고 애교 많은 둘째 딸이 아닌 매사 시큰둥하고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인데 도통 말을 하지 않아 그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로 변해갔다.


이유를 물어보면 "그냥"이라고 하고 뭐가 불만이냐고 또 물어보면 "없는데"라고 하곤 했다. 뭐 먹을래, 어디 갈래, 뭐 살래라고 물어보면 "아무거나. 상관없어"라고 대답하기 일쑤였다. 막상 내 맘대로 고르면 입이 한 발이나 튀어나와 있는 불만 가득한 표정과 몸짓을 다 표현해놓고서 정작 왜 그러냐고 하면 "왜? 뭐? 내가 뭐랬는데?"라며 이 세상 시크함은 제가 다 가진 것 마냥 휘 돌아서서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도대체 방구석에선 맨날 뭘 하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실은 우리 딸이 방구석에서 무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으르렁'의 메가 히트로 최정상을 달리던 아이돌 그룹 엑소의 화보를 보고 그들의 뮤비를 감상하고 그네들을 향한 애정이 담긴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다만, 내가 그런 행동들이 꼴 보기 싫어 외면하려 했을 뿐이었다.


나도 중고등 시절 전영록과 듀란듀란, 변진섭을 많이 좋아해서 책받침도 만들고 잡지도 오리고 콘서트도 가고 했었다. 그때는 요즘 아이돌 팬들이 하는 '덕질'과는 수준이 몇 단계 훨씬 아래였다. 딸아이 또래의 아이들이 아이돌에 빠져 일상생활을 접어두고 속칭 '빠순이'가 되는 것을 보았고 우리 딸도 저렇게 극성이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되었다.


어느 수요일 밤 애청하던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제목은 <괜찮아, 사랑이야>. 조인성과 공효진이 주연으로 나오던 마음의 병과 치유에 대한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에서 조인성의 환시로 나오던 소년이 있었다. 맑고 순수하게 생긴 처음 보는 배우였는데 연기를 너무 잘하는 것이었다.

"재 참 연기 잘한다. 쟈 누군고?"

"엄마, 내가 몇 번이나 말해줬잖아. 엑소 디오라고. 본명은 도경수. 디오 연기한다고 드라마 보라고 얘기할 때 엄마 내 말 진심으로 안 들은 거야? 헐!"


딸애가 아이돌 누구누구를 얘기해도 내 눈에 그 애가 그 애 같고 내 눈엔 모두 똑같은 사람이었다. 단체로 방송에서 '으르렁'대는데 무슨 이런 노래가 있나, 누가 작사했나, 수준도 참, 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실은 나는 딸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무슨 아이돌이 드라마 나와서 발연기로 작품 하나 버려놓겠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엑소의 멤버인 디오라는 소년은 연기가 너무 좋았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는 딸애보다 내가 더 디오를 좋아하게 되어서 엑소의 웬만한 영상은 다 찾아보게 되었는데 이때 우리나라 아이돌은 참 열심히 한다는 것과 일부 뉴스와 편견과는 달리 대개는 인성이 바른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딸애가 최애하는 블락비와 차애하던 엑소에 대해 나는 편견을 거두고 시간을 내어 딸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연예 뉴스를 찾아보고 블락비와 엑소 소식을 검색하기도 했는데 딸아이와 대화의 물꼬를 트고 이어나가는데 정말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었다.


방문을 닫았던 딸 역시 엄마와 자신이 좋아하는 내용을 주제로 한 대화를 위해 기꺼이 방문을 열고 나와주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아이가 방문을 잠근 날>책의 표지 사진


2017년 봄은 프로듀스101 시즌 2와 함께 시작됐다. 두 달간 매주 금요일 밤 딸아이는 프듀2 본방을 사수했는데 불행히도(?) TV가 안방에 있었다. 딸아이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강제 시청당하다가 나는 하성운이라는 가수를 픽했는데 그를 따라가다가 보니 그 끝에는 하성운과 친한 친구가 소속되어 있던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게도 딸아이는 방탄소년단의 팬클럽 '아미(ARMY)'였다. 내가 BTS에 관심을 보이자 ARMY인 우리 딸은 BTS관련 영상과 자료를 무차별적으로 던져주었다. 내가 엄마보다 많이 알는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는 자부심이 발동했을까? BTS 관련 영상을 떨궈주면서 딸아이의 눈망울은 밤하늘 별빛이 무색할 만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는 딸아이가 인도하는 모든 영상과 스토리, 세계관을 섭렵하였다. 섭렵하면 할수록 공부하면 할수록 나는 공식 ARMY인 딸보다 더 열성적으로 변모해가며 비공식 ARMY로 성장하게 되었다.


