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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Jan 30. 2019

저렴한 하루

맥도널드와 봄봄

저렴한 하루


1. 점심


별 것도 안 먹으면서 점심시간마다 메뉴 고르는 일은 꽤 성가신 일이다. 비슷한 메뉴와 식당을 두고 새삼 뭐 먹을까, 어디서 먹을까 재는 게 귀찮아 오랜만에 맥도널드 갔다.  평일 점심시간에 햄버거 가게의 주문 기계 앞이 문전성시다. 평소보다 두 배는 많다. 뭔 일인가? 보니, 평소 ₩5,500 하던 쇠고기, 치킨, 새우 버거 세트가 ₩4,900 행사 기간이란다. 주문의 90 프로는 행사 메뉴다. 꼭 행사 때문은 아니지만 나도 그런 행사 버거 세트 하나를 시켰다. 대기 인원이 꽤 된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 중 하나가 줄 서는 것이다. 밥 줄이고 사람 줄이고 줄 서는 건 참 피곤하고 싫다. 아무리 맛집이라고 소문나도 줄 서서까지 먹고 싶지는 않고, 누가 그 라인의 권력자라도 그 사람 뒤에 줄 서고 싶지 않다. 밥맛도 없던 참에 점심시간을 좀 더 여유 있게 쓰려고 온, 영양가 없는 햄버거집에서 줄까지 서고 싶지는 않지만 다른 곳으로 재 동하는 시간이 아까워 그냥 줄 섰다.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슬로우 주문과 대기를 한 끝에 햄버거 세트가 담긴 쟁반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줄지 않는 줄을 보며 한입 무는데 갑자기 눈이 시큰했다. 천 원도 안 되는, 고작 600원 할인 행사에 사람들이 이렇게 바글거리다니……주문의 90 프로가 행사 메뉴라니……. 

이미지-픽사베이

밥 터 인근은 학교나 주택가가 없고 은행, 공단, 상가 중심지라 주문자들 면면의 대부분은 명색이 학생도 아닌 직장인들이다. 그래서 손님들 대부분도 어린 학생들은 전혀 없고 20대 중후반부터 중 장년의 직장인들이다. 미성년자 학생도 대학생도 아닌, 명색이 돈 버는 이들이 조금 더 싼 점심을 먹고 조금 더 쉬기 위해 패스트푸드점으로 이리 몰린 것이다.

₩5,000이 아닌 ₩4,900은 단 백 원 차이로 600원이 아닌 천 원이 더 싼 착각을 하게 하는 체감 효과가 있다. 업체의 마케팅과 소비자의 착시, 가난한 주머니와 월요일의 피로가 합쳐져 오전 내내 박카스와 커피를 쥐고 살던 직장인들이 한 끼 밥값, 점심시간 좀 벌어보겠다고 앉아서 받아먹는 밥 대신 서서 기다리며 빵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에 목이 다.

햄버거를 우적 거리며 본 포털 뉴스에선 청와대 사칭 사기에 놀아난 엘리트 고위직들이 몇천만 원에서 억 단위의 돈을 사기꾼한테 뇌물로 바쳤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2. 커피


상습 불면자에겐 휴무 다음 날과 휴무 전날의 오후 두 세시 근무가 가장 힘들다. 간밤의 불면과 점심 식곤증이 불가항력의 연합군으로 같이 쳐들어오고, 오전의 업무 긴장도가 실실 풀어지면서 거의 만취 직후의 잠이 쏟아진다. 원래의 커피 취향은 한약급의 쓰고 진한 블랙인데 쓴 게 더 이상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는 날은 생크림에 시나몬 가루 팡팡 뿌린 달달한 커피가 몹시 당긴다. 근무지엔 봉지 가루 커피밖에 없다. 두 잔 이상이면 커피점 배달도 되지만 찬바람 쐬면서 잠도 깰 겸 직접 사 오겠노라며 밖에 나왔다.


집 밖 동네고, 직장이고 동서남북 어느 쪽에나 커피 매장이 넘친다. 브랜드와 가격대를 입 맛과 형편대로 고를 수 있고 커피 선택은 점심 메뉴보다 선택하기 쉽다. 다국적, 대기업 고가 프랜차이즈와 저가 프랜차이즈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다. 커피 사러 간다고 나와선 내 것만 사 갈 수도 없고 여러 잔 사기엔 별다방, 천사다방 것은 부담이다. 호기롭게 '까짓 거 한턱내지 뭐~'라며 고가 다방으로 몸을 놀리다 낮에 본 햄버거 줄이 발목을 잡았다. 밥값보다 비싼 커피를 호기롭게 마시는 게 오늘은 왠지 지랄 같아서 싸다는 <봄봄>으로 갔다.

과연! 놀랄 정도의 가격 차이였다. 별이나 천사와 두 세배 차이였다. 별이나 천사는 다 높은 곳에서 살아서 가격이 비싼 건가!


나는 거기서 또 목이 메고 말았다. 거기도 줄이 길었다. '불경기'가 무슨 유행가 후크송 같이 쓰이는 세상에 이런 곳은 그래도 호황이구나. 호황에서 불황을 발견하는 아이러니!  

주문과 음료 제작을 20대 중후반의 청년 둘이 하고 있었는데 일과 사람에 찌든 그들의 얼굴은 <봄봄>인 가게 상호와는 아주 달랐다. 지친 겨울의 낯빛이었다. 갓 뽑아낸 고소하고 향 좋은 원두 가루가 아니라 몇 번 우려내 향은 다 날아가고 쓴 맛만 남은 다 식은 커피색이었다.


이런 저가 프랜차이즈는 쪽수(고객 수)와 경비가 마진의 핵이라 최소 인원으로 최다 고객을 받아야 차 떼고 포 떼고 기본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자영업 사장이라면 인건비 줄인다고 10시간 내외의 노동을 하느라 골병 날 것이고, 알바라면 같은 최저 시급으로 별 다방 몇 배의 손님을 빨리 쳐내느라 골병 날 것이다. 그들에게 별과 천사다방 사장님들의 여유, 기계적인 '솔~' 톤의 음성과 친절한 멘트를 숙달되게 내뱉는 밝은 음성과 안색을 요구하는 게 무리하게 느껴지는 인원과 줄이었다.


따뜻하고 생기 발랄한 이름의 <봄봄>에서, 쓰고 지친 겨울 같은 광경을 보고 나니 달달한 생크림이 얹힌 커피도 그리 달지 않았다. 내 입 맛이 쓴 거지, 가격 대비 괜찮은 맛이다.

 " <봄봄>에서 일하는 청년들과, <봄봄>에 들리는 가난한 손님들의 인생에도 좋은 향과 훈풍 가득한 "봄봄"이 라지 사이즈로 가득하시라!"라는 새해 덕담은 속으로만 했다.


이미지-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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