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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음, SYDNEY

06 오페라 하우스를 만나는 방법

by 힘날세상

이른 봄의 햇살은 참 강렬하게도 다가왔다. 서큘러키 Circular Quay에서 트램을 내려서는 순간이었다. 아직 한여름의 폭염에 익숙해 있는데도 시드니의 햇볕은 날카로웠다.


몇 개의 부두를 지나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끝이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사람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냥 그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나 또한 '사람들'이 되어 갔다. 바람이 불었고, 햇살은 흔들렸다. 그루즈라고 불리는 적당한 크기의 배들이 서큘러키Circular Quay로 뱃머리를 들이밀며 햇살에 점령된 부두의 안쪽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부둣가 의자에 앉아 배를 타기도 하고, 배에서 내리기도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에서 몰려온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내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 들어야 했다. 그때 느닷없이 황동규의 "조그만 사랑 노래"라는 시가 생각났다. 나는 좀 엉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구절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ㅡ 황동규, <조그만 사랑 노래>에서


여행자는 그의 말대로 "몇 송이의 눈"이다. 항구로 들어왔으나 정박하지 못하고 다시 떠나가는, 지금 서큘러키Circular Quay의 크루즈처럼. 이방인의 걸음은, 마음은 한없이 떠다니는 성긴 눈이다. 그 애처로움이 여행의 어디쯤에는 담겨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배고픈 작가의 손끝에서 글이 생명력을 얻어 숨을 쉬듯이.


오페라하우스를 만나러 가는 길목인 서큘러키Circular Quay에서 나는 조금도 바쁘지 않았다. 손에 쥔 눈깔사탕을 아까워 들고만 있었던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오페라 하우스로 가는 길을 아껴가며 걸었다. 바다에 드러눕는 윤슬에 빠져들었고, 나란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양의 젊은 연인들과 시간을 나누어 보려고 했다. 앵무새 두 마리를 어깨에 얹고 해바라기를 하다 지나가는 어린이들을 기어이 불러 세워 머리 위에 앵무새를 올려 주던 금발의 할머니. 그녀의 넉넉한 웃음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에 앉은 앵무새를 맞이하는 어린이들은 그 유명하다는 오페라하우스로 가는 길목이었다.


남태평양으로 빠져나가기 직전 한참 몸을 부풀리고 있는 파라마타강Parramatta River 하류의 언덕. 로열 보태닉 가든 Royal Botanic Garden Sydney이라고 통칭通稱하지만, 로즈 가든 배즈Rose Garden Beds, 올드 밀 가든Old Mill Garden, 파이오니어 가든Pioneer Garden, 서큘렌트 가든Succulent Garden이 힘을 합하여 아름다움을 펼쳐 놓는 곳. 누구는 그 황홀함에 함몰되어 푸른 잔디밭에 누워 버리고, 누구는 정원을 지키고 있는 노거수老巨樹에 기대어 남태평양을 거슬러 오는 바람을 즐기고, 또 다른 누구는 웃옷을 벗어버리고 남반구의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러닝의 황홀감에 빠져드는 곳. 로열 보태닉 가든 Royal Botanic Garden Sydney 아래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는 강물에 뛰어들 듯한 자세로 자리 잡고 있었다.



KakaoTalk_20250926_084115106.jpg 하버브리지 앞에서 한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강렬함이었다. 거기에다 노을에 젖은 모습이 정말 궁금했다.


오페라하우스에 다가가기도 전에 눈길은 이미 하버브리지Harbour Bridge와 정분情分이 나고 말았다. 1932년에 세웠다는, 일몰에 보아야 한다는. 세계 7대 마라톤에 속하는 시드니 마라톤 주자들이 탄성을 자아내며 달린다는 하버브리지Harbour Bridge. 남태평양을 거슬러온 바람이 파라마타강Parramatta River으로 깊숙이 들어가 부서지고 쪼개지면서 일으킨다는 하버브리지Harbour Bridge의 일몰. 그러나 아직은 한낮. 하버브리지는 밋밋한 철골구조 속에 자신의 매력을 꼭꼭 숨겨놓고 있었다.



