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양봉, 횟집, 중국집, 모텔, 정유회사 ••
내 방에 불이 나갔다. 이미 몇 군데 조명이 하나 둘 나간 참이었는데 이젠 내 방이 아예 깜깜해졌다.
LED 등이라 아빠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빠는 바로 다음날 네 시간 반의 길을 달려와 전등을 모두 갈아주었다. 그렇게 멀리 있는 줄 알았다면 차라리 업체를 불렀을 텐데 아빠는 가타부타 어떤 말도 없이 그냥 그 길을 운전해오셨다. 내 방불이 나갔다고 왕복 9시간을 달려와 주시다니요,, 달이 떠 전화를 거는 애틋함을 나는 전등을 바라보며 느낀다.
나의 아빠는 다양한 재주와 재능을 가지고 있다.
아빠는 일단 물건을 잘 고친다. 손재주가 있어 무엇이든 조금 뚝딱이다 고쳐내기에 나는 어릴 적부터 아빠가 오는 날이면 고장 난 것들을 잔뜩 모아 아빠를 이끌었다. 그리고 아빠는 잡학다식하다. 이런저런 지식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내가 조금만 더 깊게 물어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또 독버섯과 몸에 좋은 버섯들을 잘 구별해낸다.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
아빠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한 자리에서 녹아내리는 나와 다르게 아주 부지런하다. 아빠는 성실하고 아는 것도 많고 손재주도 있지만 어쩐지 그 모든 것들이 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건 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 사실은 어린 시절 필독서였던 <12살에 부자가 된 키라>에 나와있지 않은 실전 경험서 같았다. 인생은 열심히만 한다고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교훈 가득한 동화가 아니라는 것!
바로 그 부분이 이 시대에 티끌 모아 티끌이라는 패배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일테다.
아빠는 정말 실로 다양한 직업들을 거쳐갔다. 내가 갓난아기일 때 아빠는 양봉을 크게 했는데 어느 날 그게 홍수에 몽땅 쓸려가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보다 더 전 연애시기에 아빠는 S전자에 다녔다고 하는데, 이건 내가 스무 살이 넘은 후 엄마의 푸념 섞인 말을 통해 전해 듣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첫 직업은 횟집 사장이었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나는 횟집 딸내미답게 산낙지를 두 손 가득 집어 참기름까지 야무지게 콕콕 찍어 먹곤 해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아빠는 회를 뜨고, 한식자격증이 있는 엄마는 매운탕과 밑반찬을 맡았다. 그 가게는 촌구석에서도 꽤나 장사가 잘 되었다. 해가 일찍 지는 시골동네에 어둠이 깔리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끌벅적한 방들이 줄지어 있는 홀 사이에서 나는 괜히 신이 나 방방 뛰어다니다 회를 얻어먹곤 했다.
그 횟집은 어느 날 내가 유치원에서 돌아와 보니 온 사방에서 뜨거운 연기를 내며 빨갛게 변해있었다. 불은 모든 것을 흐물흐물 형태가 없어질 때까지 뭉개버렸고 그렇게 생계의 터전은 전소되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적에 아빠는 중국집 사장이었다. 우리가 서울에 이사를 오고 한참 뒤에 아빠는 중국집을 차렸는데 그 가게도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친구들을 데려가 자장면과 깐쇼새우, 탕수육 등을 함께 먹었다. 배가 고프고 틈이 생기면 "야, 우리 가게 갈래?"하고 외치는 게 습관이었다. 아빠는 한 번도 오지 마라 한 적이 없지만 정말 철이 없는 딸내미였음이 분명하다.
이 중국집은 결국 지속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직원들로 인해 그만두게 되었다. 배달하는 사람은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나고, 요리사가 잠수를 타고, 재료 공급업체에서 펑크를 내는 일련의 과정이 한꺼번에 발생하면 아빠는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중학생일 적에 아빠는 모텔 사장이었다. 구미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시드니 모텔이었다. 시드니도 가보지 않은 아빠가 왜 모텔을 시드니 모텔이라고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먼 훗날 시드니에 가서 아빠의 모텔을 잠시 떠올리는 정도로 그 일은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이 직업은 친척들과의 마찰로 접게 되었다.
아빠의 다양한 직업들과 함께 우리 집의 가계도 함께 나부꼈다. 어느 때는 꽤나 여유로웠고 또 어느 때는 학원에 다니고 싶단 말도 꺼내기 어려운 때가 있었다. 아빠의 다양한 직업들은 그저 커다란 모텔 수건과 내 어린 날의 기억 몇 개를 남기고 아쉬움과 빚으로 마무리되었다.
어른이 된 나는 다양한 이름으로 흔들려왔던 아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각각의 이름마다 새로운 모양의 노력들이 필요했을테다. 그래도 아빠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쉬운 포기로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호주 워홀에 가서 일을 딱 두 달 하다 그만둬버린 것이었는데 사실 그 일은 그만두는 것이 맞았다.
급성장염이 왔고 스트레스로 눈이 항상 붉었고, 급기야는 생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뇌를 대신해 몸 이곳저곳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른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문제는 그만둔 후에 다시 나아갈 기회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도전으로 나의 실패를 덮지 않았기에 그 순간은 영영 부끄러운 그림으로 남아버리고 말았다. 쉽게 포기해놓곤 쉽게 다시 도전하지 못했다. 어쩌면 어린 나이가 날 감싸고 있는 좋은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호주에서 일을 그만두기 전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했다.
'힘들면 그만해야지. 괜찮아.'라고 말하던 아빠의 목소리엔 어쩐지 힘이 없었다. 한숨 한 스푼, 안타까움 한 스푼 정도 담긴 그 음성은 어쩌면 내가 아니라 본인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그 당시의 나는 그저 아빠의 말을 듣고 어쩐지 안심이 되는 동시에 조금은 슬퍼졌다.
작은 실패 하나에도 도전을 두려워하는 나는 아빠의 인생에 담긴 짙은 농도의 온갖 수고와 곤고함이 까마득한 우주 같다. 가끔 괜스레 인생이 고달프거나 서른인데 벌써 파이어족이 되고 싶을 때 아빠에게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일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럼 아빠는 "그냥 하는 거지"라고 대답한다.
그래, 그냥 하는 거지. 뭐.
이제 아빠는 정유 일을 하신다. 지난달에는 쿠바에, 그리고 언젠가는 사우디에도 다녀오셨다. 나보다 더 해외를 자주 나가는 것 같지만 그곳에서 관광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요즘 아빠는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현지에서의 의사소통을 위해 책을 사서 영어 문장을 더듬더듬 외운다.
나는 언젠가 아빠가 지금 배우고 있는 영어 문장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한다. 아빠 어깨에 얹은 인생의 무게를 내려놓고 모텔이 아닌 진짜 내가 발 딛었던 시드니로 함께 향하는 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