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 시바타 카츠이에

시바타의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겠다.

by 기억흡수

종말의 화염이 키타노쇼 성의 영롱한 처마를 타고 흐르는 밤, 시바타 카츠이에는 조용히 아내 오이치의 손을 잡았다. 붉은 갑옷을 벗어 단정하게 정리한 그의 눈빛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부끄러운 짓이오. 이치, 당신까지 이런 길로 이끌어···.”


카츠이에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이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우아한 손길이 단도를 들어 올렸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녀의 눈빛만큼은 단호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누이답게, 결단력이 깃든 그 눈동자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이것이 무사의 아내가 갈 길이옵니다. 제 선택이니 후회는 없어요.”


오이치에게 이것은 두 번째 경험이었다.

첫 번째 남편, 아자이 나가마사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한 후 자결할 때도 그녀는 이 순간을 각오했었다.

그때는 오다 노부나가의 자비로 살아남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그런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방 한쪽 벽장 속, 사내아이의 눈이 커졌다.

두 사람의 아들, 시바타 카츠류우는 입을 막은 채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단정한 목소리.

아버지의 무거운 한숨.

그리고 붉게 물들어가는 다다미.

오이치는 마지막 순간에 벽장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츠류우, 전국의 급류에 휩쓸리지 말고 너의 길을 걷거라. 항상 너를 사랑했단다. 꼭 살아남아야 한다.”


시바타 카츠이에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긴말 안 하마. 시바타의 모든 것을 네게 맡기겠다.”

“아버지...!”




일주일 전, 시즈카타케 전투


전운을 품은 새벽안개가 시즈카타케 산자락을 뒤덮고 있었다.

호쿠리쿠(北陸) 군단장, 시바타 카츠이에는 먹이를 앞에 둔 호랑이처럼 맹렬하게 군세를 움직였다.

늙은 몸이었지만 그의 지휘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오다 노부나가의 필두로 불리며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귀신 시바타’의 전술은 초반부터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전진하라! 사쿠마의 부대가 적의 중앙을 무너뜨리고 있다!”


카츠이에의 명령에 따라 그의 군세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선봉을 압박했다.

맹장 사쿠마 모리마사가 이끄는 주력 부대가 적의 중앙을 향해 날카롭게 파고들자 하시바 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카츠이에 님, 놈들이 퇴각합니다. 우리의 승리입니다!”


부관 하나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카츠이에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설치지 마라. 마에다는 언제 온다더냐?”

“토시이에 님의 군세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마에다 토시이에는 호쿠리쿠 군단의 중핵 무장이자 신뢰하던 전우였다.

카츠이에의 눈이 가늘어지며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 산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호라가이(法螺貝)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들려오는 공포의 소리였다.


“젠장, 하시바의 주력이다!”


밤새 초고속으로 백 리를 돌파한 하시바 군의 본대가 모습을 드러내며, 젊은 무사들로 이루어진 히데요시의 주력 부대가 맹렬한 기세로 공격해왔다.


“마에다···. 마에다는 도대체 어디 있느냐!”


카츠이에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며 창을 거머쥐는 사이, 한 전령이 급히 달려왔다.


“마에다 토시이에님의 군세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마에다 군은···. 참전하지 않고 물러나 관망하고 있습니다.”


카츠이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함께 싸우기로 한 전우 마에다 토시이에의 선택은 사실상 배신이나 다를 바 없었다.

시바타 군은 순식간에 불리한 전세에 놓였다.


마에다 군의 견제에서 벗어난 하시바 군의 젊은 무사들이 흉악한 폭풍처럼 밀려왔다.


카토 키요마사(加藤清正)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창날이 시바타 군의 중앙을 갈랐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철포대가 좌측을, 카타키리 카츠모토(片桐且元)가 우측을 타격했다.

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가 후방을 차단했고 카스야 타케노리(糟屋武則) 그리고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이 일곱 무사의 활약으로 시바타의 맹장,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가 쓰러졌고 시바타의 정예병들은 하시바의 젊은 무사들에게 도륙되었다.


카츠이에는, 자신의 정예병들이 생기가 사라져 허물어지는 순간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퇴각한다···. 키타노쇼 성으로.”


카츠이에는 마지막으로 전장을 돌아보았다.

숲속을 울리는 요란한 폭우에도 하시바 군의 함성이 우렁차게 들렸고, 멀리서도 선명히 보이는 마에다 군의 군기가 애처롭게 휘날렸다.


이때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멀리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미카와의 검은 인영이 미소 짓는 것을.





키타노쇼 성안,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카츠이에 님이 패배하시다니···.”

“마에다 군이 배신했다더군, 믿을 수가 없구먼···.”

“하시바 놈들이 곧 이곳으로 올 걸세. 어서 짐을 챙겨 성을 빠져나가자고!”


안과 밖이 어지러운 상황에 시바타 카츠이에의 아내, 오이치는 침착하게 대비책을 지시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누이로서, 그녀는 수많은 전쟁과 비극을 겪어 왔지만, 이번은 달랐다.

전국 최강이라 불리던 노부나가는 불과 1년 전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절명하였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의지할 형제도 없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괜찮으신 겁니까?”


시바타 카츠이에와 오이치의 아들, 시바타 카츠류우가 불안한 떨리는 목소리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이치는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아버지는 강한 분이란다. 곧 돌아오실 거야.”


이윽고 패잔병들이 성으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행렬의 끝에서 카츠이에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갑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병사들의 눈빛은 생기를 잃었다.

호랑이 같은 기세를 자랑하던 시바타 카츠이에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두 준비하게. 하시바 군이 곧 성에 도착할 것이니···.”


