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걸음, SYDNEY

03 타이베이라면, 디화제 迪化街라면

by 힘날세상
타이베이의 속살 디화지에 迪化街. 7년 만에 들어선 디화지에는 낡아서 아름답지 않았다. 갈 곳이 점점 사라져 간다.




타이베이 타오위안 공항에 내렸다. 편안하다. 등을 토닥여 안아주는 할머니의 손길. 행복까지는 아니어도 안락한 소파에 앉아 있는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타이베이를 중간 경유지로 택한 것은 비행기 타는 시간을 둘로 나눠 좁은 좌석의 불편함에 맞서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타이베이 체류시간을 좀 늘려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얻은 레이오버 10시간. 타이베이를 즐기기에는 말도 안 되는 짧고 짧은 시간이지만, 언제나 걷고 싶고, 숨 쉬고 싶은 여행지에서 잠시 깊은 호흡을 해보고 싶었다.
공항고속철도를 타고 타이베이 메인역에서 내렸다. 재밌는 것은 레이오버 승객에게는 타이베이 왕복 무료승차권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리저리 비틀걸음을 걷고 나서야 작은 부스를 찾아냈다.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중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했기에 원어민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하는 딸과 사위가 일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2018년 타오위안 공항에서 가오슝까지 THSR 특급열차를 타고 가던 때를 소환해 내었다. 그 와중에도 먼저 출발하는 완행열차(普通車)는 보내고 7분을 더 기다려 급행(直達車)을 탔다.


40분 후 디화지에迪化街에 섰다. 망고빙수芒果雪花氷. 평소에는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 같은 차가운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여행자의 옷을 입었다는 한 가지 이유를 내세우며 아무런 저항감 없이 빙수집으로 들어선다. "悠哉悠齋" 그 간판, 그 좁은 가게, 넉살 좋은 그 주인 모두 그대로다. 좁은 탁자에 앉아 芒果雪花氷의 부드러움을 즐긴다. 크하하하. 타이베이에 내리기 잘했다. 거기에 더해 날씨마저 선선하다니.

ㅡ이렇게까지 환영해 준다고!
ㅡ그냥 받아 즐기자고.

디화지에迪化街가 좋은 건 거리에 내려앉은 주름살이다. 낡은 거리를 걷고 있으면 6~70년대의 이야기들이 줄지어 이어지는 느낌이다. 세련되지 않은, 그래서 정겨운 라오지에老街.


2010년에 루캉鹿港에 갔다. 대만 중부지방을 돌아다닐 때였다. 좁은 길, 많은 사람들. 그때 그 좁은 골목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던 정情. 아침마다 걸어서 출퇴근하던 전주 중화산동의 골목길. 연탄재가 발길에 차이던 골목의 향수가 루캉의 라오지에老街에는 그대로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밀려들어오는 현대화의 물결을 거스르지 못하고 많이 가다듬어지고, 세련미가 덧입혀지기는 했지만, 그런 정감情感이 아직도 디화지에迪化街에는 남아 있다. 그 작은 빙수 가게 "悠哉悠齋"가 반갑게도 그 간판을 그대로 달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늑함이었다.


디화지에迪化街의 아늑함에 안도하면서도 시먼딩西門町은 가고 싶었다. 그만큼 여행자의 마음은 간사하다고 둘러댔지만, 우스운 건 사실이었다.

날마다 새로움으로 덧칠하는, 생동감이 활개 치는, 오롯이 현재만 가득한 시먼딩西門町. 거리마다 사람들은 넘쳐났고, 저마다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게들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럴듯한 음악을 틀어 놓고 추파를 던진다. 디화지에迪化街는 이곳에 발을 디뎌 놓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거리에 서서 지파이(鸡排 jī pái) 받아 든 손주들은 또다시 샤오롱빠오(小笼包 xiǎo lóng bāo) 노래를 불렀다. 육즙이 가득한 샤오롱빠오 몇 판을 먹고 나서야 시드니로 가자고 한다.


어느 때든, 누구 와든 좋은 여행지가 타이완이다. 잘 갖추어 놓은 여행 인프라. 친절한 대만 사람들, 값싼 물가와 맛있는 음식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타이완이 주는 편안함. 타이완이 품고 있는 여행의 이유이다. 숙제로 남아있는 대만 남동부 여행. 칸딩, 타이동, 뤄다오, 핑동 그리고 펑후다오.

시먼딩의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그녀를 보았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다 받아내고 있던 그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비 내리는 횡단보도에 서 있었을 뿐이고, 무언가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고 느낀 건 어디까지나 나의 독단이었다. 그 독단적인 수 읽기를 얼마 전 그녀의 이야기를 브런치에 흘려 놓았었다.


https://brunch.co.kr/@himnal/161



비행기 시간은 다가오는데 걸음은 여전히 대만의 걸음을 걷고 싶다. 비 내리던 진과스의 풍경, 철길이 넘쳐나는 듯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스펀의 천등 날리기, 지우펀의 좁고 좁은 골목과 앙증맞은 카페. 유황가스가 범벅이 되어 있던 양밍산 자락 딴수이의 저녁녘. 이제 두고 가야 한다. 어느 날 겨울 다시 와야지. 와서 타이베이의 시간을 즐겨야지.


시먼딩에서 메인역까지 슬슬 걸어간다. 가끔씩 뜨거운 열기기 몰려왔지만, 예서제서 불어닥치는 바람줄기를 따라 이제 막 짙어가는 밤길을 품으며 걷는다. 또 다른 여행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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