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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보철 Aug 02. 2021

방랑의 여정-독일의 ‘지겐’에서 8시발 기차를 놓치고

나는 매번 기차를 놓친다. 오늘 역시 역에 늦게 도착했다.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다. 기차가 떠난 철로를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다가 역광장으로 나왔다. 시계는 9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정된 출발 시각보다 한 시간 넘게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이다.


역 광장에 놓인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광장의 사람들, 그들은 절대 서둘지 않는다. 그들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역사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뭔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굳은 얼굴, 또는 환하게 웃는 얼굴들이 지나간다. 여행 가방을 꽉 쥔 손에서 그들의 확신을 읽는다. 무엇 때문에 어디를 갈 것인지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의지를 읽는다.


그런데 나는 이제 무엇을 하지, 어디를 갈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리고 보니 내가 여기, 지겐이라는 도시 그리고 지겐 역에 왜 왔는지도 석연치 않다. 지겐이 어딘지도 모르고 서울에서 출발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2시간을 자동차로 달려서 도착한 곳이 지겐이었다. 독일 서부의 소도시인 이곳을 기억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독일에서 유명한 공과대학이 있다는 것, 그리고 독일 맥주 중 베스트로 꼽히는 ‘크롬바커’ 타운이 지척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며칠 전에 ‘크롬바커’가 매년 여는 ‘지구촌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뜻밖이란 말은 내가 크롬바커와 연관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크롬바커 행사 내용은 전혀 모른다. 묻지도 않았고, 들은 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 얘기를 듣자마자 짐을 싸서 떠나왔다.


서둘러 떠나온 것에 대한 이유를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것은 갈증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소한 삶에서 벗어나고픈 갈증 때문이었다. 그 일상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삶의 시공간이다.


나는 반복적으로 기차에 대한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은 거의 같다. 역사에 도착한다. 역사는 매번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어느 역사이든 간에 기차는 떠나고 없다. 텅 빈 철로를 바라보는 내 뒷모습이 부각 된다. 그리고, 그런 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꿈에서 깨어난다.


나는 왜 계속해서 이러한 꿈을 꾸는가? 기차가 떠난 역사에 늦게 도착하고, 그리고 텅 빈 철로를 바라봐야 하는가?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돌변했다. 현실과 맞닥뜨린 것이다. 꿈은 꿈으로 끝나야 하는데, 꿈이 현실이 된 이 상황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희망 사항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이건 꿈이야. 현실일 리 없어.’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의식은 또렷해져 갔다. 낯선 곳, 며칠 동안 동양인이라고는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던 이방인의 땅이었으니 긴장을 안 할 수 없었다. 안절부절못했다. 광장의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고 다시 앉았다가 일어나고….


광장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날 수 없었다. 아직 내 머릿속에서는 판단이 서지 않았던 탓이다. 판단을 미루는 것은 두 개의 장면이 연이어 겹치기 때문이다.



장면 하나는 이제 막 20살 되는 아프리카 가정부의 얘기를 듣고 절망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에이즈에 걸렸다. 그녀로서는 통제 불가능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국인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했다. 그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그녀는 한마디 말을 던져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제겐 희망을 품는 것조차 사치였습니다.”


희망에 사치스럽다는 형용사가 붙는다니? 한 번도 여태껏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견고하게 굳어 있던 내 생각에도 균열이 생겼다. 이후 내게는 희망이란 절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상기하곤 했다.


두 번째 장면은 어두운 기억이다. 서울 청계천에 육교가 있던 시절로 돌아간다. 비가 몹시 내리는 오후였다. 나는 육교 위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한참 동안 한 청년을 지켜보았다.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고 낡은 회색 잠바를 걸치고 있는 내 또래의 청년이었다. 그는 육교의 첫 계단 구석에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차가운 빗물은 초라한 그를 세차게 때리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얼마나 절망했으면….


그것은 모든 것에 절망한 청춘에 울부짖음이었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날카로운 비명은 날카로운 비장한 칼날이 되어 나의 몸, 여기저기를 쑤셨다. 눈, 코, 귀 그리고 팔다리, 가슴과 등, 심장까지도 후비고 있었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그가 절망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청년의 절망을 받아들이는 극도로 예민한 나의 감각이 중요한 것이다.


오늘의 지겐 역사 앞 광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차가운 빗물에 온몸을 적시고 오돌오돌 떨고 있는 새, 길을 잃고 하늘을 날지 못하는 새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새는 바로 비에 젖은 청춘이자 또한 바로 ‘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희망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든다. 삶은 바로 희망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려고 안달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책 강연 방송 영화 연극 어디에서도 희망이 빠지지 않는다. 오늘날은 희망 특수의 시대이다.

