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년 만에 수영장에 갔다.
모든 것이 낯설다. 여덟 개의 레인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수영을 즐기고 있다.
주차장에서 스포츠센터로 들어오는 입구에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는 자동판매기가 있다. 이리저리 작동하여 카드를 들이밀어 넣고 표를 구입했다. 3,500원. 라커룸이 깨끗한 얼굴로 맞이한다. 샤워실에서 몸을 씻는데 걱정이 앞선다.
-할 수 있을까?
-숨이 가쁠 텐데?
-도대체 얼마 만에 수영복을 입어보는 거야?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건너편에서 아쿠아로빅을 하고 있다. 대부분 여성분들이다. 강사의 동작에 맞춰 열심히 따라 하고 있다. 여덟 개의 레인이 마련되어 있고, 레인 앞에 중급, 상급, 오리발, 마스터, 걷기라고 표시되어 있다. 자신의 실력에 맞는 레인을 선택해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어느 레인을 선택하여 수영을 할까.
수영을 배운 지는 참 오래되었다. 서른몇 살에 배웠으니 30년이 넘었다. 4개의 영법을 다 배웠다. 젊었을 때는 접영, 배영, 평형, 크롤의 순서로 돌리는 강사의 호통을 들으며 열심히 팔을 젓고, 발을 찼다. 이른 새벽에 1.5km 수영을 하고 출근했었다.
마라톤을 하면서 수영장이 멀어졌고,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수영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었다. 젊었을 때는 정말 어쩌다 수영장에 가더라도 폼이 흩트러지지는 않았었다. 50 미터 접영을 해도 힘들 정도로 숨이 가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 옛날의 이야기였다. 나에게도 그런 화양연화 시절이 있었다.
마스터 레인을 선택했다. 잘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이용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 한가했기 때문이다. 레인으로 들어갔는데 물의 온도가 딱 적당하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보며 수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바라본다.
-저분은 팔동작이 참 예쁘구나.
-저분은 수영 좀 해보았구나.
수경을 내려쓰고 있는데 옆 오리발 레인에 있던 여자분이 말을 건넨다.
-수영하러 오셨습니까?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
수영장에 온 사람에게 수영하러 오셨냐고 묻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신지?
-우리는 수영보다는 물에서 놀러 왔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이럴 때 필요한 게 뭐?
그렇다. 현장 이탈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몸을 앞으로 쭉 밀었다. 물 위에 떠서 앞으로 밀려나가는 느낌이 참 좋았다. 고개를 돌려 호흡을 하면서 오른팔부터 저었다. 부드럽게 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왼팔을 젓고 호흡하며 오른팔을 젓는다. 그리고 가볍게 발을 찼다.
-할 수 있네! 할 수 있어!
10년도 넘게 수영복을 처박아 두었는데, 10년 만에 물에 들어왔는데 팔이 저어지고 발차기가 자연스럽게 된다. 한번 배워두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몸으로 배운 것은 역시 몸에 그대로 남아 있다. 5년 만에 탁구 라켓을 잡았을 때에도 예전보다 잘 칠 수 있는 것에 놀랐었다. 참 희한한 일이다.
50미터가 눈앞이다.
멈출까?
그대로 턴을 할까?
고민할 것도 없이 턴을 했다. 그리고 다시 50 미터를 돌아왔다.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부자 몸조심'이라고 일단 멈추었다.
오리발 레인에 있던 여자분들 넷이 모여서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다. 수영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나쁘게 말하면 쓸데없는 말이다. 수영을 몸으로 하지 않고 입으로 하는 것이다.
-어제 우리 집 양반이랑 시장에 가서 칼국수 먹었는데 맛나더라고.
-얼마인데?
-6,000원
-싸기도 하네
-우리 그만하고 칼국수나 먹으러 갈까?
-그러자. 수영이야 내일 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이분들은 말로만 칼국수를 먹을 뿐이고, 몸은 그대로 오리발 레인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수영장을 시장 분위기로 돌려놓은 채.
