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장을 보면서 참 책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럴 때마다 항상 '욕심이 지나치다 vs 책에 대한 사랑이다'라는 정답 없는 고민을 해본다. 좀 더 넓은 공간이 있어 책들을 숨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도(마음 같아서는 내 잠잘 공간을 줄여서라도 책들에게 쉼터를 주고 싶지만), 현재에 감사하자는 마음과 늘 싸운다.
그러다 최근에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 놓은 책 중에서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거라고!
정말 속이 후련하고, 그간의 죄책감을 다 잊게 해주는 명언(?)이었다.^^
그렇게 읽은 책 혹은 골라서 읽으려고 한 책들이 꽤 되는데 어쩌다 보니 절판되어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오늘은 그 책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뿌쉬낀 - 뿌쉬낀
고등학교 시절 어려워했던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을 전집을 통해 새로이 탐독하고 있을 때였다. 책을 펼칠 때마다 나오는 수많은 러시아 작가와 작품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고 궁금했던 게 고골의 <외투>, 폰비진의 <미성년>, 그리고 뿌쉬낀의 작품들이었다. 그 가운데 뿌쉬낀을 가장 궁금해 했던 이유는 다른 작가들은 한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나온 반면 뿌쉬낀은 정말 여러 작품이 나왔다. 그래서 인터넷 서점에서 그의 작품을 검색해 봤는데, 한 권으로 된 전집은 절판이 된 후였고 단행본으로 몇 권이 있었다. 그래서 그 중에서 소설집을 사서 읽고 다른 단행본을 사려고 하는 중에, 우연히 광주의 한 서점에서 뿌쉬낀의 한권으로 된 전집을 보게 되었다. 손때가 타고, 너널너덜 하고, 굉장히 두껍고, 3만 9천원의 가격표를 달고 있었지만, 이미 내게는 그런 악조건 보다 갖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그때는 그 책을 살 여건이 안 되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자꾸 눈에 밟혀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틀 후에 광주에 사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그 책을 구해 달라고 했다. 아, 그 말을 하고 나니 왜 그렇게 가슴이 뛰던지. 정말 설렜다. 그러나 친구에게서 날아온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서점은 가보았으나 그 책을 누가 사 가버렸고 주문을 하려해도 절판된 책이라 구할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니 그 책이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다 불현듯 출판사에 문의를 해보자란 생각이 들어 출판사 홈피에지에 글을 올렸더니 재고 문의를 해보라며 전화번호 하나를 알려 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재고가 있었다. 책이 약간 더럽다며 9천원이나 깎아준 책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책이 내게 왔을 때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다. 책을 보는 사람들마다 이거 책 맞냐는 핀잔도, 집으로 들고 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의 힐끔거림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냥 기뻤다. 그렇게 내 생애 가장 두꺼웠던 책, 무려 1793페이지짜리의 뿌쉬낀 전집을 손에 쥐게(너무 두꺼워서 다 못 쥐었다. ㅋ)되었다. 2005년 1월 21일 금요일의 일이었다.
이 책은 1999년 뿌쉬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책들에서 발행된 책이다. 1999년이면 나는 고3. 그때 러시아 작품에는 관심도 없었고 뿌쉬낀을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알았다고 해도 이렇게 두꺼운 책을 살 용기도 없었을 것이다. 뿌쉬낀 200주년 탄생 기념이라는 이름 앞에 전집을 발행해준 열린책들이 얼마나 고맙던지.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가 뿌쉬낀이 썼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러시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라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 외에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많아져 갔다.
이 책을 받고 가장 놀랐던 건 엄청난 양의 작품 수였다.
이 전집에서 크게 서정시, 장편 서사시, 희곡, 민담, 운문 소설, 소설로 나뉘어져 있다. 서정지가 약 400페이지 장편 서사시가 360여 페이지, 희곡은 190여 페이지, 민담은 46페이지, 운문소설 270여 페이지, 소설은 370페이지, 해설 및 연보가 146페이지로 된 엄청나고 방대한 전집이다. 페이지 수로만 따져 보더라도 시인이라는 뿌쉬낀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인데, 거기다 다양한 장르와 운문소설이라는 새로운 시도까지 한 뿌쉬낀의 역량이 느껴져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해설의 제목을 번역자 석영중 씨가 '아, 뿌쉬낀' 이라고 한 것처럼, 나도 '아, 뿌쉬낀'이라는 감탄사에 많은 것들을 내포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감탄하고 감탄했다.
2. 율리시스 - 제임스 조이스
한 때 독자들 사이에 퍼졌던 <율리시스>에 관한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읽은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갖는 나름대로의 완독 불가능 이유를 들었는데, 하룻밤 이야기라면서 1,324쪽은 너무 하지 않냐는 말을 듣고 나 역시 격하게 공감했다. 11년 전에 구입해 놓았음에도 여전히 책장에 장식처럼 꽂혀 있고, 여전히 읽을 계획이 없어 그 핑계를 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며칠 전에 청소년이 읽을 수 있게 축약본으로 나온 <오디세이아>를 읽고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어서 완역 <오뒷세이아>를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얼마 전에 완역본을 구입해 놓은 터라 이렇게 마음이 생겼을 때 읽어보자 싶었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율리시스>가 오디세이아의 영어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소름이 돋았다. 여기저기서 듣고는 언젠가 읽을 것 같아 구입해 놓은 책들이 이렇게 연결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묵혔으니 이제 읽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만간 <오뒷세이아>든 <율리시스>든 읽어보자고 다짐했다. 이렇게 계기가 될 때, 동기부여가 될 때 읽는 독서가 즐겁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되었지만 동일한 번역자의 <율리시스>가 어문학사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있다. 책이 절판되었을 때는 기존의 번역자를 따라서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3. 롤리타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게는 세 가지 버전의 <롤리타>가 있다.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은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의 <롤리타>고, 그 다음에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의 <롤리타>다. 현재 민음사 출판사의 <롤리타>는 절판된 책이라 내 나름대로 희귀본이라 여기고 있다.
