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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음, SYDNEY

07 천문대 노을 언덕에서는

by 힘날세상
점심 무렵부터 돗자리를 깔고 앉은 저들은 오직 노을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나의 마음은 하버브리지를 달리고 있었다. 시드니 마라톤대회를 생각하며.



하버브리지가 내려다 보이는 옵저버토리 힐 공원Observatory Hill Park은 아늑하고 낮은 언덕이었다. 몇 걸음 걸어내려가면 강가에 이를듯한. 커다란 노거수가 드문드문 자리 잡은. 시드니 천문대가 있어서 사람들은 천문대 언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가 노을 맛집이다.


여기로 올라오는 길은 아름다운 골목을 걸어야 했다. 봄볕이 마중을 나오는 골목.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그 사람들이 내놓는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골목을 따라 걸었다.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 골목에서 나는 속절없이 함몰되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낯선 느낌 때문이었다. 그 낯섦과 마주하고 전주 완산동의 골목이 이어졌다. 데칼코마니. 완벽한 데칼코마니.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은 살고 있었고, 그들의 삶은 피부색이 다르고, 펼쳐지는 모양이 제각각일 뿐, 다 같은 흐름이었다. 돌아보며 또 돌아보며 골목을 밀어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대학시험에서 떨어지고 재수하던 시절의 전주 동서학동의 그 좁은 골목. 이희찬 시인을 만났던 풍남동의 골목은 담벼락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 골목에서 우리는 어쭙잖은 이야기들을 흘리고 었었다. 우리는 그 무너져 가는 담벼락에 기대어 우리의 재수생활에 욕을 해댔다. '씩팔, 왜 이렇게 부대끼는 거야.' 그는 '씩팔'이라고 뱉었고, 나는 '씹할, 우리의 색깔은 도대체 뭐야.'라고 주어 담았다. 그런 골목이 있었다. 젊었을 때. 유난히 굽이가 많았고, 무너져 가는 담벼락이 많았던. 그 골목에서 이희찬 시인은 시를 썼다. 리브울만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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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많은 골목을 만난다. 그렇다고 우리가 만나는 골목이 모두 다 골목은 아니다. 삶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객이 바라보는 골목은 어떠한 이유로도 골목이 아닌 이유이다. 이미 오규원 시인이 세상을 향해 외쳤지 않은가. <개봉동과 장미> 개봉동 골목에 아무리 장미가 피어도 개봉동 사람들은 장미와 닿을 수 없고, 그래서 개봉동 골목은 장미를 피해 왼쪽으로 굽고, 개봉동 골목의 집들은 문을 열지 않는다. 개봉동 사람들의 삶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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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대 언덕으로 오르는 골목,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엉켜 있는 골목에서 내가 만난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모여든 사람인가. 그들이 엮어내고 있는 꼬불꼬불한 삶의 이야기인가. 골목 입구에서 체스chess를 팔고 있는 백인 아저씨 말대로 한 판의 체스처럼 누군가에게 조정당하고 있는 우리의 연약한 한평생인가.


도로를 건넜고, 하버브리지 아래를 통과하는 굴다리를 지났을 때 손을 뻗고 몸을 굽혀 맞아주던 그 커다란 나무, 나무들. 그 생생하던 오후의 햇살. 옵저버토리 힐 공원Observatory Hill Park은 오페라하우스와든 다른 세상이었다. 낮은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라 거대한 나무에 기대어 섰다. 내려다 보이는 하버브리지를 건너가는 바쁜 자동차들의 행렬. 그 뒤로 푸르다 못해 검은 바다가 질펀한 오후의 햇살을 끌어안고 있었다.


ㅡ그래, 다 이렇게 사는 거야.


하버브리지의 바쁜 삶을 바라보다가 부여 성흥산성의 사랑나무를 불러냈다. 젊은 연인들을 불러들이는 사랑나무는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마법이 있다. 어쩌면 스스로 모든 것들이 멈추어 서는지도 모르겠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정지시켜 버리는, 그래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고, 마침내 진정한 하나로 거듭나게 하는 마법. 그런 까닭에 사람들 앞에서 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박목월 시인에게 나무는 묵중한 수도승이고, 어설픈 과객이며,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이다. 나무는 시인의 안쪽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결코 뽑아낼 수 없는 나무. 이양하에게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이다.