재밌는 것은 그 오리발 레인에서 숏핀을 끼고 수영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나 같았으면 그 여성분들의 수다를 견디지 못하고 오리발을 얼른 벗어던지고 다른 레인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남자는 네 명의 여자분들이 칼국수 이야기로 턴을 할 수 없도록 막아서 있는 레인에서 끝까지 숏핀을 사수하며 여자분들을 헤집고 힘들게 턴을 하고 있다.
-언니, 그런데 전철역 앞에 새로 생긴 미장원 가 봤어?
-몰라. 뭔 미장원이 생겼는데?
-언니 모르는구나. 그 미장원은 파마를 하면 먹을 것을 많이 준다고 하더라고.
-먹을 것? 뭘 주는데?
-가래떡을 구워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누룽지, 또 어떤 때는 인절미, 그것도 쑥인절미를 준다던데.
-그러면 가서 먹어야지.
-좋아 우리 칼국수 먹고 거기 가서 인절미 먹을까.
오리발 레인은 칼국수집을 닫고 미장원을 개업했다. 파마하면 떡을 주는,
칼국수와 떡을 실컷 팔고도 오리발 레인은 성업 중이었다. 사장에 새로 생긴 과일 가게, 주인이 바뀌었다는 족발집을 지나더니 드디어 종착역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오래 머물 것 같았다.
-우리 신랑이 말이야,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뭐가 어이가 없어? 뭔데?
-신랑이 잠을 안 재워? 호호호홍.
-언니는! 그게 아니고 우리 신랑이 어제 꽃을 사들고 온 거야. 뭐, 사랑한다나. 어쩐 다나.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야, 뒷조사해 봐. 분명히 뭔가 있어.
-내 말이. 그래서 내가 캐물었거든. 그런데 이 인간이 말을 안 해. 말을.
-너 조심해야겠다. 그래서 왜 꽃을 사 온 이유를 알아냈어?
-아무 이유가 없다는 거야. 집에 오다가 그냥 내가 생각나서 사 왔다는 거야.
-그 돈으로 먹을 사 왔어야지.
-그러니까. 못 줬어도 5만 원을 주었을 텐데. 그 돈으로 치킨을 사 왔으면 실컷 먹었을 거 아냐.
-그래도 사랑한다고 말했다며. 멋있기는 하다. 얼마나 낭만적이야.
-사랑도 젊었을 때 이야기지. 다 늙은 주제에 사랑이 밥 먹여 줘. 치킨이나 족발이 훨 낫지.
-남자들이 헛바람이 들어서 그래.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 지를 모른다니까.
어떤 분의 남편은 꽃을 사다 주고도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오리발 레인의 떠들썩한 세상을 뒤로하고 쉬지 않고 500m를 해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하는 거라 천천히 팔을 저었다. 숨도 안정되고, 팔다리도 가벼웠다. 100 미터를 돌아와서 턴을 할 때마다 성업 중인 오리발 레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500 미터를 돌았다. 마지막 터치패드를 찍었는데 오리발 레인이 조용하다. 문을 닫은 것이다. 수영을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여자분들이 주고받는 말들은 그대로 우리의 삶이었다. 다 그렇게 사는 것 아닌가.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옆 레인에 있던 남자분이 마스터 레인으로 건너온다.
-저기 죄송한데요. 팔 동작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호흡은요?
-아, 그게 그러니까
-마스터 레인에서 수영을 하고 계신 걸 보면 고수인 것 같고, 또 실제로 폼도 좋아 보여서요.
아니, 마스터 레인에 있다고 내가 엄청 잘하는 마스터인 줄 알았다고? 아닌데,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정도로 마스터가 아닌데. 졸지에 마스터가 되어 버렸다.
-저도 잘 모르는데요. 팔꿈치를 삼각형의 꼭짓점이 되도록 팔을 돌려야 한다고 배웠어요. 손끝에서 힘을 빼어야 한다고. 그리고 머리를 들지 말고 옆으로 돌려야 하고요. 아, 머리를 돌릴 때 눈은 다리 쪽을 바라봐야 해요.
수영을 처음 배울 때 강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말해줬다. 그리고 잘 안되어도 꾸준히 해보면 자기도 모르게 몸이 익히게 된다고.
수영장에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30년이나 지났는데도 몸으로 익힌 까닭에 영법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을 보고 역시 몸으로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