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코앞이라고 아내가 마트에 가자고 한다. 한 달 전에 늑골 골절상을 당했는데 시간이 약이라고 이제 좀 나아진 모양이다.
ㅡ 애들도 온다는데 뭐라도 좀 만들어 놓아야지.
ㅡ 그럼 가봅시다.
곁에 사는 딸은 시부모님이 올라오신다고 해서 초비상이 걸린 상태이다. 친정 엄마로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당장 아픈 몸을 이끌고 출정할 태세이다.
ㅡ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더구먼 뭘로 시부모님을 맞이할 거야? 내가 좀 만들어서 가져갈까?
당사자인 딸보다 아내가 더 걱정이다.
ㅡ 아냐, 엄마. 어머님이 다 해오신다고 했어. ㅋㅋ '며느리집에 가봐야 양념이 있어, 반찬이 있어'하시며 다 해오신다고 하시더라고.
그래도 딸은 시부모님과 사이가 좋게 지낸다. 사돈들이 잘 받아주시는 것이지만, 그래도 바쁜 남편 대신 이모양저모양으로 잘 챙겨드리는 것이 한 몫하는 것 같다. 전화도 자주 드리고, 손주들 불러 영상통화도 연결해서 그렇게나마 손주들 얼굴 보여 드린다. 그렇게라도 인정받으며 사는 게 좋다.
ㅡ 설날에 시부님이 돌아가시면 점심때 세배하러 갈게.
사위도 휴가를 받아 같이 온다고 한다.
혼자 사는 아들은 설 전날에 오겠다고 한다. 설날에 안 와도 좋으니 좋은 사람이나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다.
하여튼 그래서 아내는 자식들 생각에 아픈 몸으로 마트로 가야 한다고 한다. 얼른 차를 대령하여 모시고 갔다. 아내의 장보기는 항상 세 곳에서 한다.
첫째, 채소와 고기는 단연코 하나로마트에서 사야 한다. 싱싱하고 가격이 싸다는 것이 아내가 내세우는 이유이다.
둘째, 과일과 닭고기는 시장에서 사야 한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시장 구경 갔다가 어느 과일 집에서 사 온 사과 맛에 반한 뒤로는 무조건 과일은 그 집에서 사야 한다. 하림 닭을 파는 가게에서 사 온 닭이 품질이 좋다며 닭은 오직 거기에서 사야 한다.
셋째, 홈플러스는 폰으로 적립한 포인트가 쌓였을 때, 또는 할인판매를 한다는 알림을 받았을 때는 득달같이 달려간다. 어느 때는 세 곳을 다 돌아다니면서 장을 보기도 한다.
ㅡ 그냥, 한 곳에서 다 사면 안 되나? 물건이 다 그게 그거일 텐데.
ㅡ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운전이나 잘해요.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사모님이 다른 것은 아무 데서나 사도 되지만 젓갈만큼은 꼭 시장 어느 집에서 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집은 국산 소금으로 직접 담그는 집이라는 것이 이유라고 한다. 목사님도 아무 데서나 사라고 했다고 된통 깨졌다고 했다. 아내는 사모님의 말을 적극적으로 수긍했다.
ㅡ 남자들이 뭘 알아. 아무 데서나 막사는 것이 아닌데도 남자들은 왜 그러는지 몰라.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하나로 마트와 시장만 간다고 한다. 홈플러스도 명절맞이 할인 판매를 할 텐데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 틀림없이 홈플에서는 사고 싶은 물건을 할인 판매를 하지 않는 것이 뻔하다.
동선으로 볼 때 일단 하나로마트를 갔다가 시장으로 돌아서 오기로 했다. 하나로마트 주차장에 주차하고 카트 하나를 끌고 아내 뒤를 졸졸 따라간다.