지금 내가 기대어 서있는 이 거대한 나무는 무엇일까. 나의 부족한 필설筆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이 나무는 나에게 무엇인가. 나무를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마음에 담겨 있는 하나의 표상表象이라고 본다면 내가 받아들이는 느낌이나 관점에 따라 정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대어 서 있는 그때의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옵저버토리 힐 공원Observatory Hill Park에서 지금 내가 기대어 서 있는 이 나무는 적어도 한 여행객과 동행하는 걸음이 아닐까. 동반자 같은. 너무 거창한 상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슬그머니 실소失笑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게 여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여행은 살아 있는 시간인가 보다.





South African War Memorial.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기념비이다.



눈에 띄는 조형물이 있다. South African War Memorial. 1910년에 뉴사우스웨일스 제3기병대(3rd NSW Mounted Rifles) 출신 병사들과 그 유가족, 지역사회가 중심이 되어 세웠다는 이 수수한 기념비는 꼭대기에는 작은 장식(구체 형태의 오브젝트)이 있고, 받침대에는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시드니에는 두 개의 South African War Memorial이 있다. 하나는 하이드 파크에 있는 화려한 청동 기마상과 옵저버토리 힐 공원에 있는 간결한 석조 기둥 형태의 기념비가 그것이다. 이 기념비는 모두 남아프리카 전쟁(1899~1902)에 참전한 뉴사우스웨일스 소속 기마병 연대와 관련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하이드 공원의 청동 기마상은 전국 규모의 추모비로 1932년에 세웠고, 옵저버토리 힐 공원의 기념비는 지역 단위 추모의 성격이 강해, 뉴사우스웨일스 제3기병대 및 커뮤니티 중심의 기념비이다.


기념물 앞에서 브라이덜 샤워Bridal Shower 가 열렸다. 그날 참 거센 바람이 언덕까지 올라와 시샘을 부렸는데 드레스 같이 얇은 옷을 입은 신부와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하하호호 오후를 즐겼다. 음식을 먹으며 술잔을 나누는 모습을 연출했지만 바람으로 인해 분위기는 진즉 무너지고 말았다.


오후가 깊어지면서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많았다. 돗자리를 들고 와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았었는데 그들이 보는 방향은 하버브리지 쪽이 아니라 강 안쪽이다. 이곳에서 일몰을 즐기기에는 하버브리지는 아무 쓸모없는 조형물에 지나지 않았다. 하버브리지 아래를 지나 강 안쪽 깊숙이 밀려들어간 바람과 하늘과 기울어가는 해가 연출하는 장관을 즐기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일몰을 즐기는 대신 서큘러키 Circular Quay에서 쿠르즈를 타고 키리빌리Kirribilli로 가서 오페라하우스의 다른 느낌을 즐기기로 했다. 돌아오는 배에서 하버브리지 뒤에서 붉게 물드는 황혼을 즐기는 행운을 바라면서.


노스시드니에서 돌아오는 크루즈 선상에서 하버브리지의 일몰을 마주하는 행운을 잡았다. 아름다웠다.




옵저버토리 힐 공원Observatory Hill Park의 조망은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지만, 조망으로 치면 하동 평사리 최참판댁 뒤 고소산성에서 바라보는 섬진강의 굽이굽이는 보는 이의 넋을 단번에 빼앗아 버린다. 아침나절에는 깨어나는 강물을, 저녁나절에는 백운산과 구제봉 사이로 피어나는 황혼은 가히 장관이다. 그런데도 오늘 옵저버토리 힐 공원Observatory Hill Park에서의 조망은 어디에 적어두고 싶었다. 그럴수록 마음 한쪽에는 임대영 사진작가가 떠올랐다.




20250926_092159.jpg 글도 잘 쓰는 임대영 사진작가님의 역작. 이 한 장을 위해 왕시루봉을 스무 번이나 올랐다는.


그러다 어느 겨울날 저녁,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섬진강 모습을 보았다. 노을에 반사되어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 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도는 어떻게 잡고 노출은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 이제 평생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장면일 터인데 가슴은 쿵덕쿵덕 뛰고, 손은 허둥지둥 필름도 제대로 끼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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