내가 읽은 책은 문학동네세계문학전집의 <롤리타>였고, 다 읽은 뒤에 <롤리타> 특별판을 선물 받아 총 세권이 되었다.
이 책을 읽기로 다짐 한건 책이 세 권이어서가 아니라 김영하 작가의 『읽다』때문이었다.
김영하 작가는 『읽다』에서『롤리타』의 첫 장 두번째 단락부터 도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순간 독자는 밀란 쿤데라가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정의한, 바로 그 의미를 실감하게 됩니다. 자,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기 싫다면 여기서 책장을 덮으시오, 라고 나보코프가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독자는 작가와 일종의 합의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작가인 당신의 도덕적 판단을 무조건 수용하겠다'가 아니라 '이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일단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책을 읽는 내내 독자는 이 합의를 번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번복을 하고 책장을 덮어버립니다.
『읽다』 123쪽
과연 나의 도덕적 판단을 유보한 채 계속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책장을 덮어버릴 것인지 무척 궁금해졌다. 그래서 책장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롤리타』를 꺼내들고 싶어졌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으면 더 용기가 날 것 같아 고전 읽기 모임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었다.
결국 나는 롤리타를 향한 험버트의 사랑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이 소설이 내게 남긴 건 무엇인가, 이 소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고리타분한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소설이 내게 불쑥 다가오면서 느낀 다양한 감정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강하지만, 아마 다른 분들과 함께 읽으면서 그 분들이 용기를 주지 않았더라면 절대 이 소설을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히 장담하건데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각자 다른 롤리타, 각자 다른 험버트를 만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을 시샘한다.
옮긴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빌려보자면, 우리가 만난 롤리타와 험버트는 역시나 각자 다른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각자 만나고 있으면서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끝까지 읽어보라고 이끌어 주었다. 그래서 나처럼 낙오될 뻔 한 독자도 완독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때론 완독하기 버거운 책을 함께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4. 토지 - 박경리
무려 12년 전에 사 놓은 토지 세트 도서다. 책을 구입하고 약 2년 뒤에 저자가 돌아가셔서 이 책을 읽기가 더 두려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 책을 읽어버리면 저자와 영원히 이별할 것 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하면 이해가 갈까?
이 책은 나의 부족한 설명보다 너무 익히 들어온 명성 때문에 꼭 소장하고 읽고 싶은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있고, 솔직하게 읽을 계획이 없다. <율리시스>처럼 어떠한 동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렇게 왔을 때 순식간에 읽어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세트도서는 이제 만날 수가 없다. 저자가 사망하고 난 뒤 저작권 문제가 있다고 들었고 출판사가 바뀌었다. 이 세트 도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는데, 좀 더 비싸졌고 디자인도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절판된 이 책에 대한 애정이 좀 더 있다. 이 책으로 <토지>를 읽을 것이고, 오랫동안 묵혀뒀던 마음의 짐을 말끔히 털어내고 싶다. 어서 그날이 오길 바랄 뿐!
5. 코기빌 3부작 - 타샤 튜더
나는 타샤 할머니를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국내에 출간된 모든 책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개정판은 제외). 그 가운데서 타샤 할머니의 그림책을 정말 좋아하는데, 코기빌 3부작 책이 특히 그랬다. 이 책으로 인해 코기도 알게 되었고, 종종 코기를 발견하면 자연스레 타샤 할머니가 키웠던 개들이 생각났다. 그만큼 특별한 책이라 책 속의 내용이 진짜처럼 느껴지고, 그림도 생생해서 아끼는 책이다.
현재는 품절되었지만(중고도서는 있다), 자꾸 표지가 쪼글쪼글 변해가는 게 아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활발하게 번역되고 출간되던 타샤 할머니의 책이 요즘엔 출간되지 않는 게 아쉽다. 그래서 그냥 번역되지 않은 해외도서를 사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게 있는 타샤 할머니 책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타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꼭 10년이 되었다. 할머니가 가꾸었던 정원의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고, 그림들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그림 속의 세계가 어디선가 존재하는 것 같아 즐겁고 신비롭다.
타샤 할머니의 다른 책들을 만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 이렇게 절판 혹은 품절 된 책들(다른 판본이 존재하고, 중고로 구입할 수 있는)을 살펴보니 감회가 새롭다. 아마 뒤져보면 이런 책들이 더 있을 듯 한데, 딱 떠오르는 책 다섯 권만 골라보았다.
개정판은 언제나 반갑지만 절판 혹은 품절은 마음 아프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 희귀본이 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