하지만 희망에 대해 영국의 지성 러스킨을 떠올린다.  


‘인생에는 단 두 가지 실망이 있다. 하나는 희망한 것을 얻지 못한 것이고, 하나는 희망한 것을 얻는 것, 단 두 가지 실망뿐이다.’


여기서 주의를 요구할 것은 희망 사항을 얻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희망했던 것은 얻지 못한다. 다만 욕망했던 대상을 얻을 뿐이다. 희망은 대상, 즉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희망하고, 절망한다.

삶이 고통스러우면 사람들은 더욱더 희망을 찾는다. 고통을 거부하기 위해 사람들은 더 큰 희망을 창조한다. 하지만 희망은 결코 다가올 수 없는 미래이다. 허구를 가지려면 미래가 필요하다. 허구는 희망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희망을 품고 있는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로 돌아올 수도 없고, 미래로 미래로만 겉돈다. 허구 속에 헤매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희망은 전염병을 나르는 마음의 바이러스이다. 중국의 작가 루쉰의 말처럼 희망은 허망하다. 절망도 허망하다. 희망과 절망은 모두 허구의 산물이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들을 때마다 절망을 느낀다. 희망을 갈구할 때마다 저 마음 밑에서 웅성대는 절망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발원되어 서서히 마음을 돌고 돌아 겉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희망을 말할 때마다 절망하는 스스로 나를 보게 되는 까닭이다.


그런 것을 잘 알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내가 지겹도록 미욱해 보인다. 아무리 다짐을 해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실이 목을 옥죄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인생에서 완전히 절망하는 것, 그리고 희망을 버리는 것, 이것이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안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미래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이 순간을 강렬하게 살라는 것이다. 삶을 모조리 관통하는 강렬함이 요구된다. 그런 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다만 희망을 버린 자만이 새로운 여정인 내면의 방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번 여정을 급히 서두른 것은 사실 ‘사치스러운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희망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품고 떠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지겐 역사 광장 의자에 앉아서 나는 머리를 감싸고 있다. 청계천 육교의 청춘 시절의 절망스러운 상황과 다를 게 없다. 육교계단과 광장의 의자라는 것만 빼고 모든 게 똑같다.


이번 여정은 지겐 이라는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낯선 곳으로 떠날 좋은 기회였다. ‘아그네스 발차’가 노래한 자유의 땅, 카타리나가 아니어도 좋다. 카타리나는 희망 너머, 절망 너머의 낯선 자유의 땅이다. 그곳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아도 좋을 현실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오늘 나는 기차를 놓쳤다. 그리고 사치스러운 희망에 절망하면서도 광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광장에 하염없이 머물 수는 없다.


‘어디로 떠나야 할까?’


사실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정작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떠나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나는 떠나야 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지금껏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답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두렵기 때문이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은 행동의 동력이다. 두려움은 가끔은 무의식의 결단을 내리게 만든다. 전혀 통찰이 있어 보이지 않는 맹목적인 행동을 재촉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분명 나를 오늘 밤 행사장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세르비아 폴란드 멕시코 등지에서 몰려온 크롬바커 사람들이 벌이는 파티장으로 나를 몰고 갈 것이다. 그리고는 나는 그들 앞에서 술 마시고 춤을 출 것이다. 한 잔의 술을 마시기에도 벅찬 독한 술을 그들 앞에서 연거푸 10잔

을 들이킬 것이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고, 특히 이탈리아 친구는 해롱거리는 눈알을 굴리면서 내게 엄지 척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아침 햇살이 가득한 호텔 정원의 탁자에서 커피 향을 즐기면서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에서 온 일행 중 한 사람이 호텔 9층 창문을 열고 내게 아침 인사 손짓을 보낼 것이다.


오늘 지겐 역에서 절망스러운 시간을 보낸 나는 내일은 다시 희망이 샘솟는 일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에 만족감을 표시할 것이다. 비겁하지만 떠나지 않은 것, 아니 떠나지 못한 것에 대해 안도를 할 것이다.


그리고는 오늘도 나는 아그네스 발차가 노래하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보다 비교할 수 없는 더 높은 가치인 자유를. 그리고 희망 너머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기차는 8시에 떠날 것이고, 나는 다시 기차를 놓치는 꿈을 어김없이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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