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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는 사람 Oct 24. 2023

사라진 것의 안부를 묻다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의 이 소설집은 작게는 개인 간의 진실한 소통과 대화의 의미에서부터 깊게는 쓰는 것의 의미와 책임,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소설적 방법 등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 거리를 많이 주었다.

다 쓰기는 힘들고 내가 각각 다른 소설 속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작가가 중요시하는 어떤 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것을 중점으로 정리해 다. '대화, 쓰기의 태도''빛'이라는 두 관점에서.

소설 전반에서 화자가 선망하는 사람들의 어떤 특징, 좋은 태도가 있다. 단순하게는 '글을 잘 쓰는 사람' 들이지만, 좀 들여다보면 '잘 듣는' 태도와 '상처받은 뒤의 자세'다.


상처받은 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몫>의 정규직 사원인 그녀는 차가 없는 인턴사원 다희에게 카풀을 자주 해준다. 다희가 야근으로 늦은 날은 그녀도 자기 일을 하며 기다렸다가 집까지 태워준다. 그런 어느 날 다희는 그런 배려가 좀 부담스럽고 다른 인턴들에게 특혜로 보일 수도 있으니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한다.

'호의''상처'가 되는 상황에서 그녀가 자기 상처를 대하는 장면의 독백이 오래 남았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같은 상황에서 그럴 수 있다, 서운하지만 상대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다 정도는 나도 되지만 그녀처럼 생각하지못 했다. 어떤 누구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마음이란 이런 거 아닐까. 누구를 좋아하는 내 마음 아닌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크다면.  


대화의 태도 1 

"같이 가도 될까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영어 에세이 강사는 수업이 끝난 어느 날  내가 사는 지역인 용산에 갈 일이 생겼다며 나에게 "같이 가도 돼요?"라고 묻는다. 단순한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우리는 "어, 가는 방향 같네. 같이 가자. 같이 가면 되겠네."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이 소설 속에선 같이 가도 되냐고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다. 그것도 제자가 아닌 선생이.

대게의 우리는 내가 좋으니 너, 상대도 좋겠지라고 쉽게 생각하거나 아예 그런 생각도 못, 안 한 채 같은 방향이니 같이 가면 되겠네라고 편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나이나 위계가 아래라 생각하면 더 그러기 쉽다.


대화의 태도 2

남의 말 자르고 무시하지 않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화자는 영어 에세이 수업을 듣는다. 수강생들이 매주 한 편의 에세이를 발표하고 서로 합평하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 시간에 한 학생이 자기 자매들 얘기를 한다.

큰 언니는 출산 퇴직 후 경단녀가 됐고 작은 언니는 계약직을 전전하는데 계약직 정년인 서른다섯을 앞두고 걱정이 많다. 취준생인 나 역시 전원 남성 면접관만 있는 면접을 계속 보러 다니면서 나라고 언니들과 달라질까?라는 내용의 글을 발표한다.      


한 학생은 이 글에 대해 '일부 개인의 특수한, 극단적 상황'을 사회적 구조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읽힌다는 감상평을 한다. 발표자는 나와 우리 언니들이 겪는 문제들을 개인적인 (무능)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나 우리 언니들한테 너무 미안한 일이라는 말을 한다. 나는 이런 건 극단적 상황이 아닌 일상, 평범한 얘기라며 발표자의 글에 동의를 표한다. 이때 '개인의' '극단적 상황' '강요'라던 학생이 내 말을 가로막으며 그런 말들은 중요하지 않고, 노동 유연화 정책, 신자유주의적 정책 어쩌고 같은 거대 담론을 꺼낸다. 책 속에는 이 발언자의 성별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지는 않지만 아마 남학생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새로울 것 없는 주장과 현실에서도 흔히 있을 법한 토론 장면인데 내가 주목한 것은 강사의 태도였다. 이전 수업까지 강사는 학생들끼리의  발표와 토론을 주로 듣는 쪽이고 특별한 개입을 하지 않았는데 이 순간에는 토론에 개입한다.

타인의 어떤 의견을 '중요하지 않다'라고 함부로 단정한 것,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른 것을 지적하고 재발 방지와 즉시 사과를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말라고 한다. 평소 내 의견이 하찮게 취급당하거나 말 자르던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사과를 받는 상황이 오히려 당혹스럽다.      


<몫>에도 이런 얘기가 또 나온다. 교지의 세미나 수습 간사인 정윤은 내가 선망하는 글을 쓰는 선배인데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정윤은 말을 끊지 않았고, 충분히 들은 뒤에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다.'