저만치 오페라하우스가 미소를 짓고 있다. 이마에는 시드니의 강렬한 햇볕을 받아내며 한낮의 시간을 흘리고 있다. 모여든 사람, 사람들. 사진이나 한 장 찍고 돌아서기에는 바람이 너무 좋았다. 방파제 비슷한 구조물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제는 하버브리지도, 오페라하우스도 보이지 않는다. 작은 카페에서 늘어놓은 탁자에 앉아 있는 남아메리카에서 온 듯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강렬한 빨간 옷을 입은 남자와 눈부시게 흰 빛을 발하는 블라우스를 입은 머리가 긴 여자. 그들에게 내려앉는 햇볕. 열정적인 삼바 댄스라도 한 판 출 듯한 느낌. 무언가 격렬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가야금 병창 가락에 맞추어 펼치는 우리의 춤사위와는 어딘지 맞지 않을 듯한 느낌. 오페라하우스가 풍겨내는 느낌이고 분위기였다.



KakaoTalk_20250926_084142932.jpg 딱 여기까지 가서 걸음을 멈추었고, 돌담에 기대어 앉아 오페라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으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제법 웅장하게 다가왔으나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 떨어져서 오페라하우스의 속삭임을 듣고 싶었다. 정열적이라는 말을 생각해 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지붕은 힘이 넘치고 있었다. 느닷없이 Bizet의 Carmen이 생각났다. 바닷가 구조물에 기대어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Bizet의 Carmen을 생각하다니. 도발적이라는 생각을 했으나 폰을 꺼내고, 유튜브를 재생하고,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볼륨을 높였다. 세상은 Carmen이 부르는 하바네라habanera 뿐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열정적인 삼바댄스가 슬몃슬몃 끼어들었다. 칼멘을 들으며 삼바댄스를 생각하다니. 여행의 한 단면이라고 말하기에는 내가 혼란스러웠다.


광고쟁이 박웅현은 <여덟 단어>에서 인생을 사는 여덟 가지 지혜를 말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견見'이다. 쉽게 말하지 않고 왜 어렵게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見'에 담긴 의미가 들여다본다는 것이고, 들여다봐야 다른 것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見'은 비틀어서 다른 시각으로 보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가 바라보는 것처럼 세상을 획일적인 고정관념으로 바라보지 말자는 것 말이다.


心不在焉 視而不見 廳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그 맛을 모른다.


오페라하우스 건물만 바라볼 일이 아니다. 사진기만 들이댈 일이 아니다.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고, 얼마나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이어폰으로 얼렁뚱땅 칼멘을 듣는 것으로 얼마나 고상한 체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건물만 보고 돌아서기에는 시드니의 하늘이 너무 파랗기 때문이다. 돈 호세와 칼멘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사랑은 영원한 까닭이다. 그러나 오페라하우스는 로열 보태닉 가든Royal Botanic Garden Sydney 끝자락에서 아무 말 없이 파라마타강Parramatta River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KakaoTalk_20250926_084115106_01.jpg 서큘러키Circular Quay를 오페라하우스를 부제副題로 바라보았고, 나는 여행자가 아니라 관광객이 되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서큘러키Circular Quay를 지나 하버브리지 아래로 건너왔다. 바람은 여전히 머리칼을 흔들었고, 낯선 여행자의 걸음은 혼탁했다.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럴 땐 진한 커피가 제격이다. 거의 에스프레소에 가까운 롱블랙 한 잔. 마음을 씻어주기까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가라앉혀 주었다. 서큘러키Circular Quay를 발판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크루즈 여객선이 시선을 가로막았다. 배가 지나가는 사이로 저만큼 멀어져 간 오페라하우스를 바라보았다. 이어폰 따위는 꼽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앉은 체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더 이상 칼멘은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여행객이 아니라 관광객이 되었다. 거리가 멀어진 까닭일까. 그냥 아름다운 건물로만 보였다. 마음이 편했다. 로열 보태닉 가든Royal Botanic Garden Sydney을 달리는 상상을 했다. 숨이 가쁠 정도로 힘껏. 그것은 순전히 오페라하우스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다음에 다시 시드니에 온다면, 오페라하우스에 함몰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오페라하우스는 나를 흔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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