일단 무를 사려나 보다. 수북하게 쌓아 놓은 무를 죄다 살펴본다. 그냥 하나 집어 오면 될 것을 보고 또 보고도 이리저리 매의 눈초리로 살펴본다. 다른 여자분도 무를 사려나 보다. 그분도 마찬가지다. 한참 후 무를 봉지에 담는다. 그 여자분은 아내가 안 좋다고 내려놓은 것을 담았고, 아내도 그 여자분이 퇴짜를 놓은 것을 담는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두부를 산다. 농협에서는 국내 생산만 팔고 있으므로 두부는 다 국산콩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늘 사 먹던 상표를 집어 들면 되는데도 진열된 모든 상품을 다 살펴보고 나서 하나를 담는다. 무게도 똑같고 가격도 비슷한데도 그러는 것이다.
손녀가 호박전을 좋아한다고 애호박을 하나 산다. 말할 것도 없이 한참을 골라서 산다. 무엇이든지 그냥 사는 법은 없다.
돼지고기도 산다. 어느 날 느닷없이 돼지고기에서 냄새가 난다며 쳐다보지도 않는다. 산에 같이 다니는 누님이 돼지고기는 안 먹는다고 해서 입이 고급이라고 했는데, 아내가 그렇다.
그래도 소고기는 잘 먹어서 소고기를 사 먹자고 해보지만 내가 좋아한다고 돼지고기를 산다. 그나마 하나로마트에서 사 온 돼지고기는 냄새가 덜하다며 몇 점은 먹는다. 그래서 무조건 돼지고기는 하나로 마트에서 산다.
나는 안다. 아내가 저렇게 해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집도 샀고, 차도 샀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이럴 때는 아무 소리하지 않고 조용히 카트를 밀고 따라다녀야 한다.
브런치 어떤 작가님이 연재하고 있는 '아저씨 시리즈https://brunch.co.kr/@byulo2/132'를 보면 남자들은 하는 짓이 다 똑같다. 그 작가님이 묘사하고 있는 '아저씨'는 바로 나다. 뭘 할 줄도 모르고, 한다고 해도 온 집안을 다 어질러 놓는다. 그 작가님에 따르면 그게 다 y염색체 때문이란다. 그래서 아저씨에게는 아줌마가 있어야 한다. 혼자 살면 밥도 못 먹을 판이다. 카트를 밀고 따라다니면서 고르고 또 고르고 있는 아내에게 감사한다.
이제 시장에 있는 닭집으로 간다. 하림 닭을 파는 가게인데 닭을 사야 한다면 언제나 이 집이다. 닭을 사고 나서는 과일가게로 간다. 이사 오면서부터 과일은 늘 정해진 가게에서 산다. 아내도 나도 사과를 좋아해서 일 년 내내 사다 먹는데 오직 시장 모퉁이에 있는 '부흥청과'에서만 산다. 사과를 사고, 손자가 좋아하는 배도 산다. 레드향인지 천혜향인지 손주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조건 산다.
과일가게 사장님이 영수증에 사인을 해주면서 옆 골목으로 가면 2만 원짜리 온누리 상품권을 주니까 받아가라고 한다. 아내는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가보니 줄이 길다. 아내는 차례를 기다리고 나는 구입한 물건들을 양손에 들고 주차장까지 가서 차에 두고 왔다.
가족들과 같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내도 힘들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불평 없이 잘해주는 아내에게 늘 고맙다. 가난한 살림에도 내색없이 가정을 잘 지켜준 아내에게 감사하다. 이사 오면서 구입한 집을 아내 명의로 했다. 꼭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뭐 대단하겠냐만 그렇게라도 해주는 것이 보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와서 왁자지껄하며 먹는 밥상이 즐겁다. 세배하는 모습이 흐뭇하다. 세뱃돈을 챙겨 주는 아내의 손길이 곱다. 늙어서 누리는 행복은 별 것이 아니다. 그냥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행복이다.
돌아가는 아이들 손에 있는 것 다 싸서 보내는 것이 잔잔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불편한 몸으로 설날을 준비하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어 자식들 손에 들려 보내고는 또 허탈감에 빠진다. 그래도 설날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