정윤도 에세이 강사처럼 잘 듣는 사람이면서 말해야 할 때는 침묵하지 않는다. 세미나 주제를 정하는 토론에서 누군가의 의제가 '사소'하거나 '시의 부적절'한 얘기로 무시될 때 정윤의 지원과 반론으로 그 의제가 통과될 때가 많다. 반대되는 의견들은 한때는 중요했거나 여전히 중요한 얘기지만 지금 당장 다수의 관심을 끌만한 핫한 이슈가 아닌 경우다.     



쓰는 행위는 벌어진 상처 속에서 보이는 작은 빛을 발견하는 일

자기 목소리 잃지 않고 계속 가보기


음성대신 문자적 말하기가 쓰는 것일 테다. '말 잘하기'가 아닌 '잘 말하기'다. 그것은 남의 말을 그저 잘 듣기만 하고 말거나 들은 말 전부를 내 생각으로 수용하라는 건 아니다. 또 말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비겁함, 무관심, 순종이라고 말한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영어 에세이 강사는 타인의 비판이 두려워 안정적인, 중립적인 글만 쓰는 내게 이런 말을 한다. 글을 쓰는 방식엔 여러 가지가 있다는 사례를 들면서 어떤 게 더 좋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남의 생각에 휘둘려 자기 생각을 잃지 마라'라고. 또,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 그저 무관심한 것,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위'라고. 

<몫>에서도 사실 나열, 요점 정리 위주의 글을 쓴 내게 정윤은 말한다. '자기 생각'이 없다라고.

 

잘 듣기와 잘 말하기는 잘 읽기와 잘 쓰기로도 읽힌다. 잘 듣는 게 잘 읽는 거와 같다면 결국 읽는 사람은 쓰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깊이 잘 읽는 사람이 잘 쓰는 사람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작가론도 느껴지는 장면들이었다.

그럼 잘 듣고 잘 읽어 잘 쓰고 싶은 작가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 했을까. 나는 그게 '꿈꾸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느꼈다.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  꿈을 잃지 않는 사람' 아닐까.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이루어질지 아닐지 잘 모른다. 일단 꿈을 꿔 보는 거다. 그 꿈은 상처 속에서도 발견되고 상처 너머를 보고 상처와 함께 넘어가 보는 거다.

상처가 아물고 난 뒤가 아니라 상처와 함께. 그래서 <파종>의 소라는 삼촌과 있었던 자리에서 생긴 무릎 상처를 만지며 "상처가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한 것일까.

조숙한 소라가 어떤 꿈을 꿀 수 있게 된 건 삼촌이 준 사랑 때문인데 삼촌과 같이 있던 시간에 생긴 상처를 잃고 싶지 않아서. 꿈을 발굴해 준 상처를 잃기 싫은. 소라의 저 말은 영어 에세이 강사의 다음 말과 연결된다.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 그래서 '더 가보고 싶었다.'라고 쓰는 것.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글쓰기- 사라짐의 안부를 묻는 일


소설집의 주요 인물 대부분은 '쓰는 사람'들이다. 세 편은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나오고 두 편은 직업은 아니지만 편지, 회고문 형식으로 쓰는 사람이다. 그 외의 작품들도 자기 얘기를 참던 사람의 목소리를 려준다는 형식에서 '구술 쓰기'라 할 수 있다. 각각의 소설에서 그들은 어떤 얘기를 쓰고 싶었던 걸까.     

최은영의 이 소설집은 인내심 강하고 성찰, 성숙한 인간에 대한 주인공을 바라보는 화자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 천착하거나 쓰고 싶어 하는 얘기다. 나의 선망이었거나 애증 관계의 인물들이 소식이 끊기거나 죽어서 사라지고, 살아 있고 소식은 알지만 마음에서는 사라진 사람들 얘기.


사라진 선생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죽은 삼촌 <파종>, 소식 끊겼다 재회한 선배 <몫> 후배 <일 년>, 엄마 같던 이모의 죽음 앞에 쓴 회고문 <이모에게>, <답신>의 죄수 동생은 언니와 감옥 밖 거리보다 멀어졌고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엄마는 오랜만에 만난 딸이 미국과 한국의 거리보다 멀어졌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최은영에게 그 사라짐, 이별은 단절이나 소멸이 아니라 소생, 재생, 성숙의 시간과 기억의 저장고이다. 그 빛은 하늘과 상앗빛 피부가 아닌 바닥, 깨진 무릎 같은 좌절과 상처 속에서 새어 나온다. 그 빛의 발견은 자기 몫이다.

