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공항, 머물러 있어보고 싶은
파릇파릇했다.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시드니 공항은 몇 송이 노란 꽃망울로 낯선 사람들을 맞았다. 골든 와틀Golden Wattle이라고 했다. 봄의 첫머리 9월 초에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는 노란 그 꽃이 호주의 나라꽃 國花라고. 그 노란색이 호주를 대표하는 색깔이 되었다고.
어딘지 모르게 쭈뼛쭈뼛한 걸음으로 공항을 나왔을 때 가을 하늘처럼 푸른 창공을 돌아내리는 상쾌한 바람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저만큼에서 넉넉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정감 어린 햇볕과 함께. 호주는 그렇게 다가왔다. 편안함이었다. 느긋함이었으며, 여유로움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여행인데?"
사실 잔뜩 긴장했었다. 캐리어에 필요한 것들을 넣으면서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기는 처음이다.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호주는 입국이 까탈스럽다고 했다. 가져가는 식품은 리스트를 만들어 곱게 프린트해 가야 하며, 복용하는 약품 역시, 어떤 성분의 약인지 사진과 함께 약명과 효능을 잘 정리해 두어야 한다고 했다. 처방전까지 챙겨두라고 했고, 그것도 안되면 약국에서 조제해 줄 때 같이 주는 약 봉투라도 꼭 챙겨가야 한다고 했다. 오세아니아 대륙의 독자성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그랬다.
"이런 걸 어릴 때에는 '싸게 맞는다'라고 했는데......"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아내는 굳이 그렇게까지 예민해질 필요가 있느냐고 입울 비쭉 내밀었다. 그러건 말건 하늘을 참 푸르렀다.
남의 동네를 지나가다가 그 동네 아이들에게 가진 걸 털리거나 몇 대 맞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흔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텃세였다. 우쭐함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 흔한 일을 호주라는 나라가 굳이 한다고 했다. 자기 나라의 생태계를 지키겠다는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싸게 주려는' 일은 또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처방전에 약봉투, 음식물 리스트까지 작성하여 갔는데 호주는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지 않았다. 입국 심사는 비대면. 인천공항으로 귀국할 때처럼. 여권 스캔하고, 지문 찍고 카메라 한 번 들여다보면 끝이었다. 그런데 세관을 통과할 때는 입국 신고서를 꼼꼼히 확인했고, 식료품 리스트를 보여야 했다.
"very good!"
그는 사진까지 덧붙여 정리해 놓은 식료품 리스트를 보더니 엄지 척을 하며 웃어 보였다. 가져간 처방전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허망(?)했다. 밤을 새우며 공부했는데 시험 문제가 너무 쉬웠던 느낌, 꼭 그것이었다. 그래도 쉬운 게 좋긴 좋았다.
우버택시 정류장은 한산했다. 그 한산함을 더 부추긴 건 뽀송뽀송한 햇볕과 가을 벌판을 건너온 듯한 청량한 바람이었다. 햇볕과 바람. 잘 살펴보면 이들은 아주 그럴듯한 조합이다. 더구나 가을의 느낌을 풍기고 있다면 완벽하기까지 하다. 여긴 이제 봄을 시작하고 있다는데 가을의 느낌이라니.
택시를 부르는 것은 내려놓고 그 한산함을 즐긴다. 작은 정원을 바라보고 앉았다. 어디선가 흰구름을 더불고 다가온 하늘이 참 좋았다. 우리 동네 청학도서관 벤치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다름이 없었다. 도서관에 갔다가 하늘과 바람에 붙잡혀 책대신 하늘만 읽다가 돌아온 적이 더러 있었다. 소녀적 감상感想은 고희古稀에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도회지의 하늘은 그렇게 청정무구한데 그 아래에서 분주한 사람들은 탐욕에 젖어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지도 않고, 산등성이에서 내려온 바람쯤은 되작거릴 가치조차 없다고 밀어내 버린다. 여유가 없다. 어느덧 도서관 벤치에도 가을이 내려앉을 거다. 말갛고 통랑通朗한 햇살이 바람을 따라 마음에까지 내려오면, 거기에 또 얼마나 앉아 있어야 할까.
에어비앤비 숙소는 3시에 체크인이다. 숙소 아래에 자리 잡은 카페 "Heaven"의 커피맛이라 그만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면 서둘러 가서 롱블랙(우리가 말하는 아메리카노)이나 한 잔 하면서 기다려 볼까 했지만, 우리는 공항의 햇볕과 바람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그만큼 남반구의 하늘, 바람, 햇볕은 새살새살거리며 다가왔다.
여행은 공항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한 번도 공항을 느껴보지 못했다. 단순히 입출국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 시드니 공항(Kingsford Smith Sydney Airport)은 묵직한 선물을 안겨 주었다. '멈춤의 미학'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멈추어 있으면서 다시 들여다보는 나. 나의 내면. 이번 여행에서 내가 걸을 걸음걸음에는 무엇이 담길까. 마주하게 되는 호주와 호주 사람들과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받아들일까. 마음 안에서 콩닥거리고 있는 오페라하우스나 블루마운틴의 숲길은 어떤 채도로 다가올까. 결국 나는, 나의 여행은 어떤 여행자가 될 것이고, 어떻게 모양으로 디자인될까.
대충 집어 한 입 베어문 햄버거에서 패티에 발라놓은 양념이 흘러내렸고, 방금 씻고 오긴 했지만 햄버거를 잡고 있는 손이 더럽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그 순간 어이없게도 니하일 바흐친을 생각해 버렸다.
러시아의 문학평론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의 '카니발carnival' 이론이라니. 그가 말하는 것처럼 '카니발carnival'이 일상의 규칙이 일시 중단되고, 기존의 제도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어, 계층이나 특권을 모두 내려놓고 낯선 이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다양한 감정과 에너지가 혼재하는 화려한 '축제의 공간'이라면 열흘 동안의 호주 여행도 충분히 그렇지 않을까. 모든 것이 전복顚覆되어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고 변화하는 것이 아닐까. 그가 말하는 '카니발carnival'이 기존의 것을 버리고 미래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여행도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의미로 태어날 것이다. 꼭꼭 씹어 볼 일이다.
우버 택시가 왔다. 어쩌자는 건지. 택시는 놀랍게도 기아 카니발이었다. 우리를 태운 흰색의 카니발은 시드니 시내로 향했다. 새로운 '카니발carniva'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