시즈카타케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은 절반도 되지 않았으며, 그중에서도 싸울 만한 이들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 모두는 이것이 무의미한 저항임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대는 호쿠리쿠 지방의 거성, 키타노쇼 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항복을 요구하는 서찰이 날아들었지만, 시바타 카츠이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가신들을 불렀다.


“내가 죽더라도 저 원숭이 놈이 그대들을 살려줄지 의문이 드는군.”

“나리, 저희의 무덤은 바로 여기 키타노쇼 성입니다.”

“그래 살 녀석들은 진즉에 떠났겠지···.”


그 순간, 성벽을 지키던 병사 하나가 다급히 뛰어왔다.


“주군! 키이(紀伊)의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어둠 속에서 검은 복장의 인영들이 성벽을 타고 달리며, 순식간에 날아올라 천수각으로 도약했다.

그들은 사이카슈(雑賀衆), 키이 반도의 닌자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 근육질의 다부진 체격에 당당한 눈빛을 가진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카츠이에 님, 부름을 받고 시바타를 구하러 왔소.”

“사이카 마고이치, 먼 길을 와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네.”


두 사람의 인연은 제육천마왕이라 불리던 오다 노부나가의 키이 정벌 당시였다.


사이카슈.

키이의 산과 강, 안개와 숲을 자유롭게 넘나들던 그림자들, 철포와 기습, 정찰과 교란에 특화된 무장 집단이었다.


그들은 노부나가 군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누구보다 강했던 노부나가조차, 당시에는 치욕을 삼켜야 했다.


사이카슈의 활약에 감명받은 카츠이에는 상부의 눈을 피해 접선을 시도했고,

때마침 노부나가의 압도적인 군세에 밀려 전멸의 위기에 처한 사이카슈에게 탈출로를 열어준 게 인연이 되었다.


“노부나가의 마수로부터 일 천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는 잊지 않고 있소.”

“그럼, 그 일 천의 목숨 대신 단 하나의 목숨을 부탁해도 되겠나?”

“물론이오. 은인의 명이라면 반드시 지키리다.”

“내 아들, 카츠류우를 반드시 살려주시게.”


카츠이에의 눈에 결연한 빛이 스쳤다.

이때, 성안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고 사람들의 비명이 뒤엉켜 울려 퍼졌다.

하시바의 정예병들이 성벽을 넘어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금방이라도 적들이 천수각에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사이카슈 대장, 사이카 마고이치는 시바타 카츠류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시바타의 미래는 반드시 지켜내겠소.”


마고이치는 등 뒤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사이카슈 정예 닌자들을 향해 명령했다.


“니시아치, 사사에몬, 코우나이, 료에몬, 준시로! 목숨을 바쳐라. 여기를 빠져나간다.”


사이카슈 5인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카 마고이치는 카츠류우를 어깨에 둘러메고 벽장의 안쪽의 숨겨진 길로 몸을 옮겼다.


방 한쪽 벽장 속, 사내아이의 눈이 커졌다.

카츠류우는 입을 막은 채 부모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단정한 목소리,

아버지의 무거운 한숨,

그리고 붉게 물들어가는 다다미···.

오이치는 마지막 순간에 벽장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츠류우, 전국의 급류에 휩쓸리지 말고 너의 길을 걷거라. 항상 너를 사랑했단다. 꼭 살아남아야 한다.”


시바타 카츠이에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등을 돌린 채 말했다.


“시바타의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겠다.”

"아버지...!"


카츠류우는 지옥에서나 들릴 듯한 처절한 괴성을 토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부모님은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오이치가 친모는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 카츠류의 어린 영혼에도 무언가가 영원히 꺼져버렸다.


사이카 마고이치와 사이카슈의 닌자들은 키타노쇼 성의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가려 했지만,

하시바 군의 병사들이 대부분의 출구를 막고 있었다.

불길은 점점 더 거세졌고, 성안의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하시바 군의 대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카츠이에가 죽었다!"

"놈의 목을 쳐라. 시바타 가문은 끝이다!”

“히데요시 님의 천하를 위한 첫걸음이다. 시바타의 모든 것을 죽여라!”


하시바 군의 장졸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츠류우는 불길 속에서 시바타 가문을 상징하는 기러기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불타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그 깃발이 이제는 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대장, 북쪽 성벽 너머로 가야 합니다!”


준시로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먼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고이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카츠류우를 업은 채 순식간에 성벽 위로 올라섰다.


“코우나이, 사사에몬, 준시로! 뒤를 부탁한다. 료에몬, 니시아치는 앞길을 확보하라!”

“네고로지에서 시바타에게 빚진 목숨을 드디어 갚는군요.”


그들은 키이 반도의 그림자들답게 밤의 어둠과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사이카 마고이치의 등에 업힌 시바타 카츠류우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부족한 것이 없었던 소년에게는 가혹한 밤이었다.

가족, 친구, 모든 추억이 남겨진 키타노쇼 성은 지옥의 업화처럼 붉게 불타올랐다.


“귀신 시바타의 어린 불꽃이여 울음을 거두고 귀를 열어라.”


사이카 마고이치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너의 모든 것을 찢어발긴 자들의 함성과 조롱 섞인 웃음소리를 가슴에 새겨라. 놈들의 얼굴에서 그 웃음을 지워내고 죽음을 선사하는 것을 너의 목표로 삼고 나아가라.”

“···.


카츠류우는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한참을 뒤돌아서서 불타는 키타노쇼 성을 바라보던 소년이 시선을 거두고 앞을 보았을 때,

그 눈에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릴 뜨거운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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