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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미역국

퇴사후에 오는 것들

by 홍월

며칠 전 시어머니가 아들 집에 오셨다. 정기적인 검진 차 두 달 혹은 석달마다 경남의 어느 도시에서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올라오신다.


손수 식사 한 끼를 제대로 대접해드리고 싶었다. 이모저모 따져서 전복미역국, 고등어조림, 콩자반, 진미채, 3가지 나물무침을 메뉴로 정했다.


전복은 손이 많이 가서 한번도 직접 시도해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마트에서 전복을 샀고 고등어도 샀고 무와 콩나물 취나물과 이것저것들을 샀다. 무거운 장바구니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왔다.


익숙치않은 요리와 능숙치않은 솜씨때문에 3시간 전부터 재료를 다듬었다. 자주 보지못하는 시어머니께 가끔이라도 서툰 며느리역할이나마 해야할 것 같았다.


아주 되먹지않은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의 며느리들은 '시'부모에게 마땅한 근거없이 작아진다. 과거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불심검문하는 경찰이 몇 미터앞에 있으면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쪼그라들고 얼굴에 경련이 오는 것 같은 기분과 비슷하달까? 이런 신체적 심경적 변화는 며느리노릇을 해야한다는 효심과 의무감으로 승화되곤 한다.


어떤 구체적 지침이 오지않았지만 아침이면 눈을 뜨고 밥이 있으면 수저를 들 듯 나는 시어머니가 온다고 하니 오프모드였던 며느리의무감이 바로 온 모드로 스위치된거다. 준비가 거의 끝나고 가스불에 데우기만 할 때즈음 시어머니가 오셨다.


"어무이 잘 지내셨어요? 얼굴 좋아보이셔요."

"너거도 잘 있었드나?"


인사가 오고가고 나는 저녁상을 어서 차리고싶었다. 원래 숙제는 빨리 끝내고 쉬는것이다.


"먼 길오셔서 피곤하지요? 그래도 시장하실거니 밥부터 먹고 쉬세요."


가스불을 켜고 국과 조림을 데우고 반찬을 담는 며느리를 보고 한 말씀하신다.


"인제 집에서 노니까 제법 솜씨가 많이 늘었겠네?"


좋은 뜻으로 성심성의껏 준비했는데 어머니의 '집에서 노니까' 이 한 마디는 내게서 미소와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뺏어갔다.


시어머니는 머리에서 많은 생각을 하고 말을 내뱉는 분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평소 시어머니의 성격을 아는 나로서는 시어머니가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 노력과 솜씨를 칭찬하려는 뜻임을 나는 안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노는 이라는 그 가벼운 두 음절의 말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고 마음이 상했으며 자존감이 무릎정도까지 떨어졌다.


이제 적응할 때도 됐건만 여전히 나는 이런 말들이 불편하다.

-집에서 노니 좋지?

-하루종일 뭐하고 있어?

-심심하겠다!


나는 집에서 놀지않지만, 놀아도 될 만큼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하루 종일 할 일은 널려있으며 그러므로 심심할 틈이 없다.

이런 대답을 구차하게 하고싶지도 않지만 해보았자 다음번에도 이런 대답을 요하는 똑같은 질문을 또 하기때문에 이제는 그냥 웃거나 "네"하고 인정해버리고 만다.


시어머니가 아닌 친정엄마였어도 마찬가지였을까. 라고 생각도 해보고 내가 너무 민감한것이라고 치부해보기도 한다.




"어머니오시니까 이렇게 하지 평소는 이렇게 안해요. 솜씨없어도 맛있게 드세요. 어머니"


효심과 의무감의 온 모드는 다행히 미소와 친절톤을 재빨리 되찾아 주었고 온 식구는 내가 처음 만든 전복미역국을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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