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반짝 Feb 03. 2018

행복한 개인과 사회에 대한 갈망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개인주의자 선언』25쪽


개인이 주체로 서기 전에 우린 과연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타인을 의식하는 것과 타인을 인식하는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저자처럼 ‘내 삶이 우선인 개인주의자고, 남의 일에 시시콜콜 관심이 없으며, 누가 뭐라 하던 내 방식의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나만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관계를 맺고 살아가자면 어떤 식으로든 개인주의를 숨기는 게 편하다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북유럽 국가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낯설었던 경험이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복지와 자유 이면에는 개인의 존중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현 사회는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남들과 다르게 비치는 것, 튀는 것에 대한 공포.’가 만연하다. 그래서 적당히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튀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이 미덕인 세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 구조 문제를 언급하면 ‘환경 탓이나 하는 투덜이’로 간주한다. 사회는 어쩔 수 없으니 개인이 변해야 한다는 자기계발 논리의 폐해다. 115쪽


평소라면 이 문장을 뭐 어쩌라는 말이냐고 지난한 시선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성격은 조금 다를지라도 ‘환경 탓이나 하는 투덜이’로 남지 않았기에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생각한다.   더불어 개인이 존중받고 자존감이 높아질 때 삶의 만족도와 행복감이 높아지며, 여전히 삭막한 세상인데도 사회도 발전하고 변화할 가능성도 말이다. 


그럼에도 정당한 시선으로 ‘환경 탓이나 하는 투덜이’가 아닌 세상에 대한 원망과 공포가 더 깊게 자리해 범죄로 이어진 한 사건과 겹쳐졌다. 1999년 4월, 총기난사사건을 다룬『콜럼바인』속의 에릭과 딜런이었다. 왜 그 아이들이 자신이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에 총을 휘둘렸는지 추적해가면 갈수록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분명 그 아이들이 한 행위에 대한 정당성은 없다. 사건 해결을 위해 ‘FBI 요원으로 왔지만 임상심리학자로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퓨질리어가 에릭과 딜런이 남긴 기록을 보며 순차적으로 사건의 이유인 ‘왜?’에 접근해 가는 과정이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했다. 퓨질리어는 에릭과 딜런이 남긴 모든 기록과 자료를 반복해서 보며 날카로운 분석을 한다. 에릭이 분노와 우월감으로 사이코패스의 전형적인 과정을 밟으며 서서히 범죄자로 발돋움 하는 것과 달리 딜런이 강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지만 실천력이 없었던 아이였다는 것을 말이다. 


거의 모든 경고 신호를 보이는 아이는 공격을 계획하기보다는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준에 딱 들어맞는 아이는 가둬둘 것이 아니라 도와줘야 한다.『콜럼바인』539쪽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방법을 모르고 그저 모호하게 편견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면 될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속성이 약하다.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원래의 나로, 세상 속에 적당히 시선을 감춘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개인주의자의 선언』을 뒤늦게 읽고 개인의 노력과 ‘사회 구조 문제’가 개선될 때 불가능한 일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는 높은 소득보다 개인주의적 문화 때문으로 본다. (중략) 행복의 원동력은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이다.『개인주의자 선언』56쪽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가는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 그 시작은 개인주의적 문화를 만들어주는 일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개인과 사회구조 문화 등 다양한 측면의 변화가 이뤄졌을 때 우리에 맞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개인주의적 문화가 탄탄히 형성되었다고 해서 이미 일어났던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말은 아니다. 적어도 내 존재가 존중받는 만큼 타인의 존재도 함께 존중하는 사회를 기대해 보고 싶은 것이다. 에릭과 딜런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그러했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과 개인주의적 문화 또한 확장시켜 보고 싶었다. 페미니즘의 뜻조차도 무지했던 내게 벨 훅스의『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무시하고 간과했던 '나'라는 존재의 자유가, 여성이란 이유로 행해지는 불평등이 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라는 간결한 정의를 읽고 또 읽어서 그 의미를 깨우치기를 바랐다.『모두를 위한 페미니즘』(18쪽)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의 해방만이 아닌, 젠더의 평등도 포함된다는 사실이 페미니즘을 이해하는데 확연한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이 짜릿하게 다가왔다. '젠더 차별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페미니스트들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페미니즘은 여성의 일자리 창출 혹은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으려 안간힘을 쓰는 일부 여성들의 운동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인종, 성별, 국가를 떠나 모든 사람의 평등을 강조하지 않았더라면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여전히 편협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다 페미니즘의 계급투쟁에 관한 부분에서 개인의 해방이 이뤄지지 않을 때 진정한 평등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불평등을 목격하고 경험하면서도 묵과하며 많은 시스템 속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짐을,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 또한 진정한 해방이 없다는 사실들이 급작스럽게 몰려왔다.


개인의 해방과 평등, 개인주의가 빚어낸 자유로움과 행복감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이어지자 개인이 존중받을 때 그만큼 타인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확고해졌다. 반대 일 때의 혼란스러움도 말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최후 목표는 ‘지배를 종식하여 우리가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게끔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질서의 첫 번째로 ‘개인의 존중’을 말하고 싶어졌다. 그간 잊고 있었지만 개인이 존중 받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긍정의 힘을 발휘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벨 훅스의 말처럼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에서 ‘얼마든지 정의를 사랑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게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전 05화 이삿짐센터에서 절대 이사하지 말라고 했다(ft.책 이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