-창에 달라붙은 눈은 금세 작은 물방울이 되었지만 바닥까지 내려간 눈은 지상의 사물들을 흰빛으로 덮었다.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일 년>

밤하늘의 별빛들을 보고 하늘에 구멍을 뚫어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는 저 너머 누군가의 '눈빛'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들에게 별빛은 신의 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환한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만 지상에 닿는 저 너머의 눈빛이 있다는 믿음을 말이다.     


<아주 사소한 빛으로도>에서 화자인 나는 에세이 발표 시간에 '통근' 속에서 만난 풍경들에 관해 쓴다. 그 풍경은 채워진, 빛나는 무엇이 아니라 '사라진' 것이다.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있다가 없어진, 사라진 것들. 비어버린 건물, 셔터가 내려진 철물점, 비어버린 상가, 용산•••나는 비어버린 풍경에 대해 썼지만 사실은 그곳에 있던 '사라진 사람'에 관해 쓰고 싶었던 거다. 다 어디로 갔을까.(여기 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도 낡고 오래된 골목을 걸으며 빈 집, 녹슨 자물쇠가 오래 채워진 집을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한다. '다 어디 갔을까. 어디서든 잘 살고 계시길.



<몫>의 희영은 '기지촌 여성의 추모 5주기 집회'에 다녀온 후 '기지촌 여성'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한다. 교지 편집위원 대부분이 '철 지난' 얘기를 왜 지금 다뤄야 하냐고 반대한다. 그거보다 더 시급하고 당면한 시의적인 주제가 많다고. 희영은 대답한다. "아직도 그곳에 사람이 사니까요."

그리고 "사죄는 한국에서, 강간은 미국에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무서운 말과 정의로 단죄하는 구호의 이중성, 마음을 알아보고 싶다고 한다.


작가는 사라진 것에 대한 추억이나 애상을 회고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사라진 것들의 안부를 잊지 않고 묻고 싶어 한 것 같다.

사라진 당신들은 어디 있나요? 사라진 그곳에서도 잘살고 있나요? 부디 잘살고 있기를요 하는 마음을 담은 사라짐의 안부.

읽고 쓰고 공부하는 길은 멀고 외로운 길이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그들의 말을 같이 들어준다면 덜 외로워지는 일일 것이다.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들끼리.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그래서 책 속의 인물들 중 '혼자' 읽는 사람들은 잘 없다. 에세이 합평은 혼자 할 수 없고 교지도 혼자 골방에서 쓸 수 없다. 이전의 남성 작가들의 남자 주인공, 주변 인물들이 자기애로 가득한 철학자, 예술가들로 주로 골방에서(만) 번뇌했다면 최은영을 비롯한 요즘 여성 작가들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자매애 같은' 우정으로 연대한다. 

그 우정엔 영원 불변하지 않아야 된다는 강박이나 훈시도 없고 오래 이어지는 결속력을 그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책 속의 여러 '나'에게 깊은 감화와 상처를 준 사람들 중 '부모'는 없다. 피를 나눈 오빠나 언니, 자식 얘기도 나오지만 직계 관계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대신 조카에게 편지 쓰고 삼촌을 그리고, 이모를 회고하고 딸에게 받은 상처를 손자에게 얘기하는 한 발 떨어진 관계로 얘기한다. 부모처럼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좀 덜 미워하고 좀 덜 끈끈해서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는 관계다. 이모, 삼촌은 부모보다는 멀고 학교와 회사의 선배는 친구보다는 편하지 않다. 긴 세월 교류하는 관계도 없다. 일정한 교류 뒤의 헤어짐이 가족보다 잦고 받아들이기 쉬운 대상, 관계다.


과거의 남성 작가들이 거대 담론이나 계급투쟁, 권력이라는 큰 주제에만 주로 골몰하고 어떤 조직이나 구조 안에서 피폐해져 가는 개인을 그리는 게 많았다면 오늘의 여성 작가들은 개별, 개인의 모습으로 사회 구조의 모순, 부조리를 묻는다. 작고 세심하고 섬세한 것이 크고 무거운 것에 짓눌려 하찮게 취급되지 않고 오래, 같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힌다.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시선과 말하고 쓰는 방식에 대한 세심하고 사려 깊은 전달도 좋았지만 이 글이 '문학'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아래 문장들도 아름다웠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창에 달라붙은 눈은 금세 작은 물방울이 되었지만 바닥까지 내려간 눈은 지상의 사물들을 흰빛으로 덮었다.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달이 눈앞의 바다를 파도치게 한다는 사실도, 바닷속에서 길을 잃어 익사하는 거북이가 있다는 사실도 기남은 알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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