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제炎帝라고 하는가. 가마솥, 용광로, 마그마. 참 독한 수식어를 붙인다. 겨울은 기껏해야 동장군冬將軍이고, 아무리 극심한 추위라도 얻어 듣는 것이 한파寒波에 불과하다. 여름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가를 한눈에 보여준다.
아침부터, 아니 새벽보다 먼저 염제는 발걸음을
쿵쾅거린다. 하늘 아래 온 세상이 폭염경보에 짓눌려 흐느적거리고 있다. 얼음물을 마셔야 하고, 찬물을 연거푸 뒤집어쓰고도 모자라 에어컨 앞에 붙어 있다.
온열질환으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쏟아지는 불볕에 쓰러진다. 무섭다. 여름이, 폭염이, 염제의 포악한 횡포가 무섭다.
사람이 사람인 건 이겨내는 힘이 있는 까닭이다. 부모를 잃은 슬픔도 눈물을 흘려 이겨내고, 자식을 떠나보내고도 가슴 치며 통곡하면서 견뎌낸다.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사업장이 한꺼번에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는 게 사람이다. 하물며 이깟 더위쯤 넘어서지 못할까.
환기를 핑계 삼아 밖으로 나갔다. 제법 시원한 바람이 어둠이 내린 거리를 흔들었다. 바람을 있는 대로 끌어안고 체육공원으로 갔다. 텅 비어 있다.
체육공원의 밤은 고요했고 우리의 발걸음은 즐거웠다
ㅡ 달려볼까? 옛날 생각하며.
아내는 이미 달릴 태세다.
문득 중인리 들판이 그립다.
벌써 25년이 흘러갔다. 어쩌다 마라톤에 빠지고, 선배와 둘이서 전주마라톤클럽을 만들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때가 있었다. 아내까지 꼬드겨 주로走路에 세웠고, 1년이 지날 때 처음으로 서울마라톤 풀코스를 나란히 달렸다. 마라톤은 신세계였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족저근막염으로 마라톤을 그만둔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정형외과 의사도 못 고친 족저근막염. 발가락 스트레칭과 잔디밭 걷기로 어렵게 회복하고는 마라톤화를 벗었다. 그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섰다.
ㅡ좋아. 8분대로 즐겨보자고.
앞서 달리는 아내를 따라간다. 두 바퀴를 달렸는데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슬리퍼를 신고 있었지만 다리도 괜찮았다.
마라톤은 혼자 달려야 한다. 고독한 시간이다. 그러나 마라톤은 고독하지 않다. 혼자 힘으로 달리지만 혼자가 아니다. 도로를 달리는 까닭에 친구가 많다. 지나가는 사람들, 고층건물, 가로수, 들꽃, 지나가는 바람이 모두 동반자이다. 지쳐가는 내 몸과 마음이 늘 같이한다. 그래서 나를 가장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온다. 마라톤의 매력이다.
ㅡ이러다 잠자고 있는 마라톤 세포가 깨어나는 거 아냐?
아내가 슬쩍 흘린다.
ㅡ가을에 시에서 주최하는 마라톤대회에 나서볼까.
ㅡ웃기는 건 우리가 점점 빨리 달리고 있다는 거야.
ㅡ그렇네. 숨이 차지 않아.
ㅡ내친김에 5km 정도 달려볼까.
ㅡ큰일 날 소리. 탈나기 전에 여기서 스톱!
다섯 바퀴를 달렸다. 대략 2km 정도. 8분 페이스를 유지했으므로 달렸다기보다는 빠르게 걸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름의 폭염에 맞서는 한 방법일까. 해거름에 뒷산을 오르는 것도 좋았지만, 밤에 이렇게 아주아주 가볍게 달려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고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시니 갈증도 가시고, 더위도 물러가고, 몸도 가뿐하고 세상 즐겁다.
염제에 주먹 쥐고 맞서지는 말자. 그렇다고 오그라들지도 말고, 적당한 거리에서 마주 서 보자. 기운 차리고 가라앉는 힘을 추켜올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