연말 시상식이 있는 시즌이나 BTS가 컴백하는 시기가 되면 엄마와 딸이 함께 달력에 방송일자를 메모해놓고 같이 TV쇼를 감상했다. BTS가 언제나 나올까 이번 무대는 얼마나 엄청날까 서로서로 얘기꽃을 피워가며 방탄의 잠깐 동안의 무대를 즐기기 위해 3시간짜리 TV쇼를 통째로 기다리는 것이다. 다른 데로 채널을 틀지도 못하고서 말이다.


그러다 방탄소년단이 마침내 화면에 뙇하고 등장하면 엄마와 딸은 나란히 "와~ 나왔다. 나왔다!"라며 박수를 치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TV 앞으로 바싹 붙어서는 시선을 고정시켰다. 더 자세히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번 무대 역시 쩐다.' '야, 지민이 춤 선 봐봐. 실화니?' '뷔 얼굴 사람이냐?' '정국이 노래 역시 잘해, 우와~'라며 연신 한 마디씩 하다가 단체 군무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그저 우~와~의 감탄사만 연발할 뿐이었다. 몇 년 연습한 듀엣같이 죽이 척척 맞는 엄마와 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누가 엄마고 누가 딸인지, 여기 10대 소녀밖에 없다.'면서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어댈 뿐이었다.


무대가 끝나고 나와 딸아이는 인터넷 반응도 함께 살펴보고 무대에 대한 소감도 함께 나누면서 그 날의 흥분을 함께 공유했다. 우리는 마치 친구같이 다정했고 나는 듀란듀란의 뮤비를 보며 설레던 10대의 소녀가 다시 된 것 같았다. 우연히 입덕 하게 된 방탄소년단은 세상 모든 것이 시들해져 가고  다가오는 갱년기로 우울해지던 한 중년의 여자를 다시 환희의 세계로 옮겨놓았다. 내가 옮겨온 환희의 세계는 다행히 활동을 멈추지 않는 우리 방탄소년단들 덕분에 아직도 분명히 건재해 있다.


내가 블락비 소식을 찾아보고 엑소 뉴스를 전해주고 방탄소년단 영상을 즐기면서 마음을 쏟을 어떤 곳을 찾았다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나를 즐겁게 하고 가치 있게 만들었던 것은 우리 딸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하고 허물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에 있다.


딸의 사춘기가 시작되고 서로 대화가 뜸해졌을 때에도 딸아이는 늘 엄마인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 이야기를, 그 당시 자가기 알고 있던 세상의 대부분이었던 아이돌 세상에 대하여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철없는 소녀들이 한 때 빠져드는 환상으로만 치부하고 귀 기울여 듣지 않은 것이 아이의 엄마인 나였다.


사춘기를 맞이한 아이들의 반항은 원래 그런 것으로 치부하고 방문을 닫는 것은 사춘기 아이들의 특징으로 인지하고 깊이 듣지 않은 것은 어른이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딸아이의 아이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에 동참해주니 먼저 변하고 반응한 건 이미 완강한 벽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굳힌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말랑말랑했고 언제든 스스로의 마음을 열어주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던 것이었다.


블락비와 엑소와 방탄소년들로 시작된 엄마와 딸의 대화는 패션과 미용으로 번지더니 이제는 서로의 일상과 친구와 각자의 꿈에 대해서 소통을 하고 이해를 구하고 공감을 나누는 데에까지 진화되었다. 지금은 어떤 때는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보다 어린 딸아이가 더 나를 잘 이해하고 마음을 알아준다.

딸이 한창 사춘기 증세로 기승을 부릴 때는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칭얼대던 내가 요새는 주변인들에게 '나, 딸 없었으면 어쩔 뻔~!'이라며 엄지를 추켜올리며 딸을 자랑스러워한다.


엄마가 딸과 소통이 잘 되게 물꼬를 틀어 준 방탄소년단에게 무한한 애정과 감사를 보낸다.

나를 월드스타 방탄소년단에게 이끌어 준 딸에게는 더 많은 애정과 고마움을 느낀다.

오늘도 1일 1 방탄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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