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영남 알프스는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시야 끝까지 황금빛 억새로 넘실대던 간월재, 운무에 가려 코 앞도 보이지 않았던 신불산, 암봉과 둥근 언덕, 황금빛 능선이 늘어서서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던 영축산.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면서도 '건강해지면 언젠간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올해 가을엔 영남알프스에 갈 생각이에요
은둔생활이 길어질수록 잔병치레가 늘었다. 운동 부족, 얕고 불규칙한 수면, 만성 수면 부족, 불규칙한 식습관, 영양 불균형, 식후 눕기, 과도한 스트레스, 불결한 방. 병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입원도 여러 번 했다. 은둔을 시작하고 체중이 늘어나면서 성인병 세트가 찾아왔다. 그리고 처음 들어본 자잘한 질병들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부모님이 보시기에 참 답답한 아들이었다. 취직은 신경 끄고 건강이라도 잘 챙겼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1년이 지날수록 건강은 악화되어 가니.. 도대체 방구석에서 뭘 하길래? 엄마는 가끔 답답한 마음에 농담을 하시곤 했다. "문 닫고 뭐 하니? 알 까는 거니?". 그럴 땐 난 웃으면서 "잘할게요. 엄마"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럼 엄마는 "그래"란 짧은 말로 대화를 끝내셨다. 부담을 줄까 봐 매 순간 걱정하시는 엄마다운 대화법이었다.
우울증 히키코모리는 의식이 머릿속에 머무르기 때문에 외부자극에 둔감하고,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참고 : 히키코모리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 그래서 조기에 치료될 병을 방치하기 쉽고 외출에 대한 거부감으로 병을 키우는 상황도 발생한다.
난 담낭염이란 질병에 걸렸었다. 헛구역질, 발열, 음식을 못 먹고 격통에 시달리는데도 '비만인이 또 과식을 해서 소화불량이 오셨네? 편의점 활명수 2개 먹으면 시원해지겠지' 같은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2일간 물도 못 마시고 눕지도 못하고 침을 끊임없이 뱉어내는 때가 되어서야 가까운 작은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담낭이 과도하게 부어서 밖으로 튀어나온 게 육안으로도 보이는데, 지금까지 병원에 안 오고 뭘 했고 어떻게 버텼냐며 빨리 큰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내일 가 볼게요"라고 말하자 의사 선생님은 "지금 당장 가시라고요. 지금!" 호통을 치셨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리고 바로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 간단한 복강경 수술은 여러 가지 일로 5-6시간의 수술이 되어버렸고, 20cm의 개복수술 흉터를 배에 남겨버렸다. 어리석고 어처구니없지만 그게 중증 우울증 히키코모리다.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병원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괴로워도 외출을 감행하곤 했다(최대한 가까운 병원). 떨면서도 병원을 갔고 병원에 다녀오면 뿌듯함을 느꼈고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꼈다. 병원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엄마한테 보내서 외출을 자랑하기도 했다. 병원은 내가 외출하게 만드는 유일한 강제적인 수단이었고, 자주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우울증 히키코모리가 병원에 주기적으로 갈 상황은 분명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한편으로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혹시라도 히키코모리 가족이나 친구가 병원에 가려는 낌새가 보이면 같이 외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정신과에 간다면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