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커피와 Airbnb, 그리고 소고기
호주 여행을 계획하면서 오페라 하우스나 블루마운틴 이상으로 앞자리를 차지한 건 우습게도 소고기였다. 호주 청정우. 저녁마다 벌인 소고기 파티. Airbnb는 그 마당을 편안하게 펼쳐주었다.
공항에서 타고 온 우버택시 기사는 정확하게 Airbnb 숙소 입구에 내려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입구보다 입구 출입문을 열 수 있는 키부터 찾아야 했다. 호스트가 알려준 골목을 찾아갔다. 쇠파이프에 열몇 개나 되는 키박스가 걸려 있었다. 키박스를 특정해주지 않아서 알려준 번호를 돌려가며 아홉 번 만에 키를 꺼냈다. 이젠 출입구를 찾아야 했다. 크고 높은 주상복합 아파트를 한 바퀴 돌며 우리는 중국인인 Airbnb 호스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ㅡ기어이 중국 사람 티를 팍팍 내는군.
ㅡ맞아, 어떻게 키를 그렇게 건네줄 수가 있어.
ㅡ거기에 키박스가 열몇 개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여러 채의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게 아닐까.
ㅡ그건 중요하지 않고 다른 건 다 사진으로 올려 주었으면서 왜 입구는 알려 주지 않았을까.
ㅡ덕분에 스타벅스, 맥도널드, 맥주 가게, 그 유명하다는 커피숍 Heaven도 보았으면 좋은 거 아냐.
캐리어를 끌고 바람 부는 골목을 따라 건물을 한 바퀴 돌고서야 우리가 내렸던 곳이 입구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 전지적 시점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면 깔깔대며 웃었을 것이다.
그 바람에 Heaven을 보았다. 그 유명하다는 커피숍 Heaven. 오후 3시에 문을 닫는. 오직 테이크 아웃만 되는 커피숍 Heaven.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샀는데 초코 가루를 잔뜩 뿌려 주었다.
ㅡone long black, one flat white!
어디선가 얻어들은 대로 했다. 호주에서는 아메리카노를 long black, 우리가 말하는 라떼는 flat white라고 한다는 것을 내가 어디서 들었더라. 커피를 내주는 중국인 듯한,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혀를 굴려 버터 발음을 하던 그 아가씨는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나의 영어에 대해 1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냥 상냥한 웃음을 건넸는데 어쩌면 그게 비웃음은 아니었을까.
끝끝내 우리는 길바닥에 놓여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겉으로는 우아한 척했지만 사실은 조급했다. 아직도 숙소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도 커피부터 한 잔 마실 수 있었던 건 늙은 걸음이었기 때문일 게다.
long black은 거의 에스프레소 수준이었다. 그때서야 커피를 따라주는 종이컵이 그렇게 작았던 이유를 알았다. 평소에도 아주아주 연한 커피를 마시는 나는 기어이 백팩에 들어 있던 반쯤 마신 생수병을 꺼내 그 진한 커피를 섞어 버렸다. 그제야 간이 맞았다.
ㅡ그래, 이 맛이야.
늙어서 좋은 건 법과 도덕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생수병에 섞어 마시는 아메리카노. 폼나지 않는가. 아주 은은하게 담겨 있는 아메리카노는 그 향을 즐길 수 있는 자만의 것이다. 커피는 절대로 멋으로 마시지는 않는다. 비가 오지 않는 이상엔.
그 은은한 커피 향과 함께 숙소의 문을 열었다. Airbnb. 호텔을 버리고 Airbnb를 택한 건 오로지 하나, 소고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침실과 거실, 넓은 부엌에 커다란 원형식탁. 우리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기엔 딱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안성맞춤이랄까. 우리의 Airbnb는 그렇게 다가왔다.
자유여행을 다닐 때 우리는 거의 Airbnb를 이용했다. 2010년 싱가포르 여행을 시작으로 오사카, 대련, 타이베이 등등. 2014년 대련 여행 때는 내가 숙소를 예약했는데 '화양년화 2기' 2310호는 너무나 호화판이었고, 최고의 뷰를 보여줬다. 근처에 있는 까루프에서 이것저것 사다가 고기도 굽고, 아들이 해산물 요리도 해서 저녁마다 파티를 벌였다. 그때부터 숙소는 언제나 Airbnb를 이용했다.
Airbnb가 좋은 점은 가정집의 느낌을 즐기면서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수건 같은 것을 직접 세탁해서 써야 하지만, 입고 다니던 옷도 빨아 입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어 좋다.
이번 시드니 여행도 숙소를 Airbnb로 정했고, 아주 만족했다. 시내 중심가 차이나 타운에 위치해 있어서 여러 가지로 편리했다. 주변에 대형 마트, 한국인이 운영하는 면세점, 한인마트, Paddy's Markets Haymarket 등이 있어서 편리했다. 바로 옆에 트램 노선이 연결되어 오페라하우스에 갈 때도 편리하게 이용했다. 달링하버로 연결되는 텀바롱 공원 Tumbalong Park이 있어 아침 러닝하기에 그만이었다. 아쉬운 것은 공원에 중국식 정원과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국음식점에 가보지 못한 것이다. 시드니에 와서 중국식 정원은 어딘가 주제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이 앞섰기에.
첫날부터 소고기를 찾아 나섰다. 패디스 마켓 뒤쪽에 있는 Woolworths Metro Haymarket! 시드니의 거리는 절대 간판이 지배하지 않았다. 유럽처럼. 이 건물이 어디 마트처럼 보이는가.
좀 낯선 느낌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 들어서니 여느 마트와 같다. 얻어들은 대로 소고기가 많다. 우리와 달리 마블링이 거의 없는. 그렇다고 온갖 부위로 나누어 팔지도 않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값이 싸다는 것이다. 볼 것 없이 카트에 담고 또 담았다.
ㅡ호주에 가면 무조건 소고기를 먹어야 한대요.
손자가 옆에서 속삭인다.
ㅡ어떻게 알아?
ㅡ제가 공부 좀 했죠. 또 호주는 우유도 맛있다는 데요.
그랬다. 우유의 종류도 많았고 맛도 우리가 마시는 우유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요거트 역시 종류가 다양하고 맛의 느낌이 다르다.
계산하고 나오는데 입구에 주류 판매점이 추파를 던지고 있다. 우리와 달리 마트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 뉴질랜드 산 와인이 좋다고 하여 화이트 와인으로 샀다. 그 은은한 향을 생각하며. 그리고 매일 그 와인을 마셨다. 손자가 바구니에 담은 수제 소시지는 일품이었다. 그냥 고기를 다져서 만든 듯한. 나는 평생 먹은 소시지보다 더 먹은 것 같다.
여행은 이런 맛이다. 자유롭게 걸어 다니고, 앉아서 느끼고, 당기는 대로 먹는. 그야말로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다가 해프닝을 벌이기도 하면서 웃고 웃어야 한다. 2018년 대만 타이중 국립자연박물관 맥도널드 가게에서 쪽팔린 이야기다.
https://blog.naver.com/himnal2/222902271348
아내와 둘이서 걸어보려는 쿠알라룸푸르 겨울 여행은 어떨까. 어떤 걸음으로 다가올까. 그때도 Airbnb와 같이 할 것이고, 어느 길가 카페에서 한 잔의 커피를 즐길 게다.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